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평양행이 알려지자 경교장은 이를 만류하려는 사람들로 인성만성했다. 경교장의 측근들까지도 김구의 신변안전을 걱정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경교장 앞에서는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대동청년단, 전국학련 등 각종 청년단체도 경교장으로 몰려와서 반대시위를 벌였다. 경교장으로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일찍이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김구와 옥살이를 같이 했고 상해임시정부에서도 함께 활동했던 도인권(都寅權) 목사였다. 이 무렵 그는 한독당의 옹진지구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김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없다고 확신하고 경교장에서 침식하면서 김구의 북행 중단을 호소했다. 그는 알 만한 고향사람들까지 동원하여 김구의 북행 중지를 설득하려고 했다. 김구가 북행을 결심하게 된 가장 진실된 동기를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고난의 임시정부 시절에 주석 김구 휘하에서 독립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이청천은 귀국한 뒤에는 대동청년단 단장으로서 이승만과 같은 노선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한 이청천이 대동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하기 위해 경교장에 나타났다. 전국 유림의 좌장이자 성균관대학교 설립자 겸 총장인 김창숙(金昌淑) 등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청천은 김구에게 북행을 극구 말렸다. 그러자 김구는 대답 대신에 한시 한 구절을 읊었다. 今日不可無는 崔遲川和親論이요, 百世不可無는 三學士斥和論이라. (오늘 없어서 안될 것은 최지천의 화친론이요, 백세에 없어서 안될 것은 삼학사의 척화론이라.)
지천(遲川)은 병자호란 때에 척화론 일색인 조정에서 홀로 화친론을 주장하여 위기를 구한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의 호이다. 삼학사란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순절하여 후세에 추앙을 받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을 일컫는다. 이 시구는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선비들이 정치에서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다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최명길과 삼학사의 경우를 빗대어 흔히 사용하던 말이다. 북행을 앞두고 고뇌하던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에게도 이 시구의 깊은 이치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38선 표지판 앞에서 5분간 기자회견
38선 팻말 앞에서 비서 선우진(왼쪽 끝), 아들 김신, 유중열 기자(오른쪽 끝)와 기념촬영을 하는 김구(박병엽 구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2010)에서).
4월 19일 아침 일찍부터 김구는 출발 채비를 서둘렀다. 수행원은 아들 김신과 선우진(鮮于鎭) 비서 두 사람뿐이었다. 경교장 앞마당은 한독당 인사들과 월남한 기독교단체 교인들, 부인단체 여성들, 황해도 고향 사람들, 서북청년단 청년들, 전국학련 학생들 등 400~500명이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김구 일행이 탄 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술렁거리고 있던 젊은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들이닥쳐 죽 드러누웠다. 기어이 가려거든 자기들을 깔아 죽이고 가라는 것이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2층 베란다로 올라간 김구는 군중을 향해 격한 어조로 꾸짖었다. “칠십 평생 잘하나 못하나 독립운동을 해 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는데 왜 길을 막느냐. 내가 가려는 것은 바로 나라와 여러분을 위해 가려는 것이다. 내가 가면 공산당에 붙들려서 오지 못할까 염려해서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살면 얼마나 사느냐. 제발 나의 길을 막지 말라!” 그러나 군중은 막무가내였다. 군중은 자동차 바퀴의 공기를 아예 뽑아버리고는 흩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대치상황은 점심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수리를 맡겼던 김구의 다른 승용차를 경교장 뒷담 너머의 석물공장에 경비경관도 눈치채지 못하게 대기시켰다. 오후 2시나 되어서야 김구 일행은 뒷담을 넘어 경교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김구 일행이 개성을 거쳐 여현(礪現)의 38도선 팻말 앞에 당도하여 길게 숨을 돌린 것은 오후 6시40분. 그제서야 김구 일행은 따라온 기자들의 요청으로 차를 멈추고 38선 표지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선생님, 이번 길이 성공하리라고 보십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소.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 되지 않겠소.” “어떤 복안을 가지고 가십니까?” “복안이야 내가 주장한 남북통일이지.” 회견은 5분 만에 끝났다. 38선 차단기를 넘어 어느 작은 동네로 안내된 김구 일행은 밤 10시가 넘도록 저녁도 먹지 못하고 대기해야 했다. 참다 못한 김구는 책임자인 듯한 청년을 불러 호통을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나타난 영접 책임자는 사무착오였다고 사과했다. 평양에서 보내 온 자동차에 갈아타고 남천(南川)의 어느 여관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쯤이었다. 이튿날 오전 9시에 남천을 출발하여 사리원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쯤에 평양에 도착하여 상수리(上需里) 특별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본점령기에 도의원을 지낸 최아무개의 사저였던 이 호텔은 붉은 벽돌 2층집으로서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4월 19일의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북협상 5원칙’이 수락된 것으로 판단한 김규식은 이튿날 민족자주연맹의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4월 21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 최동오, 신숙, 김성숙, 박건웅, 신기언, 송남헌 등 16명은 아침 6시30분에 삼청장에 집결하여 김규식의 승용차를 선두로 대표단과 환송자의 승용차 등 11대의 승용차가 줄을 이었고, 장택상(張澤相) 수도관구경찰청장이 보낸 4명의 종로경찰서 경찰관이 지프차로 에스코트했다. 일행이 여현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여현역에 대기 중이던 특별열차는 일행의 도착이 늦어져 남천역으로 후퇴시켜 놓고 있었다. 평양에서 보내 오는 교통편을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어느 민가로 안내되었다. 거기에서 사복차림의 보안서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행의 짐을 샅샅이 검색하는 바람에 김규식은 노발대발하여 청년들에게 호통을 쳤다. 9시간이나 지나서야 평양에서 소련제 지프가 도착했다. 그 편으로 남천까지 가서 22일 새벽 1시에 특별열차로 남천을 출발했다. 평양에 도착한 것은 아침 6시쯤. 김규식 일행에게도 김구 일행과 같은 상수리 특별호텔이 배정되었다.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등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정파 대표들은 일찌감치 평양에 도착해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
김구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두봉이 호텔 지배인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중경(重慶)에서 헤어진 지 그러구러 6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김두봉은 김일성이 같이 오지 못한 데 대한 양해를 구하고 자기가 김일성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김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손이 찾아가야지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구는 김신과 선우진을 대동하고 이전의 평양부청 건물인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김일성을 방문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방해하면 미국 간첩이라고 폭로한다”
《레베데프 일기》에는 이때 김구, 김일성, 김두봉 세 사람의 대화 내용과 그것에 대한 레베데프 자신의 의견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오는 길에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등 수인사를 나눈 뒤에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 구 “나는 4김회의의 성공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김일성 “주요한 문제는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김 구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이다.” 김일성 “당수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김 구 “알겠다. (그러나 먼저) 홍명희와 엄항섭을 만나보고 싶다.” 홍명희는 이날 평양에 도착했고, 조소앙, 이극로, 엄항섭 등은 이튿날 도착했다. 김구는 또 자기는 주석단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4김회의를 소집하여 우리가 당면한 긴급한 문제들─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김구는 김규식이 제의한 문제들, 곧 ‘남북협상 5원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김규식이 제안한 전제조건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규식이 한 일이다.” 이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김두봉 “미국인들이 조선에서 물러갈 가능성이 있는가?” 김 구 “그들은 내쫓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조선의 헌법은 단독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김두봉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김 구 “남조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믿게 된다.” 김두봉 “그것은 뱃속에 있는 아이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과 같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4명의 지도자 명의로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항의성명을 채택하자고 제의했다. 레베데프는 이러한 대화내용을 기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4김회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만일 그가 연석회의에 참가하기를 거절한다면 그의 대리인이라도 참가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4김회의를 별도로 소집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레베데프는 김구가 연석회의에 참가하기를 단호히 거부하자 적이 당황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써 놓기도 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갑자기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고 퇴장하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퇴장하라고 하고 예정대로 회의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들을 미국의 간첩으로 폭로한다. … 연석회의는 계획에 따라 예정된 대로 진행한다. 김구쪽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고자 한다면 참석하게 한다. 만일 이들이 소란을 피우면 이 회의의 중요한 목적은 남조선단독선거를 결렬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논박한다. …”
김일성이 예비회의에서 의사일정 ‘4대원칙’ 언급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진행되었다. 19일 오전 11시에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연석회의 예비회의에는 남북한의 대표 31명이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김두봉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4월 14일부터 연석회의를 시작해야 했지만 김구, 김규식의 요청에 따라 회의가 연기되게 되었다. 용맹한 소련군대는 조선해방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제의했다. 미국인들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기다리면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남조선에서) 선거가 실시될 것이므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온갖 난관을 헤치고 회의에 참석한 남조선 대표들을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 서울에서 참석한 인민공화당의 김원봉(金元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조국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된 것은 김일성 장군의 공로가 컸기 때문임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회의에서 우리는 완전한 통일 단결을 이룩해 내어야 한다. 미국인들이 손을 뻗치고 있다.” 이어 김일성이 의사일정과 그 내용에 대하여 발언했다. 그것은 (1)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추방과 유엔결의의 무효화, (2) 단선 단정 반대, (3) 미소양군 즉시 철퇴, (4) 자주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라는 김일성의 이른바 ‘4대원칙’이었다. 서울에서 참석한 근로인민당의 백남운(白南雲)이 이 제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역시 서울에서 참석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의 대표들도 이 제안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회의를 조선의 재건을 위한 회의로 명명하자. 빨리 남조선으로 돌아가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참석자들은 모두 회의일정에 동의했다. 회의는 1시간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연석회의의 첫째날 회의는 4월 19일 오후 6시5분에 모란봉 극장에서 545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회의는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참가자 가운데 최고령인 82세의 전 북로당 중앙위원 김월송(金月松)의 개회선언에 이어 주석단을 선출했다. 주석단에는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崔庸健), 김달현(金達鉉), 남한의 박헌영, 허헌, 백남운, 김원봉, 여운홍(呂運弘) 등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 28명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주석단 선거에 이어 대표자격심사위원회, 회의서기부, 문헌편찬위원회 등의 구성결의와 인선이 있었다. 대표자격심사위원회의 책임자는 연석회의준비위원장 주영하(朱榮夏)가 맡았고, 서기부 책임자는 북로당 대남연락부 부부장 고혁과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허정숙이 맡았다. 문헌편찬위원회에는 주영하, 김책(金策), 박헌영, 허헌 등 각 정당의 간부급 이론가들이 선정되었다. 이어 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북로당의 김두봉, 남로당의 허헌, 북조선민주당의 최용건,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의 김달현, 인민공화당의 김원봉,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의 유영준 등이 축사를 했다. 모두 소련의 역할과 공헌에 대해 언급했다. 축사에 이어 축하편지와 축전이 소개되었다. 첫째날 회의는 이것으로 끝나고, 참가자들은 그 자리에서 북조선교향악단, 합창단, 최승희(崔承姬)무용연구소의 축하공연을 관람했다.
김일성, 이승만 맹비판
남북연석회의의 둘째날 회의는 4월 21일 오전 11시 정각에 개회했다. 4월 20일 하루를 휴회한 것은 김구를 비롯한 한독당 인사들과 민족자주연맹 인사들이 연석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날의 회의는 연석회의의 전 일정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였는데, 사회는 남로당 위원장 허헌이 맡았다. 먼저 북조선 노동자 대표단에 의한 축하식이 있었다. 연석회의 축하 플래카드를 든 노동자 대표들의 입장에 이어 황해제철소〔전 겸이포제철소〕 직장장인 노동자의 축사는 “큰 인상을 남겼다”고 레베데프는 기술했다. 축하식이 끝난 다음 회의에 들어가서, 먼저 대표자격심사위원회의 보고가 있었다. 이날의 보고에서는 남북의 46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545명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4월 20일 이후에 평양에 도착하여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까지 포함하면 56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했다.27) 이 보고에서 화제가 된 것은 제국주의 일본과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른 참가자들이 249명인데, 이들의 수감 기간을 합하면 879년3개월이 된다고 한 대목이었다. 이날 회의의 주의제는 남북한의 정세에 대한 보고였다. 김일성이 먼저 「북조선 정세 보고」를 하고 이어 백남운과 박헌영이 각각 「남조선 정세 보고」를 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김일성의 보고였다. 그는 북한의 정세에 대하여 “북조선에서는 정권이 인민의 수중에 장악되었으며, 인민이 정치 경제 문화생활 각 부문에 완전한 주인으로 되었다. 소련군이 우리에게 지워 준 자유로운 조건을 이용하여 북조선 인민들은 자기의 집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확고히 발전시켰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이승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승만 등 배족적 망국노들이 남조선에서 미군철거를 반대하여 나선 것은 이 매국적 반동분자들의 정체와 진면목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이 망국노들의 죄악은 이승만 도당들이 미 제국주의자에게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는 미 제국주의의 충견이라는 것을 또 한번 보여주었다. …” 그러면서 김일성은 남한 단독선거와 관련하여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매도했다. “우리는 매국노 이승만에 대하여 벌써 말하였다. 이승만은 근 40년 동안이나 미 제국주의자들이 길러 낸 그들의 주구이며 전민족이 타기할 더러운 매국노라는 것을 누구든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자기의 미국 주인들이 그에게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감행하려고 한다. …” 이러한 김일성의 「보고」에 대하여 레베데프는 그의 《일기》에 “정치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보고는 참석자들의 깊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보고는 36차례나 박수가 터져 나와 중단되었다”라고 적어 놓았다. 이승만은 이처럼 소련과 북한공산주의자들로부터 대표적인 타도대상으로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김일성의 보고와 백남운의 보고가 있은 뒤에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반에 속개하여 박헌영의 보고가 있었고, 뒤이어 북조선 농민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축사가 끝난 다음 13명으로 구성되는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초안작성위원회를 선거했다. 위원으로는 주영하, 김책, 박헌영, 허헌, 백남운, 여운홍 등이 선정되었다. 이어서 남북한의 「정치정세 보고」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 형식은 자유토론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토론자가 나와서 미리 작성한 토론문을 10분씩 낭독하는 것이었다. 반대토론은 없었다. 서울에서 참가한 대표들은 이러한 토론형식이 여간 의아스럽지 않았다. 토론은 7시10분까지 계속되었다. 토론이 끝나자 곧바로 인민예술단이 준비한 연극 “이순신 장군”을 관람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한의 회의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이날 김구는 김일성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레베데프 일기》에는 이날 두 사람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적혀 있다. 김일성 “만일 당신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김 구 “나는 정치범 석방, 38도선 철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러 왔다. 내가 어떻게 (북조선이 주장하는) 총선거를 실시하는 데 동의하는 성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 당은 불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우리끼리의 양해와 정성과 단결로…”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김구.
이날 김구는 또 남북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평양기자단을 상대로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포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엄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소미관계의 악화다. 우리 조국은 현하 민주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하는 단계에 처해 있다. …” 이렇게 전제한 다음 김구는 앞으로 있을 4김회의 또는 남북지도자회의에 큰 기대를 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나는 이번에 꿈에도 그리던 이북의 땅을 밟았다. 내 고향의 부모형제자매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광환(狂歡)에 넘칠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들이 민주자주의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을 더욱 기뻐한다. 조국은 분열에, 동포는 멸망에 직면한 이 위기에 있어서 우리의 이 모임은 자못 심장한 의의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임무도 중대한 것이다. 이 모임은 마땅히 전민족의 실패를 실패로 할 것이요 전민족의 승리를 승리로 할 것이다. 이 전제하에서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을 것이다. … 우리끼리의 양해와 정성과 단결은 우리의 통일 독립을 완성할 것이요, 우리의 통일 독립의 완성은 미소간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으며, 미소위기의 완화는 세계평화의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감상적인 수사로 된 김구의 성명은 서울의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김구와 박헌영 처음 만나
남북연석회의 회의록.
셋째날 회의는 4월 22일 오전 10시20분에 개회했다. 이날 회의는 근로인민당의 백남운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 벽두에 민주청년동맹의 청년대표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입장했고, 대표가 축하연설을 했다. 회의는 전날 회의에 이어 남북정세 보고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다. 김구는 전날 도착한 한독당의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과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등과 상의한 결과 같이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인사말이라도 하고 오기로 했다. 김구 일행이 호텔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모란봉 극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를 조금 지나서였다. 회의장에서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구 일행은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2층 휴게실로 안내되었다. 휴게실에서 대기하는 사이에 박헌영이 나타났다. “저 박헌영입니다.” “남한에서 못 보고 여기서 만나네요. 반갑소.” 김구는 박헌영의 인사를 받고 잠시 기다리다가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다. 사회를 보던 백남운은 12시45분쯤에 토론을 중단시키고 “김구 선생 일행이 회의장에 도착했다”고 알리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보냈다. 김구를 비롯한 한독당의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 김붕준, 최동오, 윤기섭, 신숙, 송남헌 등이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백남운이 “집행부의 위임에 따라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네 분을 주석단에 추대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하자 대표자들은 열렬한 박수로 승인했다. 네 사람은 단상의 주석단석에 자리를 잡았다. 네 사람은 차례로 인사 겸 축사를 했다. 김구는 먼저 의장단 대표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나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는 단독선거 단독정부의 분쇄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에 있어서 통일 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 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에 있어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 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 단정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 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 할 것이며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단결적 정신으로서 백사(百事)에 개성포공〔開誠佈公: 흉금을 털어놓음〕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내지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의 노력으로써 국제관계를 호전시킨다면 세계평화에 대한 공헌이 또한 불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통일 독립을 완성하며 세계평화에 큰 공적이 있기 위하여 이 회의의 성공을 절망하며 아울러 여러분의 건투를 축도합니다.”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단선 단정을 반대해야 된다는 말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한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는지 레베데프는 김구의 연설에 대해 “김구는 5분 동안 연설했다. 그는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하여 김구의 연설에 대해서는 박수 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남측에서 참가한 몇 사람만 박수를 쳤다고 한다. 김구는 축사를 마치자 바로 퇴장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오전 회의가 길어져서 오후 2시쯤에 휴회하고 점심을 든 뒤 오후 4시50분에야 회의가 속개되었다. 이극로의 인사말 차례였다. 그는 인사말에서 “남북의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국사를 논의하는 이 같은 자리에 내가 참석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안다. 자주독립을 위해 매진하자”고 역설한 다음 느닷없이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외쳐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극로의 인사말에 이어 만경대 혁명자유가족학원 학생축하단의 인상적인 축하연설이 있었다. 회의는 이어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초안작성위원회 위원으로 홍명희와 엄항섭을 보선하고, 토론을 계속했다. 저녁 7시10분에야 회의가 끝나고 축하공연이 있었는데, 이날의 공연은 세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공연으로 이채를 띠었다.
‘남조선에서 간 가련한 정치건달들', 아침부터 소주 타령
4월 23일의 넷째날 회의는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에 앞서 북한여성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회의는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는 순서로 시작되었다. 홍명희가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고, 회의는 그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 「결정서」는 김일성과 박헌영 및 백남운이 행한 남북한의 정치정세 보고의 주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정서」는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 미국에 의하여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이관되고 유엔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하기까지의 과정을 비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엔소총회의) 이 결정은 우리 조국에서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의 구현이다. 우리 조국의 가장 엄중한 위기가 임박한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시키려는 미국의 반동정치를 지지하여 우리 민족을 반역하며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족적 매국노로 낙인함은 물론, 그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타협하는 분자들도 단호히 논죄(論罪)하며 배격한다. 그들의 배족적 망국노적 책동으로서 남조선 인민들은 초보적인 민주주의적 자유까지도 박탈당하였으며 생활을 향상시킬 하등의 희망과 조건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결정서」는 반대로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미화했다. “우리는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준 결과에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자기가 수립한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하며, 민주개혁을 실시하며, 민족자주경제의 기초를 구축하며, 민족문화를 부활시키며, 우리 조국이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로 발전될 모든 토대를 공고히 함에 거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인정한다.” 「결정서」는 결론적으로 남한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의 음흉한 배족망국적 시도를 반대하며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기만적 단선 희극을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 조선인민들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예속시키는 것을 용허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은 자기의 전 역량을 총집결하여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조선에서 외국 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조선 인민이 자기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러한 「결정서」의 기초과정에는 기초위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없지 않았다. 서울에서 참가한 여운홍 등 일부 기초위원들이 과격한 문구의 수정을 주장하자 박헌영이 그러면 민주주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면서 거수표결에 부쳐 원안대로 가결시켰다고 한다. 회의는 「전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 채택에 이어 3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격문을 채택했다. 격문은 이극로가 낭독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16개 정당 40개 사회단체의 대표들이 서명하는 것으로 넷째날 회의는 끝마쳤다. 남북연석회의의 중요한 일정은 사실상 이날 회의로 끝났다. ‘반팟쇼공동투쟁위원회’의 대표자 자격으로 서울에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고준석(高峻石)은 이때의 경험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연석회의 기간중 남조선에서 간 대의원의 태반은 활기에 차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남조선에서 간 ‘정치건달’들은 가련했다. 그들은 일단 회의에 출석하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각종 분과위원회의 중요 토의에는 박헌영 일파에 의하여 배제되어 참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관방 하나에 두 사람씩 배정되어 아침부터 소주─평양소주는 조선의 명산품이다─와 닭고기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전용버스로 회의장으로 실려가서 찬성 거수를 하고, 밤에는 조선의 무희로 일컬어지는 최승희 무용단의 무용을 관람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문기자 출신의 고준석은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이론가로 활동하다가 반박헌영파가 된 인물이었다.
4김 회담과 남북지도자협의회
4월 24일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남쪽에서 간 대표 200여명은 이날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다. 슈티코프와 레베데프는 남북연석회의의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슈티코프는 4월 24일에 레베데프와의 통화에서 “연석회의에 만족한다”고 말하고, “남조선 대표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라. 원한다면 군대도 보여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반대했던 4김회담도 승낙했다.
슈티코프가 지도자협의회 개회 지시
슈티코프의 이날 지시사항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남북지도자협의회에 관한 것이었다. “소회의(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고 결정서를 채택한다.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외국 군대 철수 뒤에 내전이 있어서는 안된다.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권력을 접수해서 선거를 실시하고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조선민족은 단일민족이다. 조선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만일 이상의 합의사항에 반대하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신망과 주도권을 장악한다. …” 4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평양시 인민위원회광장에서 연석회의경축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그것은 레베데프가 4월 23일 회의를 끝내고 슈티코프에게 건의하여 급작스럽게 준비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회는 34만명 이상의 군중이 동원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최용건이 북조선민족전선 대표 자격으로 식사를 했고, 남쪽 인사로는 박헌영, 홍명희, 이영(李英) 등이 축하연설을 했다. 이어 「연석회의 지지 평양시민대회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참가 군중의 시가행진이 있었다. 시위군중은 “국토를 양단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절대 배격하자”, “모든 승리는 인민의 것이다”, “김일성장군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했던 대표자들은 모두 주석단에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김구와 김규식도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했다. 행사는 시가행진까지 포함하여 3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시민대회가 끝나고 오후 4시에는 평양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김일성이 주최하는 경축연회가 열렸다. 연회는 7시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공연도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인사들의 연설 가운데에서 김규식의 연설이 남한에서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평양방송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의 부정확한 보도 때문이었다. 《레베데프 일기》에는 이때의 김규식의 연설요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항상 조선문제는 조선사람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 나는 제때에 도착할 수 없었다. 연석회의는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집회와 만찬에 참석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것은 일을 끝내기도 전에 선금을 받는 것과 같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 일을 끝내지 않았다. 북조선은 조선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완성했다. … 나는 항상 미국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승만에 대하여. 나를 30년 동안 공산주의자로 만들려 했다. … 나는 한때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곧 당에서 제명되었다. …” 김규식의 말을 받아 김두봉이 말했다. “일을 끝내기도 전에 받은 선금이 아니라 연석회의에서 이미 달성한 성과를 위하여. 우리는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성과를 위하여!”
남조선 선거 반대투위 결성
김일성과 남북협상에 참가한 남로당 위원장 허헌.
남북연석회의는 4월 26일에 속개되었다. 다섯번째 회의이자 마지막 회의인 이날의 회의는 슈티코프의 긴급지시에 따라 남한 단선반대투쟁을 위한 기구를 결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날 회의의 사회는 민주독립당의 홍명희가 맡았다. 이처럼 남북연석회의는 첫날 회의의 사회를 김일성이 본 것 말고는 계속해서 남쪽 인사들에게 맡겨졌다. 남로당 위원장 허헌이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반대투쟁대책」을 보고했다. 회의는 허헌의 보고에 대한 토론을 한 다음 남조선단선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투쟁위원회 위원장은 허헌이 맡고, 부위원장과 위원으로는 백남운, 엄항섭 등 남쪽에서 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지도적 인사 50여명을 선정했다. 회의는 또 미군과 소련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양국 정부에 보내기로 결의하고, 김책(金策)이 메시지를 낭독한 뒤 전달방법을 결정했다. 미국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서울주둔 미군사령관에게, 소련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평양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 각각 전달하기로 하고, 하지 사령관에게 전달하기 위한 전달 대표로는 사회민주당의 여운홍 등 3명을 결정했다. 여운홍 일행은 4월 29일 하오 3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는 주영하가 4월 27일에 소련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달했다. 이로써 4월 19일부터 시작된 남북연석회의의 주요 일정은 모두 끝났다. 폐회에 앞서 김일성, 박헌영, 백남운, 홍명희가 마무리 발언을 했다. 김일성은 김구의 회의참가와 한독당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이어 오후 2시쯤에 애국가 제창과 김두봉의 만세삼창으로 남북연석회의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났다. 남조선단선반대투위는 연석회의가 끝난 며칠 뒤에 별도의 회의를 열고 연락통신부, 투쟁지도부, 교섭부 등의 조직을 설립하고 본부를 해주에 두기로 결정했다.
만경대(萬景臺)에서 김일성의 조부 만나
결혼을 약속했던 안신호와 함께 옛날 자신이 방주로 있던 대보산 영천암을 방문한 김구.
김구와 김규식이 연석회의보다도 더 기대하고 갔던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이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네 사람의 회담, 그리고 소수의 남북한의 정당지도자들이 참석하는 남북지도자협의회가 4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 있었는데,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남북연석회의의 경우 평양방송을 통하여 그때그때 발표되었던 것과는 달리 4김회담이나 지도자협의회는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 보도도 제각각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4월 27일에 있었던 김구의 기자회견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대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치 않는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대표들이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여러 결정서에 대해서는 단선 단정 반대가 그 취지인 만큼 거의 찬동한다. 다만 남북요인회담이 선행되었어야 할 것을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장차 있을 예정인데, 내 본의는 이 회담에 있는 만치 그 결과를 보아서 공적 의사표시를 하겠다. 그 성과에 대해서는 난항을 각오하나 끈기있게 의론하려 한다. 어쨌든 남조선 단정도 반대요 북조선 단정도 반대라는 것은 시종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 둔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이때까지 본격적인 4자회담이나 지도자협의회는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김구는 또 이 기자회견에서 전날 교외 나들이를 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서평양 교외 20리 되는 농촌지대를 돌아보았는데 농가에 전기가 시설되고 지붕도 거의 전부 새로 인 것을 보면 마음이 괴롭거나 민생이 핍박한 환경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만경대 김일성씨 생가를 방문했는데 78세 된다는 김 장군 조부를 만났다. 나를 예전 영천사(靈泉寺)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퍽 반겨하였다. 초가집 그대로 삿자리를 깔고 한 것으로 보아 김 장군 조부님의 살림살이라고 생각 못할 만큼 소박하여 김 장군의 공사별을 짐작하였다.” 김구는 또 이틀 전 평양시민대회 때에 시위 군중들이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했다고 털어놓았다. “군중대회 때에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남조선에서 트루먼 대통령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일이 없는 만치 이상한 감을 가지게 한다.” 김일성의 조부가 말했다는 영천사란 김구가 50년쯤이나 전에 잠시 방주로 머물던 영천암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전날 평양에서 서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대보산(大寶山)으로 감개무량한 나들이를 했었다. 젊어서 혼인할 뻔했던 안창호(安昌浩)의 동생 안신호(安信浩)와 동행했다. 대보산에는 영천암 이외에도 안창호가 옥고를 치른 뒤에 휴양하던 송태산장(松苔山莊)도 있었다.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 살고 있었는데, 북한 당국에서 김구를 위하여 일부러 수배를 한 것 같았다. 안신호는 머리가 희끗희끗하면서도 말끝마다 김일성을 추켜세우는 열성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안신호는 김구가 떠나올 때까지 호텔에서 김구의 수발을 들었다. 영천암에 가던 날 점심 때가 되자 김일성의 비서가 음식을 잔뜩 짊어진 경호원 두 사람과 함께 올라왔다. 통닭과 쇠고기를 비롯한 고기류에 각종 전과 떡 등 점심 치고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알고 보니까 이날의 영천암 방문을 김구가 부모 제사를 모시러 가는 것으로 알고 제수를 마련해 온 것이었다. 음식은 산상 예배를 드리러 온 젊은 남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49) 그런데 사실은 4월 26일은 김구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의 기일이었다. 북한 당국이 김구도 잊고 있는 곽낙원 여사의 기일까지 조사하여 알고 있었다면 그 용의주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김구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김구 일행은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김구가 기자들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것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바로 북로당 중앙본부에 보고되어 논란이 벌어졌다. 대개는 듣고 넘어가려 했으나 허가이를 비롯한 소련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이들은 “김구의 반소분자적 행동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른 간부들은 “김구도 민족자주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지도자인 만큼 그의 태도를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의 태도를 문제 삼으면 연석회의 자체에 차질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하여 무마되었다고 한다.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북한헌법 승인
남북지도자협의회가 인원과 의제 문제로 길항하고 있던 4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북조선인민회의 회의실에서는 인민회의 특별회의가 열렸다. 그동안 준비해 온 북한의 헌법초안을 승인하는 회의였다. 먼저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이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관한 보고」를 하고 이어 강량욱(康良煜) 서기장이 「헌법초안수정안」을 축조 낭독했다. 이 회의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쪽대표들도 초청되어 회의를 참관했다.
회의장에는 남쪽대표들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회의에서는 이들을 환영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김구, 김규식, 원세훈, 조완구 등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레베데프는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을 거부한 이유는 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써 놓았다. 지도자협의회는 일단 남쪽의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 최동오, 이극로, 엄항섭, 박헌영, 허헌, 백남운과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의 15명으로 구성되었으나,53) 레베데프가 4월 28일에 슈티코프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김구는 이 시점에서도 회의참석 인원으로 남한 좌익은 배제하고 우익 10명, 북한쪽 9명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북쪽 실무자인 주영하는 김구가 제출한 새 명단에 대해 “동의할 수 없고, 접수할 수도 없으며, 김일성에게 보고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도자협의회에서 중요하게 논의된 문제는 양군 철수 뒤에 내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과 통일정부 수립방안이었다. 김규식은 남북연합기관을 창설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도자협의회는 협의내용을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 명의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하기로 하고 성명서작성 작업은 남쪽의 대변인 권태양과 북쪽의 주영하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그것이 김구와 김규식 등이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였다. 「공동성명서」를 채택하는 절차는 군사퍼레이드까지 계획하고 있는 메이데이 행사를 감안하여 그 전에 끝내야 했다. 4월 30일 오후 들어 모란봉 극장이 갑자기 어런더런해졌다. 먼저 극장 응접실에서 4김회담이 열린 데 이어 오후 4시 반부터는 극장 별관에서 남북지도자협의회가 열려 「공동성명서」를 확정했다. 마지막 절차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정당 및 사회단체대표들의 회의였다. 정당및 사회단체 회의는 밤 9시에야 열려 만장일치로 「공동성명서」를 채택하고, 참가단체의 대표자들이 단상으로 나와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슈티코프 지시대로 「공동성명」 작성
4개항으로 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현 정세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 (2)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하기 제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당과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유권자수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가 될 뿐이다. …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4월 24일에 슈티코프가 레베데프에게 지시한 내용 그대로였다. 그러나 김구나 김규식이 슈티코프의 그러한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김규식은 오히려 북한쪽이 자신의 ‘남북협상 5원칙’을 받아들였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서울의 신문들도 그렇게 보도했다. 김구도 「공동성명서」에 만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통일이 실현되기 전에야 어찌 만족할 수 있으랴. 다만 우리 과업 추진에 있어 하나씩 난관이 개척되어 나가는 것만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이 「공동성명서」는 5월 1일에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한에도 알려져 선거정국에 또 하나의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북한의 군사력 창설작업에 남달리 관심을 표명해 온 이승만은 5월 3일에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양군 철퇴 문제에 대해서 소련이 진심으로 공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북한의 공산군을 해체시켜 무장을 회수하고 유엔 감시하에 자유분위기에서 총선거를 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정부를 수립해서 국방군을 조직한 후에야 비로소 협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공동성명이라는 것을 나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하지 중장도 이날 남북협상과 관련하여 소련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