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기행문으로 만나는
식민지 조선인의 꿈과 이상
민족 변호사 허헌,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서양화가 나혜석까지
세계여행은 경성 엘리트의 삶과 조선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1927년 요코하마,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한 허헌은 시카고 비치호텔 투숙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란다. 하룻밤에 무려 1백 원! 조선에서야 3대 민족 변호사로 잘나가는 허헌이었고 미국 대통령까지 만나는 대표급 지도자였지만, 황금의 나라 미국의 자본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신세계였다.
약관의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머나먼 북국 스웨덴에 유학을 가 경제학사를 취득한 최영숙은 5개 국어에 능통한 수재였다.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며 세계여행을 감행한 최영숙은 인도에서 간디와 나이두를 만나고 그 이야기를 기행문으로 남긴다. 인재가 부족한 조국을 위해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고행 끝에 돌아온 조국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 결국 콩나물 장사를 하다가 건강 악화로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1930년대, 세계를 여행한 조선의 엘리트들, 그들은 답답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 앞에서 무릎 꿇기보다는 원대한 꿈과 이상을 꾸기 위해서 세계로, 세계로 향했다. 조선 3대 민족 인권 변호사 허헌, 세계가 사랑한 한류스타 무용가 최승희,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서양화가 나혜석, 세계의 강단을 누빈 명연설가 박인덕, 가슴에 조국을 품은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치인 안창호까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식자이자 명사였던 이들은 과연 세계를 돌아보며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들의 삶은 과연 여행 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는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식민지 시대 조선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대중잡지 ≪삼천리≫에 실린 세계여행 기행문을 엮은 책이다. 난생 처음 가본 여행지 뒷골목에서 엽기적인 경험도 하고, 인도의 간디나 쿨리지 미국 대통령 같은 명사들도 만나는 등 경성 엘리트들의 흥미진진하고 다채로운 여행담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엮은이 성현경은 당시의 기행문들을 오늘날 독자들이 읽기에 어색함이 없도록 현대 우리말로 옮겼으며, 이들의 삶의 궤적과 여행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흥미로운 해설을 덧붙였다. 또한 저자들의 여행 관련 도판 80여 개를 본문과 함께 배치해 독자들이 지은이들을 따라 함께 세계여행을 하는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세계를 만난 조선인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30년대는 세계여행의 시대였다. 물론 당시에 세계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파리까지 가는데 기차 3등석이 320원이었고,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의 3등석은 110원이었다. 신문기자 월급이 70원, 의사 월급이 100원이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싼 여비가 세계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 여행에 대한 욕망까지 막지는 못했다. 종교계의 도움을 받거나 외국에서 초청을 받기도 하고, 사재를 털어서 세계를 둘러보거나 공연이나 대회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외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인들은 그들의 여행을 관심을 갖고 지켜봤으며, 그들의 여행기를 함께 읽으며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여행을 통해 세계를 직간접으로 만나고 난 뒤 조선인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이처럼 세계여행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었다. 식민지라는 현실에 저항하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던 경성의 엘리트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세계여행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들이 꿈꿨던 이상, 겪었던 고난이 고스란히 담긴 기행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근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다른 근대’의 입구를 만난다.
치열했던 세계여행, 조국과 개인에게 부과된 운명과 맞서다
이 책에 실린 기행문들은 당시 세계여행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당시 세계 여행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첫째로 그들은 여행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미래를 그려보았고, 한편으로는 문화와 예술에 집중한 개인적인 여행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3대 변호사로 이름났던 허헌은 여행을 하는 동안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 노동당 당수 같은 유력 인사들을 만나 조선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아일랜드 의회와 법정을 시찰하는 등 거의 외교관이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고급 호텔 가격에 기겁하기도 하고, 길을 안내해주겠다는 영국 신사를 강도로 오해하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대표급 지도자라는 그의 위치가 무색할 만큼 세계의 변방에서 온 여느 행랑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무용수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무용을 접목시킨 최승희의 기행문을 보면,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세계라는 보편성을 획득한 예술가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거리지만, 친일과 배일의 위험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그녀의 행보가 못내 안쓰럽기도 하다.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이 묘사하는 독일 풍경을 읽다 보면, 마치 1936년 베를린 스타디움에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독일 국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같이 생생하고, 이정섭이 묘사한 파리 노동절 집회의 풍경이나 김세용이 참여한 상하이 인도인의 집회 광경을 보면 우리도 어느덧 식민지 조선인이 되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우리가 저 약소민족들에서 배울 것은 없는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여행의 목적이 개인적이었든 조선이라는 국가적 혹은 민족적 대의에 있었든, 여행은 치열했고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서 조선의 정치적 기획을 모색하기도 했고, 개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게도 했으며, 이혼과 불륜이라는 파국으로 삶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기행문들에는 자신의 삶과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제 오늘날 우리가, 기행문을 통해 그들의 여행에 동반할 차례다.
여행기의 온상, 1930년대 대중잡지 ≪삼천리≫란?
1930년대가 여행의 시대가 된 것에는 기행문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기행문이 대중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데는 대중잡지의 활약이 눈 부셨는데 ≪삼천리≫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29년에 창간에 1942년까지 발간된 이 잡지는 식민지 시기 가장 오랫동안 발간된 잡지로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친 다양한 기사를 실었고, 각종 지식과 사상, 그리고 문화 동향을 소개하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삼천리≫는 다양한 기사와 정보 오락거리로 조선 민중들의 숨구멍을 틔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검열의 시대에 여행기를 통해서 에둘러 조선의 현재에 대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구상을 담아냈다.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 소개
근대를 향한 정신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행기를 엮다
바야흐로 여행의 시대가 열렸다. 근대의 포문이 열리자 지리의 경계가 흔들리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반도로 제국 열강의 손길도 뻗어 들어왔다. 조국의 미래가 풍전등화인데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들어와 뒤섞이니 고뇌와 좌절 속에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하여 근대의 조선인들은 대해를 건너 대륙을 지나 있는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남녀의 가치, 계층의 위계, 조국의 정체성, 타자와의 경계가 모두 흔들리던 대지진 속에서, 그야말로 새로운 이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행이라는 그 고난과 빛의 길을, 근심과 노고로 가득 찬 고통의 길을 고스란히 담은 여행기들을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로 엮었다. 여행기에는 경험적 진실과 이상에 관한 몽환이 담겨 있다. 그래서 여행기란 위기의 비평이자 경험 위의 설계도이다.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 찬 동아시아 근대의 지적 변환들이 여행의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시험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진정한 여행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 창출하고자 하는 새롭거나 오래된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 까닭에 여행기란 한국과 동아시아 근대에 관한 하나의 징후이자 정신의 궤적이기도 하다. 보았던 것(지식), 보고 싶은 것(희망), 보아야 하는 것(당위)을 연결하는 이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근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다른 근대’로의 입구를 만난다. 야만인과 신, 좌절과 희망, 문화와 문명 사이에서 흔들리며, 자기를 재구성할 확신과 탈구축할 수 있는 이상을 발견하는 몸과 앎의 모험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근대사의 입구에서 만난 조선의 지식인을 재조명하다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는 근대의 입구에서 고뇌했던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남긴 글을 현대 우리말로 옮겨 한 세기 전 근대인들과의 조우의 장(場)을 만들고자 한다. 이동을 통해 불균질한 시공간을 경험했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 그들의 눈에 비친 서양과 타자, 이문화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기행문에는 서구와 비서구, 제국과 식민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성찰적 인식이 담겨 있다. 그들은 우리 근대정신의 원형이었으나 근래에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10년간의 미국 유학길 끝에서 1916년 한국인 최초로 영문 단행본을 미국에서 출간한 김동성은 ≪동아일보≫ 창간 기자,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한 우리나라 3대 기자였으며, 초대 공보처장을 지내며 대한민국 외교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3권에서 만나게 될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삼균주의 사상가로서 임정의 헌법, 강령의 초안을 집필한 근대사상가이다.
2권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에서 엮은, 조선 3대 민족 변호사 허헌, 조선의 로라 박인덕, 스웨덴에서 유학한 최초의 경제학사 최영숙 외 조선의 지식인들 또한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바랜 채 오늘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잊혀진 혹은 가려진 근대의 지식인들을 불러내어 우리 책장에 다시 세우는 것은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가 가진 또 하나의 의미다.
현실문화 출판사와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황호덕 교수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총서는 앞으로도 목록을 더해가며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들의 고뇌와 빛의 여행길에 동반하고자 한다.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