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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야유회 「속리산 세조길」, 조선 세조가 요양차 다녀간 산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먼저 2016년 9월에 처음 개통한 ‘속리산 세조길’은 조선 세조가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속리산을 찾아와 직접 걸어 다녔다는 길로 법주사(法住寺) 일주문부터 세심정까지, 약2.4㎞의 숲길을 말한다. 조선 세조는 속리산 지역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행차가 총 3번이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 법주사는 ‘충청도 제일의 큰 사찰’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자, 조계종 속리산 대법주사(俗離山 大法住寺)이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사찰은 국립공원 속리산 최고봉에서 서쪽으로 약 3.3Km에 위치하며 주소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번지 일대이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義信) 조사가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法)을 싣고 돌아와서 머물렀기(住) 때문에 ‘부처님의 법이 머무는 절(寺)’이라는 뜻에서 법주사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덧붙여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난 산[피안(彼岸)의 세계]’라는 뜻이다. 마치 하늘나라처럼 신비스러운 유토피아, 곧 극락의 세계가 속리산이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의 옛 이름은 구름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는 뜻의 운장대(雲藏臺)였으나 조선 세조가 문신들과 시문을 읊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 헌강왕 때, 속리산 묘덕암을 찾은 고운 최치원이 말하길,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건만(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山非離俗) 속세가 산을 떠난 것이다(俗離山)”라고 읊었다.[법주사 글은 이미 1년 전에 따로 올린 적이 있어 이만 생략한다]
◉ [대학동기 2025년 야유회] 대학동기 야유회를 6월 28(토)부터 29일까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탐방을 계획하고 속리산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만나 “세조길(3.8Km)‘ 도보 트레킹에 나섰다. 괜히 아침부터, 학창시절 소풍 가던 때의 설렘에 약간 들뜬 기분을 안고 대구집에서 약 2시간을 차로 달린 후에, 속리산 호텔(보은군 속리산면 사내7길 10)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바쁜 다른 일정 때문에 호텔까지 왔다가 돌아간 친구 부부에게도 그 열정에 감사를 보낸다.
그런데 ’세조길‘과 ’법주사‘ 탐방을 제외하곤 식사와 숙박을 모두 여기 호텔에서 해결했다. 여기 속리산 호텔이 인기가 좋은지 여행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음식도 깔끔하고 객실도 깨끗하고 요금도 저렴해(모텔요금)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오랜만에 참석한 친구가 2명이 있어 그간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친구 부인 4분 참석] 또한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룬 친구 부부와 또 다른 친구 2명이 밥값, 술값 등을 지원해 줘, 모처럼 풍성한 야유회가 되었다. 또 언제나 그렇듯, 총동창회와 동기회를 위해 늘 애쓰고 노력하는 회장과 총무, 그리고 총동창회장에게 다시 한번 더 경의를 표한다. 그대들이 있기에 우리의 지난 시절의 추억과 우정을 회상하고 다질 수 있는 것 같다.
**세조길 탐방을 시작했다. 평탄한 길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세심정(洗心亭)까지 가서 거기서 감자전과 막걸리를 한 잔 하고 돌아오다가,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 사찰 곳곳을 탐방했다. 높이 33m의 금강미륵대불과 그 앞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국보) 팔상전(捌相殿)이 눈에 띄였다.(법주사와 세조길 탐방 시간 총 3시간) 그리고 오후 6시부터 저녁밥을 호텔식당에서 삼겹살과 맥주 소주를 더불어 먹고 난 후, 치킨집에서 튀김과 생맥주를 들이키고 다시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외치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11시였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각자 집으로 향해 돌아갔다.
이번 ‘법주사 세조길’ 탐방은 아주 편안하면서도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녀온 것 같다. 잠깐이나마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밋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밀려와 더할 수 없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다. 땡큐~~~^^
◉ ‘속리산(법주사) 세조길’은 조선의 7대왕 세조가 1464년(세조10년) 2월28일(음) 등, 요양차 3차례 다녀간 산길을 ‘세조길’로 명명하여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전에 고려시대 공민왕이 먼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천암 극락보전에 공민왕이 직접 쓴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조선 세조가 당시 한양에서 내려와 복천암에서 거주하고 있던 신미(信眉) 대사를 만나려고 왔다가 나라의 번창을 빌고자 여기 복천암에서 대법회를 열었다. 그리고 복천사에 쌀300석과 노비30구 전지(田地) 200결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세조길’은 1970년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법주사 일주문부터 세심정까지 2.4km를 조성한 구간이다. 여기서 0.6km 위쪽 세조가 머물렀다는 복천암(福泉庵)까지 모두 합쳐 총 3km의 구간을 유람객들이 많이 다녀오기도 한다.
‘세조길’은 법주사 주차장에서 조각공원을 지나 속리산 세조길 자연관찰로가 보이는 곳에서 시작된다. 법주사를 지나 태평쉼터에서 세심정 방면으로 향하면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목욕소가 나오고 그 아래 다리를 건너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세심정이 있다. 세심정은 세속을 떠난 산에서 마음을 씻는 정자터라 한다.
덧붙여 조선 세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불교를 숭상했던 왕이었다. "공자보다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 [참고, 각종 알림 푯말석] 여기 속리산 법주사 일대는 조선 ‘순조의 태실’이 있는 곳이라, 세조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법주사 입구에 여러 비석이 서 있다. 한 비석의 전면에는 '봉교(奉敎)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 함풍원년삼월일입(咸豊元年三月日立) 비변사(備邊司)'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봉교(奉敎)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든다’는 의미이고,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한 것 역시 법주사가 태실의 수호사찰이기 때문이다. 실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경우 승첩을 내려주거나 잡역(雜役)을 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봉교비를 세웠다는 건 법주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근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뒷면에는 화소(火巢)가 새겨져 있다.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下馬碑)’는 의미로, 보통은 궁궐, 향교, 서원 등 유교적 건축물에 세워졌다.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사례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경우다. 가령 남양주 봉선사의 경우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능)의 원찰로, 영천 은행사와 보은 법주사의 경우 각각 인종과 순조의 태실이 있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다. 또한 화소(火巢)는 능이나 태실을 조성할 때 불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따라서 화소 구간 내에는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했다. 이처럼 하마비와 화소의 존재는 순조의 태실과 연결이 된다.
또한 세조길 마지막 즈음의 세심정(洗心亭) 분기점에 못 미쳐, 순조 태실과 관련이 있는 금표가 남아 있다. 해당 금표의 전면에 '금표(禁標)'가 새겨져 있는데, 일정한 구역 안으로 드나들지 말 것을 알리는 푯말이다. 그 후면에는 '서(西)'가 새겨져 있다. 태실의 서쪽에 세운 금표라는 뜻이다. 금표는 태실이 조성되면 신분에 따라 거리를 측량해 사방의 경계에 금표를 세웠는데, 해당 금표는 이와 관련이 있는 흔적이다.
○ [승려 신미(信眉)] 충북 영동군 출신 신미(信眉)는 세종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승려이다. 신미(信眉)는 조선초기 불경 번역에 힘썼던 뛰어난 식자였다. 그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집현전 학자이자, 편찬 및 번역사업에 공헌한 인물로,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승려 신미(信眉)는 법주사(法住寺)에서 출가하여 주석하면서 세종과 세조의 불사를 도왔다. 세조 13년(1467)에 『목우자수심결』을 언해하였다. 법주사 부속암자 복천암(福泉庵) 건물 안에는 신미의 영정이 있고 복천암 주위에는 신미대사부토탑이 있다.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 [세조 법주사 복천암 요양] 당시 악몽과 피부병(동창, 종기)으로 고통받던 세조는 유명 사찰에 100일 기도를 자주 다녔다. 처음 그의 몸에 생겼던 가벼운 동창은 급기야 문둥병(한센병)으로 번졌다. 세조는 자신이 저지른 왕위 찬탈의 업보를 피하기 위해 조선이 억불숭유의 유교 국가임에도, 부처를 모시고 불심에 의지했다. 당시 궁궐의 국사(國師) 역할을 했던 승려 신미(信眉)가 자신이 출가했던 법주사 인근 산내 암자 복천암(福泉庵)으로 1464년 세조를 순행(巡幸)하게 하여 피부병의 치료와 더불어, 극락보전에서 삼보에 공양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미 대사가 머물던 복천사는 왕실의 원당이 되었고 문종과 안평대군의 보시가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현대에 이르러 1464년(세조10년), 세조가 다녀간 요양길을 ‘세조길’로 명명하여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왕의 병이 치유되자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보은(報恩)이라는 지명을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법주사 감흥기]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속세를 떠나(俗離) 찾아온 선경(仙境)에는 물아(物我)가 모두 하나인 듯, 고즈넉한 선방(禪房)의 담벽엔 겹벚꽃의 낙화가 절정이고 수조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거문고 화음이네. 상쾌한 바람과 맑은 풍경 소리, 불전에 이는 향연(香煙)과 달빛에 드리운 석등의 그림자에 취한 나그네, 법주사의 스님은 좌선 삼매경에 빠졌는지, 흥이 일어 취한 길손 오는 줄도 모른다. 팔상전 안에는 하늘의 선인(仙人)들이 꽃과 향수를 뿌렸는지, 울긋불긋 채색과 향기로운 향연(香煙)이 가득하다. 속세를 떠난 이곳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수많은 봉우리가 구름과 안개 속에 출몰하니 저절로 온 천지가 자재(自在)함을 알겠네.”
● 다음 ‘刪’ 운목(韻目)의 칠언절구 「복천암(福泉菴)」은 조선후기 화가이자 평론가였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의 문집 『두타초(頭陀草) 책2(冊二)』에 수록되어 있으며 평기식이다.
그는 지금의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재대(載大)이며, 호는 담헌(澹軒)·소금산초(小金山樵)·무우자(無憂子)·금산병부(金山病夫)·담옹(澹翁)·담헌거사(澹軒居士)·담암(澹庵)으로 21세 때인 1697년(숙종 23)에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1708년(숙종 34)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생원과에도 합격하여 세마부수(洗馬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계속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1722년(경종 2)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진천군 초평면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담헌 이하곤(1677~1724)은 진천 초평리의 자신의 집에 장서각을 따로 만들어 완위각지[宛委閣址,(만권루萬卷樓)]라 칭하고 친한 벗들과 교유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이하곤은 계미년(1703년) 봄에 10년 만에 다시 법주사를 찾았다가, 이어 복천암(福泉菴)에 들리었다. 속세를 떠난 이들이 찾는다는 속리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암자에 올랐다. 암자의 스님이 옛날 고려 공민왕과 조선 세조가 다녀간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기에 이를 전해 듣고 이 글을 썼다.
*「복천암(福泉菴)」* / 이하곤(李夏坤 1677~1724)
俗離高出白雲間 속리산은 흰 구름 사이에 한결 높이 솟았는데
聞道乘輿數往還 듣자니 임금의 수레가 자주 오갔다고 하네.
深怪居僧饒說話 스님께서 늘어놓는 설화가 심히 괴이하겠지만
君王只自愛名山 다만 임금이 스스로 명산을 사랑했을 뿐이라네.
● 다음 ‘先’ 운목(韻目)의 오언율시 「복천암(福泉菴)」은 조선후기 공조참판, 지중추부사,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 1680~1761)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의 저서 『포암집(圃巖集) 권2(卷之一)』에 수록되어 있으며 측기식이다.
한성에서 거주했던 저자가 어느 시기에 복천암을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일 먼저 법주사를 둘러보며 한때 재앙을 맞아 폐허가 된 적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맑은 샘물 맛이 좋은 복지(福地)에 솔바람을 맞으며 임금의 수레가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는 화재 속에서도 옷이 불에 타지 않은 신묘한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스님이 좌선할 때 방석은 검푸른 빛이 최고며, 한낮의 베갯머리는 금방 낮잠에 빠져들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복천암(福泉菴)」* / 윤봉조(尹鳳朝 1680~1761)
捨馬溪聲外 말을 두고 개울 물소리 너머로 가보니
看山佛座前 산을 보고 앉은 부처의 모습이 앞에 있네.
浮圖問灰刦 부도(浮圖)가 겁탈로 잿더미가 되었다고 알리며
福地味淸泉 복지(福地)에 맑은 샘물 맛이 좋다 하네.
蹕路松風在 필로(蹕路)에 솔바람이 불어오는데
箱衣火浣傳 상자 속의 옷은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蒲團愛靘好 승려의 방석은 아름다운 검푸른 빛이 최고며
午枕乍投眠 한낮 베개머리는 금세 낮잠에 빠지게 한다.
[주1] 부도(浮圖) : 부도(浮屠).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다른 이름. 부처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 절에서 살면서 불도(佛道)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 본래는 그런 단체를 이르던 말이다.
[주2] 복지(福地) : 신선(神仙)들이 사는 곳. 행복을 누리며 잘 살 수 있는 땅. 풍수지리에서, 집터의 운(運)이 좋아 운수가 트일 땅.
[주3] 필로(蹕路) : 거동(擧動) 할 때에 통행을 금지시키고 왕가(王駕)가 지나가던 길. 거동길
[주4] 포단(蒲團) : 이불. 부들로 둥글게 틀어 만들어서 깔고 앉는 방석(方席). 승려가 좌선(坐禪)할 때에 쓰기도 함.

첫댓글 이렇게 다시 한번 보는 제 고향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