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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규 목사
고등학교 때 코카콜라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닥에 흘러내린 콜라를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50개의 콜라 병이 든 상자가 터졌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닦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검은 피부의 한 소년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콜라를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메이카 출신이었습니다. 가정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학교성적도 하위권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했으며 시련 앞에 용감했습니다. 소년은 '정직'과 '성실'과 '투지'를 자산 삼아 미국의 합참의장과 국무장관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걸프전의 검은 영웅'인 콜린 파월입니다. 그는 백인도 아니고 앵글로 색슨족도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대단합니다.
이방인들을 대할 때 때로는 개 취급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에게 아무 소망도 없는 겁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3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갈라놓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달라붙으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이방인으로 그것도 여자의 이름이 당당하게 족보에 나타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라합’이라는 여인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기생으로 지내던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녀가 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수 2: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수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수
2: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수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이라는 여인은 비록 비천한 기생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이루신 역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고백을 합니까?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자기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는 여리고성이 멸망을 당할 때 구원을 받고, 후일에 살몬이라는 예수님의 조상과 결혼을 해서 보아스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을 낳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누구입니까?
후에 룻의 남편이 된 사람이 아닙니까?
여호와께 연합하게 되어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모압 여인 ‘룻’입니다. 룻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제결혼을 한 겁니다. 외국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죽어서 홀로 사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구나!'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러 놓고 고향에 남아 다른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 돌아갔습니다.
룻 1: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때 룻은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시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기 땅에 남아 살지 않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시어미니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베들레헴에 온 것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룻을 축복하시고 보아스와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하는 이방인은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 연합하였다는 표징이 무엇일까요?
1.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여호와께 연합 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상을 섬기며 헛된 신을 좇아 살았지만 이제는 섬기는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독특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컬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기 위해서는 붓을 빨고 목욕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 이름을 읽을 때 우리처럼 ‘여호와’ 또는 ‘야웨’라고 읽었을까요? 그들은 우리들처럼 ‘여호와’라고 읽지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도나이’(Lord) 라고 읽었습니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다윗이 왜 성전을 건축하려고 마음먹었습니까?
왕상 8:18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 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윗은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하여 성전을 지을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면 그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집니다.
과거에 탈옥수로 유명한 ‘신창원’을 기억하십니까?
그 부모가 김제사람이고 그 누나가 옹동에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고향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부모가 고향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모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대하 24:9 “유다와 예루살렘에 반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 하였더니”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던 것을 봅니다.
단 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 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바울 사도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마귀의 종,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이란 자기의 권리는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은 ‘둘로스’라고 하는데 옛날 ‘둘로스’는 하나의 아무런 인격도 없는 가구나 기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종은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의 종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안식일 지키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4절,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6절,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왜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할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무서운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날들에 대한 특별한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중심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사는 날의 계산은 일주일 단위로 계산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대개 한 달을 계산하고 사업의 수지를 맞추고 계산합니다. 학생들은 1년을 계산해서 그 단위를 정합니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서 계산합니다. 계절에 맞추어서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날은 안식일 즉 주일날입니다. 주일날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날 복을 받고 또 주일날 우리는 은혜를 받고 주일날 우리 모든 삶의 축복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주일의 신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천지를 만들었지만 그 천지에 거할 처소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빛을 만들었으나 빛 가운데 살지 않으시고 궁창을 만들었으나 궁창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하나님이 산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온 천지에 꽃동산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꽃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6일 동안 세상을 만들었으나 하나님이 그 6일 동안 세상을 만든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었고 일곱 째날 하나님께서 안식한 그 날은 하나님이 거할 처소의 신비를 친히 우리에게 계시해 준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3절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그래서 모든 날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만들었습니다. 그
런데 일곱 째 날은 하나님께서 ‘이 날을 복 주사’ 이 날을 복 주었다고 했는데 이 날을 거룩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과 함께 거할 신비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계속 하나님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 매일 매일 빛과 궁창과 그리고 육지와 바다와 모든 생물을 다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루하루에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좋았다 하면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된다는 말이 여기 없습니다. 저녁으로부터 아침의 하루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1-2절에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래서 여기 보면 일곱 째날 안식일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그런 날이 아니고 이 날은 무슨 날이냐? 해 아래 있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된다.’는 것은 해가 있기 때문에 지구가 돌면서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는데 이 안식일은 저녁과 아침이 없는 날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무슨 날이냐? 이 날은 ‘하나님의 날’이라는 겁니다. ‘은혜의 날’이라는 겁니다. ‘주 안에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일을 준 것은 창조의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사는 날 전체를 하나님의 날로 함께 살자는 의미에서 처음 안식일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은 곧 뭐냐? 영생이요, 안식은 곧 뭐냐? 천국의 세계요, 안식은 뭐냐?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복을 다 받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신비의 은혜를 받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 안식일이라는 말은 안식을 주신 날, 그런 뜻입니다.
안식을 받는 날, 그래 안식은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내가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그 안식에 인간을 초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은혜요, 축복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죄로 말미암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가져온 비극이 뭐냐?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 하나님의 말씀의 불순종, 많은 말을 했지만 그 죄의 형태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안식의 관계가 깨져 버렸다는 거죠. 안식의 관계가 깨져버렸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요, 불행이요, 이것이 심판이요, 이것이 바로 저주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런 안식을 회복하는 모형으로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을 지키라 이렇게 해서 안식일이 구약에 지키는 날로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은 어느 하루가 아니고 영원히 안식하는 날로 주신 것입니다. 처음 주실 때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 엿새 동안은 계속 하나님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하루하루의 날을 주었는데 일곱 째날 안식일은 하루가 아니에요. 일곱 째날 하루가 아니라 여드레째날도 안식일, 아흐레째날도 안식일 계속해서 창조 이후에는 안식일로 주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어버렸어요. 그 날들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다시 안식을 회복하는 날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출애굽기 20장 8절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이제 너희가 잃어버린 안식의 회복을 그 날 은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일하므로 사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이 천지를 다 만든 것을 기념하는 날이 구약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째날 쉬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 날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신명기 5장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서에 나오는데 이것은 안식일에 한 단계 신비한 비밀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받던 날을 기억하고 이 날을 지키라 너희가 애굽에 있을 때는 안식일이 없었다. 매일 노예로 일만 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안식일이 있다. 이 안식일을 지킬 때 너희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아, 우리가 애굽의 종 되었을 때는 이 날이 없었는데 우리가 해방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이 날이 있다.’ 그래서 해방의 날로, 자유의 날로, 해방 공동체의 날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가 완성된 그 날을 기억하는 엿새후의 날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저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출애굽기 31장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살아버리는데 교인은 거룩하게 하루를 딱 정해서 예배를 드리므로 ‘너희가 거룩해지는 날로 구별되는 날로 이 세상 사람들과 내가 구별된 사람이다.’라고 하는 표징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똑같이 일합니다. 돈 법니다. 집에서 삽니다. 그런데 주일날 딱 믿는 사람들은 성경 찬송을 들고 교회에 나올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너희와 나는 다르다.’ 이것을 구별하는 날로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요일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일요일이라는 말은 해 아래 있는 날로, 우리는 주님의 날로, 또 세상 사람들은 공일이라고 말합니다. 빈 날이에요. 그래서 거의 다 인생이 어디에서 인생이 망치느냐 하면 엿새 동안 일할 때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일곱 째날 다 망해요. 왜? 그 날 쉬면서 다 도박하고, 죄 짓고 탕진해서 다 망합니다. 그래서 전부 빈털터리가 되요. 엿새 동안 일하면서는 다 똑같이 벌어요. 그런데 이 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날로 성일로 지키고 세상 사람들은 공일로 다 헛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잘못하면 안 됩니다. ‘오늘이 공일입니까?’ 망하는 소리에요. 또 ‘오늘 일요일입니까?’ 이것은 안 믿는 사람 소리에요. 반드시 우리는 교인들은 “주일날, 성일 날”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믿습니까? 자기가 언어를 잘 써야 되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 찬송할 수 있어요.
또 기도할 수 있어요. 또 선한 일을 행하고 성경 읽고 다 거룩해지는 연습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거룩은 나를 구별해야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다가 주일날 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할 때 내 인생에 있어서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거룩을 얻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을 우리가 구약에서 안식이라고 말했고 신약에 와서는 주님의 날로 주일로 바꾸어졌는데 구약에서 안식일을 줄 때 세 가지 의미를 주었어요.
첫째는 “너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둘째는 “너희는 애굽에서 노예로부터 해방을 얻었다.”
셋째는 “너희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성민 공동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안식일 거룩하게 지킴으로 축복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또 다른 표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두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맥을 찾아보려면 언약의 줄기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에 대한 그림자요,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희미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언약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십니다. 언약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함을 의미합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믿습니까?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우리가 주님을 떠나 살 수 있습니까?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방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데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 예수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 당도하여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행 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게 되었습니다.
언약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굳은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 연합된 이방인들이 받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1) 명예입니다.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5절)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될만한 명예로운 이름을 준다는 것입니다. 누가 라합과 룻을 멸시 천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2) 영생입니다.
‘영영한 이름’은 영생 얻는 자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비록 고자일지라도 언약을 지키는 자들은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3) 인도함을 받습니다.
어디로 인도함을 받습니까? 성산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뒤에 보면 ‘기도하는 내 집’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기도하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구약시대는 성전이요, 신약시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성전에는 이방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 뜰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산으로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제 성산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교회의 원형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4) 기쁘게 해주십니다.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5) 그들의 헌신을 열납하십니다.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라는 말씀은 본 백성인 유다 백성의 예물을 가증히 여겼다는 표현과 대조가 됩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본 백성 가운데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