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12,13.16-19; 로마 8,26-27; 마태 13,24-43
오늘은 제3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교황님께서는 2021년, 신앙의 전수와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어르신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셨고, 그 후 가톨릭교회는 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인 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교황님께서는 전대사를 반포하셨는데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오늘, 진정한 참회와 사랑의 정신으로 미사에 참례하시고 세 가지 조건 즉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를 하시면 전대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둘째,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방문하거나 화상으로 만나서 시간을 보낸 신자들에게도 전대사가 수여됩니다.
셋째, 연로한 병자와, 집을 떠날 수 없는 모든 이가 죄를 멀리하고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세 가지 일반 조건(즉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을 충족하려는 지향으로, 세계청년대회의 예식들에 영적으로 함께 하면서, 특히 교황님의 말씀과 여러 예식이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동안 하느님께 기도와 삶의 슬픔과 고통을 봉헌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올해 세계청년대회는 8월 1일부터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개최됩니다. 전대사에 대한 이상의 내용은 다음 카페와 밴드에 올려 드렸습니다.
지난주 농민 주일에, 당진 돌마루 공소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해 드렸는데, 좀 더 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셔서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젊은 분들은 도시로 나가고, 대부분 어르신들께서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데, 어느 날 방문했던 댁에서 70대 어르신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도 우리 동네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아 그래요?” “그럼, 윗집 젊지, 저 집 젊지, 나 있지… 세 집이나 되네” 지금 솔로몬 대학 나오시는 분들은, 그 동네 가시면 물 떠 오시고 잔심부름 하셔야 되요. 스스로 연로하시다는 생각은 많이 안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세 가지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라난다는 것’이고 ‘서민의 삶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열매를 맺을 때 가라지들도 드러났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아니다. 그러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합니다. 땅속에서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엉겨 있어서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농사의 관점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잡초는 더 자라기 전에 뽑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여기서는 작은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나무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데요, 편안하고, 자신의 그늘에 있는 존재를 보호해주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와 있고 점차 자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요, 씨앗의 비유가 주로 남성들의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여성의 삶과 관련됩니다.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게 하듯 하느님 나라는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세 가지 비유 말씀에 공통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녹인다는 것입니다. 밀알과 겨자씨는 썩어야만 밀과 겨자 나무로 자라날 수 있고, 누룩은 녹아야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빛과 소금의 비유 말씀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은 여전히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리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까 걱정된다지만, 가라지가 분명하다면, 뽑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가라지가 밀의 양분까지 빼앗고 있지 않나요? 세상을 보면 불의가 판을 치고 오히려 불의한 사람이 잘되는 것을 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께 드린 말씀이 공감될 때가 있습니다.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때마다 옳은 분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하느님께서 그런 자들을 나무처럼 심어 뿌리를 박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군요.”(예레 12,1-2; 공동번역)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제때 벌하신다면, 그래서 세상이 조금 더 공정하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더 열심히 믿고 더 열심히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엉겨 있다 하더라도, 가라지를 어느 정도 골라낼 수는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를 전제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것은 ‘나는 가라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밀’이고 ‘의롭다’고 자신하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밀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과거에도 밀이었고 앞으로도 분명 밀일까요? 나는 가라지였던 적은 없었을까요? 스스로 밀이라 생각하며 누군가에게 가라지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진정 밀이 되도록, 누군가에게 밀이 ‘되어 주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라지로 생각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사진 출처: The Wheat and the Tares - Catholic Standard - Multimedia Catholic News (cathstan.org)
첫댓글 제 마음속에 있는 가라지를 밀어내 봅니다.^^
저도 가라지일 수 있다는 말씀에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