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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국수 스타일의 완성, 멸치 장국] “우리는 남해하고 가까우니까 육수 재료로 멸치가 자연스러워요, 그 비릿한 맛이. 저희 친구가 안동에서 건어물 상회를 해요. 근데 이 친구가 가게에 멸치 넣어 주는 게 제일 힘들대요. 이 사람들이 멸치 냄새가 나면 안 먹는대요. 사람들은 멸치 육수로 말아먹는 국수를 어려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멸치를 1시간 정도 달이는데 10분~20분밖에 안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는 다시가 안 우려 나는데 그만큼 멸치 다시가 익숙하지 않다는 거겠죠.” (이원화 국수집 대표 이원화) 음식을 먹을 때 맛있다는 느낌은 감칠맛 때문인데, 그 원료가 되는 것이 글루탐산이다. 조선 시대 잔치 국수의 국물 재료인 쇠고기, 닭고기, 버섯 등은 대표적으로 글루탐산이 풍부한 음식이다. 물론 멸치에도 같은 성분이 들어있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멸치는 건조 기간이 짧아 부패하기 쉽고 특히 말려놓은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 또한 업신여길 멸자를 써서 ‘멸어(蔑魚)’로 불렀다. 이런 멸치를 먼저 주목한 것은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온 일본인 어부들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국물 및 사료로 멸치의 수요가 많았는데, 수출되지 못한 멸치가 조선에서 육수용으로 팔려나갔다. 그러다 멸치는 해방 이후 일본과의 국교 단절로 수출길이 막히자 전량 국내 소비로 전환되었다. 조선 시대나 해방 이후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쇠고기 같은 범상치 않은 국물 재료에 집착할 수 없었던 서민들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싼값에 시중에 풀린 멸치로 돌아섰다. 1970년부터 본격화된 외식 산업의 유행으로 구포 국수도 버젓한 가게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되었다. 구포장과 인근 대동 안막장에서 국수집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였다. 안막 마을은 1920년대 낙동강변을 농지로 간척할 때 모여든 사람이 정착하면서 생겨났다. 1980년대까지 오일장이 들어서던 안막장은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상설 시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장터를 건물이 둘러싸버려 주차장이 건물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안막장에서 번듯한 간판도 없는 가게를 60여 년간 꾸려온 주금동 할머니가 처음 국수집을 연 것은 1959년 여름이었다. “친정이 여긴데 대신동으로 시집갔다 5년 만에 남편 죽고 친정으로 돌아왔어. 28살 먹은 과부가 두 살 된 딸을 업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하더라고. 들일로 밭일로 두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살았는데, 딸 맡길 때가 없어 곁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안막장에 밥집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를 업고 국수 한 그릇을 30원인가에 말아서 팔기 시작했지. 글쎄 처음에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국밥집에만 가더라니까…. 가게를 열면 손님이 올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러 가지 다해 봤어요. 국수 퍼지지 말라고 면하고 육수를 따로 내고 비린 맛을 없앤다고 육수에 땡초도 넣어보고 양념장에도 넣어보고. 내가 워낙 좋아하니까. 근데 희한한 게 비린내 없앤다고 만든 멸치 국수가 술꾼들 속 푸는데 더 좋은 거라. 그래서 멸치는 좋은 것만 쓸라고 남해, 진해로 사러 다녀. 국수 국물은 멸치를 많이 넣어야 맛이 좋아.” (대동 할매 국수 주금동) 얼마 전까지 구포에 하나 남은 국수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쓴 할매 국수집의 상차림은 독특하다. 할머니 말처럼 마치 한여름 농사철에 논두렁에서 먹던 새참 같은 모양이다. 즉석으로 끓여먹는 국수는 대개 소면을 쓰는 데 반해 이 집 국수는 쉬이 불지 않는 중면을 쓴다. 게다가 육수를 부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양은 주전자에 따로 나온다. 지금이야 식당에서 파는 음식이 되어 버렸지만 새참 한 그릇 믿고 힘든 논일을 견디는 농부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불은 면발과 뜨끈한 국물을 먹이고 싶은 아낙네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녹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