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창 (李梅窓) ... 조선의 3대 명기
이매창(李梅窓 ... 1513~1550)의 본명은 향금(香今)이며,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계생(桂生), 계낭(桂娘)이다. 그녀는 1513년 (선조 6) 이 곳 扶安에서 이양종(李陽從)의 庶女로 태어나 1550년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매창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詩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라든가,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같은 詩人들이 그녀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그녀는 신분은 기생이었지만 오직 나이 20살에 만난 유희경(劉希慶)이라는 사람만 사랑하고 정절을 지킨 여인으로 이 곳 부안에서 400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이매창은 시조와 漢詩를 비롯하여 가무와 彈琴(거문고나 가야금을 연주)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부안의 명기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名妓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은 평생 수백편의 詩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衙前들이 외어 전하던 시조와 한시 58편을 얻어 근처의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梅窓集)을 엮어냈다. 그 중에서 그이 대표적인 詩는 "이화우(梨花雨)"로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매창은 妓生이었으나 고고하였다. 벼슬이 높다고 해도 , 돈이 많다고 해도, 명성이 높다고 해도 그에 유혹될 매창이 아니었다. 어느 나그네가 梅窓의 소문을 듣고, 詩로써 매창을 유혹하자 매창은 다음과 같은 詩를 지어 그를 물리쳤다.
차과객운 次 過 客 韻
평생치학식동가 平生恥學食東家 떠돌며 밥 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독애한매영월사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시인불식유한의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지점행인왕자다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유희경 (劉希慶)과의 짧은 사랑 ... 그리움은 恨이 되어 1.
유희경은 선조,광해군시절의 賤民 출신 詩人으로,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國喪)절차도 그에게 문의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여 그의 詩 하나하나가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號는 촌은(村隱)이다.그는 비록 賤民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義兵활동으로 후에 免賤되었다.
부안에 있던 매창도 유희경의 詩에 매료되어, 한번 만나서 그와 詩를 겨루어 보고 싶었었지만, 매창은 한동안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살려고 한적한 곳에 초막을 짓고 날마다 거문고와 詩作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閑 居
석전모옥엄시비 石田茅屋掩柴扉 두메 오막살이 사립문 닫았는데 화락화개변사시 花落花開辨四時 피었던 꽃이 지면서 계절을 알려주네 협리무인청진영 峽裡無人晴盡永 사람없는 시골집 하루 해가 무지 길어 운산형수원범귀 雲山炯水遠帆歸 구름 밖 돌아오는 먼 돛대가 반갑구나
秋 思
우후량풍옥단추 雨後凉風玉簞秋 비온 후 산들바람 가을이 다가오네 일수명월부루두 一輸明月浮樓頭 둥근 달 드높이 다락 위에 걸렸는데 동방종야한공향 洞房終夜寒蚣響 밤 새워 우는 님 그리는 벌레 울음소리 도진중상만두수 悼盡中상萬逗愁 애꿎은 내 간장 녹아서 쌓이누나
외로움을 달래며 지은 詩.. 이렇게 거문고와 詩作으로 소일하고 있을 때 이웃 김제부사(金提府使) 이귀(李貴)에게서 전갈이 온다. 서울에서 촌은 유희경(村隱 柳希慶)이 부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만나보고 싶었던 유희경..매창은 기생을 청산하고자 했으나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매창은 이귀에게 곧 가?다는 답장을 보내고, 안절부절하는 그의 마음을 詩로 읊었다.
함정환불어 含情還不語 가슴에 품은 정은 말도 하지 못하더니 여몽복여치 如夢復如痴 꿈같고, 생시같고 어리석은 이 내 마음 녹기강남곡 錄埼江南曲 애타는 이 마음을 강남곡에 실어보나 무인문소사 無人問所思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유희경(劉希慶)과의 짧은 사랑 .. 그리움은 한이 되어 2.
유희경이 부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의 일이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유희경은 매창에게 거문고를 재촉한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거문고를 끌어 당겨 장진주(奬進酒)를 노래하고, 지그시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유희경은 지필묵을 끌어당겨 詩를 짓는다.
증문남국계낭명 曾聞南國桂娘名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 이름 들어 시운가사동락성 詩韻歌詞動落城 시운과 노래로써 서울까지 들리누나 금일상간진면목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은 너의 진면목을 가까이 대해보니 각의신녀하삼청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가 생각 든다.
이에 매창은 다음과 같이 답시(答詩)한다. 매창의 나이 19살, 유희경은 40대 중반의 나이이었다.
아유고주쟁 我有古奏箏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서 일탄백감생 一彈百感生 한 번 타면 온갖 정감이 다투어 생긴다오 세무지차곡 世無知此曲 세상 사람 이 노래를 아는 이 없으나 음화구산생 音和謳山笙 님의 피리소리에 나는 맞춰 본다오
그날 밤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이 깊어 원앙침에 들었다. 열아홉 터질 듯한 매창의 몸이 중년의 유희경 품 속에서 더욱 무르익어 갔다. 50평생의 지조가 매창으로 인하여 무너져 가는 유희경이었다. 그러나 2년 쯤 후, 회자정리(會者定離) .. 두 사람에게도 헤어져야 할 사건이 벌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 것이다. 비록 천민 출신이었지만, 유희경은 분연히 義兵活動을 하기로 결심하고 매창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 매창의 나이 21살... 유희경을 만나지 2년이 되었었다.
울며 잡은 소맷자락을 무정히 떨치고 가지마오 그대는 대장부라 올라가면 또 사랑이 있겠지오마는, 소첩은 아녀자라 당신 그리는 마음뿐이라오
유희경(劉希慶)과의 짧은 만남 ... 그리움은 恨이 되어 3.
매창을 떠난 유희경으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매창은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붓을 들면 그리움이 시가 되어 나왔고, 거문고를 들면 단장의 슬픔으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이회소소엄중문 離懷消消掩中門 이별이 하 서러워 문 닫고 누었어도 나신무향적누흔 羅神無香適淚痕 홀로 누운 잠자리는 한없이 외로운데 일정징우쇄황혼 一庭徵雨鎖黃昏 하염없는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오 독처심규인적적 獨處深閨人寂寂 소리없는 보슬비에 님 없는 밤 또 저무네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情)은 한(恨)이 되어 매창의 詩心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흔히 이화우(梨花雨)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詩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이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梨花雨)라고 표현하였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유희경이 떠난 지 계절이 두번 바뀐 어느 날 인편으로 서찰이 왔다. 반가움, 설레임..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쏟아져 치마폭을 적신다, 그러나 편지의 사연은 간략하였다. 義兵을 모아 왜구와 싸우기 여념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한 편의 詩가 동봉되었다.
낭가재낭주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상사불상견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장단오동우 腸斷梧棟雨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매창의 이화우(梨花雨)에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사이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도 지나갈 참이었다. 이 시를 다 읽고 매창은 다시 단장시(斷腸詩)를 남긴다.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라 할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었다.
상사도재불언리 相思都在不言裡 말은못하였어도 너무나그리워 일야심회빈반사 一夜心懷檳半絲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욕지시첩상사고 欲知是妾相思苦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수시금환감구위 須試金環減舊圍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보시구려
1550년 매창(매창)은 다음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은 恨이 되어 죽었다. 그녀의 나이 37살이었다.
진세시비다고해 塵世是非多苦海 풍진 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아 심규영야고여년 深閨永夜苦如年 깊은 규방 긴 밤이 천년만 같구려 남교욕모중회수 藍橋欲暮重回首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청첩운산격안전 靑疊雲山隔眼前 구름 속 첩첩 청산 눈 앞을 가리네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희경은 이 絶命詩를 쓰면서 죽어가는 매창을 생각하였다. 한 여인의 절실한 사랑을 받아주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토록이나 뜨거웠던,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기로웠던 매창.. 그는 붓을 들어 자탄과 후회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썼다.
명모호치취미낭 明眸皓齒翠眉娘 맑은 눈, 하얀 이, 푸른눈썹 계낭아 홀축부운입묘망 忽逐浮雲入杳茫 홀연히 뜬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종시방혼귀패색 縱是芳魂歸浿色 꽃다운 넋은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수장옥골장가향 誰將玉骨葬家鄕 그 누구가 너의 옥골을 고향에 묻어주랴.
매창의 두번째 연인 .. 김제군수 이귀(李貴)
매창과 허균(許筠) ... 기나긴 아름다운 우정. 1
홍길동전의 허균(許筠)은 1601년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李貴)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지 서너달 뒤이었다.
허균은 그의 글, 조관기행(漕官紀行)에서 매창과의 만남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은 1601년 7월23일.. 허균의 나이 32세, 매창의 나이 28세에 그들의 첫만남이 이루어진다. 다음은 조관기행의 기록이다.
" 23일 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 (李玉汝 ..玉汝는 李貴의 字이다)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詩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고 함께 이야기할 만하며,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詩를 읊으며 놀았다. 23일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이니 아마 이귀(李貴)에게서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
허균은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인물이다. 허균을 일찌기 " 男女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聖人이다. 나는 本能을 ?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으리라 "라고 말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과 특징을 버젓이 적어 놓거나, 문란한 성생활로 여러 차례 파직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이 기록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아마 李貴에게서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라는 글귀이다. 매창의 피함인지..아니면 허균의 피함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날 밤 허균과 매창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귀는 허균의 친구이기도 하였지만, 이귀는 조선 최고의 싸움꾼이다. 탄핵상소를 가장 많이 올렸으며, 드디어는 仁祖反正을 주도하였던 인물..허균도 그와의 是非를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매창과 이귀의 관계에 대하여는 애매하다. 매창의 수많은 詩에 李貴에 관한 詩는 한편도 없고, 다만 허균의 글에 .. 매창은 이귀의 정인이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매창과 허균이 교류하였던 선계폭포 .. 위에 있던 정사암(靜思庵)은 없어졌다.
한편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 1608년(광해군 1) 가을이다.그 동안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허균은 매창을 항상 그리워 한 것은 그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1608년 8월 허균은 공주군수를 하다가 파직당한다. 충청도 암행어사가 고을 수령들의 비리를 조사하였는데, 허균이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는 장계가 올라 온 것이다. 이후 허균은 부안 우반동 선계폭포 위의 정사암(靜思庵)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국조시산(國調詩珊)을 비롯한 많은 글을 썼다. 이 시기에 35살의 매창과 39세의 허균은 자주 만난 것으로 보인다, 1609년 1월의 편지이다.
매창과 허균(許筠) .. 기나긴 아름다운 우정 . 2
그 해 12월, 허균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형 허성(許晟)의 추천으로 승운원 판교가 된다. 이 시기에 허균은 친구 李元亨으로부터 매창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 매창이 허균을 못잊어 밤마다 거문고를 타며 그리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이원형의 오해로 비롯된 것이지만, 허균은 이 소문으로 놀림감이 되거나 세차례의 탄핵을 받게 된다.
허균이 지은 성수시화(惺嫂詩話)에 이에 대한 글이 있다.
부안의 창기 계생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太守)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에 그 태수가 떠난 뒤에 邑民들이 그를 사모하여 碑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친구가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詩를 짓기를.....
일곡요금원자고 一曲瑤琴怨雌藁 한가락 거문고는 자고새를 원망하나 황비무어월륜고 荒碑無語月輪孤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현산당일정남석 峴山當日征南石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역유가인타루무 亦有佳人墮淚無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하였다. 이원형은 우리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는데, 시를 할 줄 알았고, 석주(石洲 ..권필의호)가 그를 좋아했고 칭찬했다.
사실 당시 매창의 情人은 허균이 아니었다. 위의 詩에서 나오는 太守는 다른 사람, 윤부사이었다. 이 일로 탄핵도 당하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허균은 1609년 1월에 매창에게 편지를 쓴다.
계량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바로 운공의 비석 앞에서 부르시어 남의 허물을 잡히었소? 석자 이름 옆에 詩를 더럽혔다니.. 이는 계량의 잘못인데, 비방은 내게 돌아오니 정말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시는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편지는 일종의 항의편지인데, 끝에는 戀書같다. 그해 허균은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하여 광해군의 신임을 얻게 되며 당상관이 된다. 그해 9월 허균은 부안의 매창에게 다시 편지를 보낸다.
봉래산의 가을이 한창 무르 익으니, 돌아가 고픈 생각이 간절하오 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니 계량은 반드시 웃을것이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간이나 지속되었겠소?
아마 허균은 부안에 내려아서 살겠다고 약속한 것 같다. 그리고 불가의 선에 대하여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이 편지르 보낸 다음 해 여름, 1610년에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허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詩를 짓는다.
매창의 묘 옆에 여류 명창 이중선(李中仙)의 묘가 있다, 그녀는 한국 최고의 여류 명창이었던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3)의 동생으로 역시 판소리 명창이었다. 이화중선은 1943년 재일교포 위문차 일본에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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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