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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자의 제자들은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항상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마음은 변하고 일시적이며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통찰합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자의 제자들은 어떠한 번뇌도 없이 모든 불결한 번뇌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무상의 지혜로 가득 차 바로 이번 생에서 열반을 실현합니다.
먼저 있던 무상과 따라오는 도 사이에 어떤 불결한 번뇌도 없으면 7일 이내에 궁극의 깨달음인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7일이면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대상과 아는 마음을 밀착시켜서 7일 동안만 계속한다면 바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어떠한 번뇌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마음이 일어날지라도 항상 법이 보여주는 그대로,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로 통찰해서 집중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통찰을 얻은 것은 곧 생멸을 아는 것으로, 이는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실지견입니다.
그냥 대상을 단순하게 보는 것이 여실지견이 아니고, 바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을 보는 것이 여실지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온을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게 되며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곧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상을 알면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란 단순하게 대상을 지켜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볼 때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한 지혜를 얻은 수행자들에게 과연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만일 탐심이 일어났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가 탐심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 탐심은 자라지 못하고, 탐심이 단순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일 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 연기의 과정이 중간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소멸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탐심에 대한 아무런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뒤를 따라 집착이, 그 뒤에 업의 생성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옵니다. 또한 업의 생성이 일어나면 반드시 태어남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남을 얻은 것은 괴로움을 얻는 것이고, 결국 이로써 연기의 바퀴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로써 윤회의 순환은 계속되어 재생의 굴레를 끝없이 돌리도록 만듭니다.
일어남과 사라짐, 즉 무상을 보는 수행을 하는 것은 재생의 굴레를 멈추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바퀴살을 부서뜨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또한 연기의 연결고리들을 잘라 부수는 일입니다. 또한 이처럼 생멸을 보는 수행은 무명을 종식시키고 통찰지혜를 얻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위빠사나의 통찰지혜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꿰뚫는 통찰을 하게 되면 지혜가 나타나고 무명이 사라집니다.
『초전법륜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통찰지가 일어났다. 영지가 일어났다. 광명이 일어났다.”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선언이 있은 뒤에 전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본인이 깨달은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이렇게 선언하고 포교를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괴로움의 진리에 대해서 꿰뚫는 통찰을 얻게 되면 무명은 지혜가 됩니다. 따라서 무명은 사라지고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통찰지가 일어났다, 영지가 일어났다, 광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모두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이 지혜가 될 때 행은 더 이상 식으로 연결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은 이들 수십만 가운데서 고귀한 존재들의 길을 획득한 단 한 사람도 찾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났으면 죽고, 다시 태어남을 되풀이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선한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윤회를 끊는 일이란 더욱 희귀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연기가 연결된다는 것은 이후 존재인 새로운 오온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태어남의 토대가 되는 기능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명이 지혜가 되는 순간부터 멈추게 됩니다. 따라서 연기의 고리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움뿐인 오온을 만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견이 제거되면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심이 제거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의심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다른 번뇌나 잠재적 성향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 자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라고 권유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모르면 결코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변하는 무상을 봐야 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혜를 얻게 되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쉼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오온의 본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때 이러한 지혜를 혐오의 지혜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지혜를 얻은 이후에 꾸준히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알아차리면 결국 그의 수행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끝을 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도의 지혜입니다. 이들 세 단계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그는 큰 수다원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도의 지혜로 인해서 열반에 들어서 과의 지혜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는 혐오의 지혜에 대해서 잠시 살펴봐야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도과에 이르는 지혜의 단계를 빨리어 경전에서는 열 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눌 때는 열여섯 단계의 지혜로 분류합니다. 이때 혐오의 지혜는 8단계에 속합니다.
열여섯 단계 지혜 중에서 5단계 소멸의 지혜가 성숙되면 6단계 두려움의 지혜와 7단계 고난의 지혜와 8단계 혐오의 지혜로 성숙됩니다. 혐오의 지혜는 싫어하게 되는 지혜로 정신적․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고 기댈 것도 없고 진저리가 나는 것일 뿐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행복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열의가 식어지고 알아차림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 어느 세계도 좋게 보이지 않고 혐오감만 갖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의 단계는 위빠사나 수행 과정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 혐오감이 일어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다음 단계의 지혜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성자는 우주의 제왕이나 천계의 전륜성왕보다도 더 높은 지혜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자란 사악도로부터 벗어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수다원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성자란 여섯 가지 극악한 죄를 행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수다원은 나병환자,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혹은 불구자로 태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길어도 일곱 생 안에 아라한이 되어 궁극의 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수행자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이 괴로운 것이라고 알면 그러한 지혜가 바로 지혜의 도에 이르는 것으로, 이것은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빠사나의 도로서 12연기가 중간에서, 끝에서,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갈애와 교만, 사견이 제거됩니다. 따라서 연기는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괴로움과 근심, 고뇌가 일어날 때마다 기회는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12연기가 끝에서 끊어집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시작에서 끊어질 수 있고, 중간에서 끊어질 수 있고, 끝에서 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성제에 의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이며, 이로 인해서 일어난 지혜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길에 대한 진리입니다. 갈애와 교만, 사견이 소멸되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진리가 멈추는 것으로 생과 노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에 해당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무상이라는 것을 알고 무상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해서 무아를 알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업의 생성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게 됩니다. 이 느낌이 소멸하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아서 비로소 그 위대한 해탈의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해탈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알아차림이고, 2차로 알아차림을 하는 그 마음을 보는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아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그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받을 것이 없어서 윤회를 끊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알아차린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알아차림은 사성제를 모두 포함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단 하루라도 수행을 늦춘다면 그는 하루만큼의 기회를 잃는 것으로 언제 어떤 곤란이 일어나서 죽음에 닥칠지 모르는 것입니다. 더욱이 과중한 압박을 받는 시대인 요즘 어떤 위험과 질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다음 생에 사악도로 떨어질 잠재적 위험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도과를 성취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그 오랜 괴로움의 여정을 끝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는 다시 한 번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고 스스로 얻은 행복을 남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과 더불어 남의 행복까지 배려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입니다.
오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고양시키고 그리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단지 탐욕이 있는 마음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성냄이 있을 때는 화를 내고 있는 마음을 지켜보면 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있을 때는 지금 단지 어리석은 마음이 있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바로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늦기 전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무상을 알고, 고를 알고, 무아를 알아서 고통뿐인 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제97회 법문
누구나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며, 모두 선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하며,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선한 것을 아는 것은 생각이고, 선하게 사는 것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위빠사나 수행은 선과 불선을 초월한 해탈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은 변명이며, 아직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을 빌거나 삿된 것에 매달려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습니다. 자신의 통찰지혜를 얻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가장 완전한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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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가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드리는 내용은 네 가지 대상 중의 하나인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사념처四念處수행이라서 네 가지를 고루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스승에 따라서 어느 하나의 염처를 집중적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비로소 수행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뿌리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수행에 대한 기록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논장』에서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따금 마음에 대한 글이 있다고 해도 대체로 관념적인 내용들이 많으며, 모두 마음을 분석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수행방법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큰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스승이 많지 않아서 수행에 대한 기록 역시도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물론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수행을 하거나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입문서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도제식으로 할 때는 입문서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야 수행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추론적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달리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 하나면 됩니다. 하지만 초보자에게는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수행자들의 마음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인데, 이 말은 매우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고정관념 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며, 바라는 것 없이, 없애려는 마음 없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상은 반드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무상을 아는 것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도 없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스승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뒤에 열반하신 미얀마의 모곡 사야도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고, 또 훌륭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레이디 사야도의 뒤를 이어 연기법을 펴시면서,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모곡 사야도의 제자들에 의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다른 또 한 분의 스승이 계신데,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신 쉐우민의 우 꼬살라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셨습니다. 우 꼬살라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이 없이 단지 가르침만 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사안은 아닙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논장』의 대가이시고, 특히 12연기에 대한 탁월한 법문으로 미얀마에서 훌륭한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교학자이시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신 보기 드믄 스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교학을 하면서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데 사야도께서는 교학과 수행을 모두 하셨기 때문에 뛰어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모곡 사야도께서 12연기와 함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연기와 마음이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12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신견이 없어야 합니다. 유신견이란 내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기 때문에 무아라는 사실을 알아야 연기의 고리가 끊어지고 해탈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무아를 아는 것이고, 무아를 알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유신견이 제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1996년에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한 뒤에 그로부터 4년을 기다리다가 2000년에 쉐우민 명상원에 가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뒤에 비로소 수행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데 매우 신속하고 뛰어난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심념처 수행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단지 가르침만으로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게 수행을 했고, 제 자신이 겪은 오류도 많았습니다. 마음이란 스승으로부터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틈틈이 제 자신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2003년, 모곡 사야도의 제자이신 미얀마의 쉐민모 선원의 우 소바노 사야도에게서 12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12연기만 배운 것이 아니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도 함께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그간 제가 해오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인 기록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모곡 사야도의 기록을 처음 접하고 보니 그간 제가 쉐우민 우 꼬살라 사야도와 우 떼자니야 사야도로부터 배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바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곡 사야도의 자세한 수행방법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더 확신을 가지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알면서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미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가 하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확립할 수 있게 되니,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모곡 사야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수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도 얻었지만,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습니다.
현재 모곡 사야도의 가르침은 쉐민모의 우 소바노 사야도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쉐우민 사야도의 가르침은 제자이신 우 떼자니야 사야도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미 두 분의 큰 스승께서 모두 열반하셨지만 제자들에 의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계승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한정된 수행자에 의해서 계승된다는 것은 교학보다는 수행이 어렵고, 다른 수행보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미얀마의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이 수행법을 이제 한국에서 다 가져가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미얀마 제자들에게 독려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곤 했습니다. 모곡 사야도의 수행방법과 쉐우민 사야도의 수행방법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방법과 접근방법이 다를 뿐이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방법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방법이나 모곡 사야도의 방법이나 쉐우민 사야도의 방법이나, 지금 여기서 제가 밝히는 한국 명상원의 수행방법도 큰 틀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같고, 단지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쉐우민에서 몇 년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우면서 틈틈이 이론을 정리하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듣고, 기록하고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또 하나하나 질문을 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정리한 내용으로 지금 한국 명상원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계보를 밝힙니다. 정신세계에서는 스승을 밝히지 않으면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만든 수행은 그만큼 위험과 독소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수행, 수행에 대한 기록이 있는 수행, 그리고 직접 배우는 스승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종교가 진리인지 비밀이고, 수행자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도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세무민하는 종교와 지도자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기 마련입니다. 역사가 있는 종교라고 해서 모두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스승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 스승이 말씀하신 기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짧은 이 인생을 살면서 바른 스승과 바른 수행법을 만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인연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시대나 스승의 가르침 없이 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승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하는 수행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독선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말하거나 더구나 장애가 생겼을 때 알맞게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책은 관념이라서 통찰지혜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마음에 대한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정신세계에서는 모르면서도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큰 허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잘못된 질문에는 침묵으로 답변하시곤 했습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바르게 말을 해주어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밝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쉐우민 방식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 명상원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저의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제가 밝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모두 쉐우민에서 배운 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데 유익한 길잡이가 되도록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나 모곡 사야도께서나 쉐우민 사야도께서 모두 열반하셨지만 그분들의 훌륭한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 남아서 우리들의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접하기 어려운 마음에 대한 것을 받아들여 수행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