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容稷 회원을 애도하고 흠모한다
김용직 회원은 1932년생이니 올해 85세이다. 옛적에는 85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했으나, 지금은 달라 85세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너무 빨라 참으로 애통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뜻밖이라고 여기고 너무나도 아쉽다고 할 때 떠나가는 것이 축복일 수 있다. 애도하면서 흠모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을 가까스로 이 글에 담아 영전에 바친다.
김용직 회원은 얼마 전까지 건강하고 의욕에 넘치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몇 달 모임에 나오지 않아 분과 회원들이 의아해하고, 어쩐 일인지 서로 묻고 아는 사람은 없었다. 3월 10일 총회에 참석한 분과회원들이 안부를 근심하면서 병으로 입원한 것 같은데, 어디 입원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고 갑갑해 했다. 가족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모두 말했다. 학술원에서 입원 부조금을 받아 전할 수도 없었다.
나흘이 지난 14일에 김용직 회원이 서거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러왔다. 빈소에 가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에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걷잡을 수 없이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했다. 위암이라면 지금은 대단한 병이 아니며 일찍 발견하면 완치되는데, 건강을 염려하지 않고 태연하게 살아가면서 天命을 따르겠다는 초탈한 자세가 명을 단축한 것 같다. 병으로 입원했으면 알리는 것이 상례인데, 병이 들고 입원한 사실을 알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을 염려해 아무도 모르게 한 것 같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대인에게 있을 수 없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를 하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옛날 옛적 행실이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은 고고한 선비의 자세를 김용직 회원은 그대로 이은 것을 알아야 의문이 풀린다. 김용직 회원이 나고 자란 곳 가까이라도 가서 기웃거리면, 오늘날 사람과 다른 내력이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김용직 회원은 명문 光山 金氏 후손으로 慶北 安東 禮安 烏川 외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행적구역으로 말하면,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 그 곳이 고향이다. 서울에서 교수 노릇을 하다가 지금 서울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곳은 잠시 타향살이를 하는 임시 거처 寓居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살든 평생 禮安 고을 烏川 사람이다. 예안이 지금은 안동시(조금 전까지에는 안동군)에 포함되었지만, 전에는 禮安縣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예안을 안동이라고 하면 실례이다. 도학을 기준으로 한 지체에서 禮安縣이 安東府보다 높았다. 안동이 양반 고장이라고 한다면 알 것을 덜 알고 하는 말이다.
烏川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고향이 그리워 호를 向川이라고 했다. “向川”이란 “烏川을 向한다”는 뜻이다. “烏川”이란 “외내”의 한자표기이다. “외내”는 “외줄기 냇물”이라는 말이다. 마을에 외줄이 냇물이 흐른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줄기로 이어온 덕행이 빼어나 원근에서 흠선해 마지않는 마을이라 君子里라고도 일컫는다. 一以貫之하는 君子의 德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 자랑스럽다. 밖에 나가 다른 학문을 하더라도 그 가풍을 이으려고 호를 “向川”이라고 했다. “向川”의 “川”은 마을 이름만이 아니고, 군자 덕행의 도도한 흐름이기도 했다.
김용직 회원은 외내 마을을 떠났다. 안동으로 나가 중학을 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하고, 학문하는 길로 나섰다. 마을이 전통을 지키면서 한문학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예를 해서 전시회를 열기고 하고, 한시를 지어 시집도 출간한 것이 한문학과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개화의 첨단을 가는 현대시를 전공으로 택했다. 서양 이론을 섭렵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했다. 현대시를 그 자체로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교문학에도 힘썼다.
대표적인 업적은 <<韓國近代詩史>>(학연사, 1985); <<韓國現代詩史)(한국문연, 1996)이다. 각기 두 권씩 모두 네 권이며, 모두 합치면 2,400면이 넘는 분량이다. 자료를 충실하게 조사하고 정밀하게 고찰해 근대시에서 현대시까지 한국시의 내력을 충실하게 밝혀낸 노작이다. 비평적 언설을 함부로 늘어놓는 풍조를 배격하고, 사실에 입각하고 엄정한 논리를 세워 작가와 작품을 고찰하고 평가했다. 근ㆍ현대시는 외래문학의 수용이라고 여기지 않고 전통의 뿌리를 중요시했다. 표현 못지않게 사상이 소중하다고 하고, 고결한 선비 정신을 이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투지로 삼은 李陸史를 특히 높이 평가했다.
<<林和文學硏究>>(세계사, 1991); <<金起林, 그 生涯와 文學>>(건국대출판부, 1997)에서는 문제의 시인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을 자세하게 했다. <<金台俊 評傳, 지성과 역사적 상황>>(일지사, 2007)에서는 국문학연구의 개척자가 정치에 휘말려 희생된 내력을 관계 자료를 최대한 이용해 치밀하게 추적했다. 이런 작업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다. 좌우의 대립이나 남북의 분단 때문에 문학에도 닥쳐온 비극을 진지한 논의의 과제로 삼았다.
김용직 회원은 2002년에 한국현대문학 분야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인문사회 제2분과 국문학 분야 회원은 그 전까지 모두 고전문학 전공이어서 현대문학 분야 최초의 회원이 되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대문학 교수는 처음에 거의 다 작가이었다가 차츰 비평가로 대치되었다. 작가는 물론 비평가도 문학을 논하는 것을 문필 활동으로 여겨 예술원 회원은 되어도 학술원 회원은 될 수 없었다. 김용직 회원은 현대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을 한다는 의식을 투철하게 가지고 많은 업적을 산출하는 모범을 보인 것을 평가해, 현대문학 분야를 신설하고 학술원 회원으로 맞이한 것이 당연했다.
김용직 회원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학들의 많은 논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김용직론을 길게 쓰는 것보다 고인의 인품에 대해 더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혼자 겪은 경험담을 말해, 김용직 회원이 어떤 분인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고, 후진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김용직 회원과 나는 1995년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의 카이로대학에서 개최된 “아랍세계의 비교문학”이라는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둘 다 논문을 발표했다. 그 모임을 주관한 학회의 회장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비교문학회의 회장인 김용직 회원에게 대접을 잘 받고 돌아가 그 행사에 참가해달라고 초청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김용직 회원을 수행해 함께 가는 영광을 얻었다.
초청이란 초청장을 보낸 것뿐이었다. 여비는 김용직 회원이 한 마디 하니까 내 것까지 대산재단에서 선선히 부담했다. 그 쪽 학회의 회장이 한국에 왔을 때 接賓客의 도리를 다했는데, 우리가 가니 답례가 없었다. 만나서 악수를 할 때 반가워 한 것 뿐이었다. 참가비를 백 불씩 내고, 다른 모든 참가자들과 함께 밥 한 끼를 얻어먹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김용직 회원은 상대방의 무례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상대방의 관습대로 하더라도,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말 없는 실행을 내가 이렇게 해석했다.
카이로의 택시운전수는 요금 흥정을 하고 차를 탔는데, 내릴 때 약속한 요금의 갑절을 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탔으니 계산을 그렇게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때문에 분개했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카이로의 호텔에서 한 방을 썼다. 어느 날 새벽에 건너다보니까 불을 켜지 않은 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어보았더라면 “남의 나라 전기라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이 나오자 빵만 하나 집었다. 식욕이 없거나 속탈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다 먹을 수 없는 음식에는 손대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국내도 아닌 먼 나라에서, 예법이 서로 달라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더욱 조심한다는 도리를 지켰다. 지구 어느 곳에서든지 근본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向川”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용직 회원이 세상을 떠나자 한 시대가 끝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