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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서(鄭敍)의 정과정곡(鄭瓜亭曲)> 2012년 作.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개요 : 고려시대 정서(鄭敍)는 1157년 의종 11년 2월12일에 거제도 사등면 오양역으로 이배되어 1170년 정중부의 난 이후 복권되었다. 정서가 떠난 배소에, 고려 의종이 개경에서 축출 되어, 정서의 유배지인 오양역 부근, 폐왕성(둔덕기성) 오게 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인 "정과정곡"을 여기 거제도에서, 암담한 귀양살이를 겪으며 지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오양역 인근 적당한 곳에 "정과정곡"과 "임춘의 詩"를 새긴 기념비라도 건립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서는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인,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과정(瓜亭)이다. 어릴 때 이름은 정사문(鄭嗣文)이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항(沆)의 아들이다.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내시낭중(內侍郞中)에 이르렀으며, 1151년(의종 5)에 폐신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격이 경박하였다고도 하나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저서로는 《과정잡서 瓜亭雜書》가 있고, 배소에서 지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이 있다. 이 작품은 처음 귀양지인 부산 동래(東萊)에서 임금에게 자신의 죄 없음을 밝히고 선처(善處)를 청하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시 내용이나 정치 정황, 개인의 암담한 거제유배 상황으로 볼 때, 1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거제에서 지었음이 확실하다. 조선시대 이후로 정과정이, 동래에서 지었다고 기록하는 분들이 생겨난 건, 정서의 본향이 동래라는 이유이다. 동래는 정서의 관향이자 동래정씨가 많이 살고 있어 동래에서의 생활은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배 된 거제도에서의 유배생활(13년)은 너무나 참담했다. 뭇 사람들의 천대도 그렇지만 스스로 삶을 영위하기위해 채소나 곡식을 일구어야만 했다. 이 때 절박한 심경에서 그리움을 겉으로 드러낸 원망과 회한의 노래가 "정과정곡"이다. ⌟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풍류(風流) 재예(才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궁중을 중심으로 한 문관계 내직과 환관계 내료들의 정쟁(政爭)으로 발생한 대령후 사건으로 조정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의 고향인 동래(東萊)에 귀양가게 되었고 6년 후 거제도에 이배되어 오양역 인근에서 1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때 의종의 말이 오래지 않아 곧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오랫동안 아무 기별이 없자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고 한다. 1151년 의종5년 참소를 받고 처음에 관향인 동래로 유배 갔는데 곧 부르겠다는 왕의 약속을 믿고 20년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 없이 세월만 흐르던 차에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서가 유배기간인 1151년∼1170년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의종 11년 2월12일 거제도로 이배되고 13년 후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의종이 축출, 명종이 즉위하여 풀려났으나 대궐로 곧 소환되지는 않았다.
2) 정서(鄭敍)의 지인(知人) "임춘"의 시에서
"사는 곳은 역(驛)과 같았네 (거제시 사등면 오양리)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거제도 해상의 아침 풍경) 기맥을 다칠 것을 걱정할 정도 였네 (자신의 건강을 염려) 할 일없이 산골을 돌아다니다가[ 주위의 기치산(둔덕기성), 우두산] 여러 번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네" (먼 유배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 이로부터 정서의 열악한 거제도 귀양살이를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정서(鄭敍)와 의종이 거제까지 유배를 온 결정적인 이유도 고려시대 역로 길 중 가장 멀리 마지막에 거제 오양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고려말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오양역을 폐지되었다가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 후에 남해안 도서지방이 안정을 찾자 1425년(세종7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복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 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세조 29권, 8년(1462 임오 ) 8월 5일 기사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오양역을 포함한 16역은 소재도 역승(召材道驛丞)으로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500년(연산6년) 오양에다 오양보(烏壤堡)와 역을 설치하였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양포(烏壤浦)를 말할 때 ‘오양역에 있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소촌역 문산찰방 관할로서의 역로의 끝에 위치한 종점 이었다.
오양에 역원을 둔 것은 당시 고려시대에는 바다를 건너 최단거리인 이곳에서 말이나 수레를 갈아타고 아주현 송변현 고현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 할 수 있는 최소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공해전이 필요 했는데 견내량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에 하천과 들녘이 있는 지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거제도는 유배자가 많아 견내량을 진선(나룻배)를 타고 오양리까지 건너와서 배소지로 이동했다. 거제 유배 문학 중에 진선으로 건너는 그때 심정과 풍경을 읊은 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4) 南苽行 남고(남과)행. <정서(鄭敍)>作. 苽亭南苽。一本兩杈 。鳧園南苽。一蔓百花。皇皇者萼。秀發朝霞。于樊于落。籠絡一家。柔則驟長。甘則受和。如鞗如韋。曝之纚纚。[고정(과정)은 남쪽 외과(오이)이며 하나의 뿌리에 두 개의 가지로 갈라지는 오리 동산의 남쪽 오이이다. 한 덩굴에 온갖 꽃이 피어 빛나는 아름다운 꽃이다. 뛰어나고 훌륭한 아침노을이 울타리에 떨어진다. 한 집을 제마음대로 둘러싸며, 부드러운 것이 길게도 뻗어가고, 단 것이 화한 맛을 받아, 코뚜레나 다룸가죽 같고, 햇빛을 계속 쬐인다. <정서>]
[주1]'오원'(鳧園)은 오리 동산이란 뜻인데, 당시 정서 선생은 오양천 작은 하천에서 노니는 오리와, 담장을 타고 초가지붕까지 오른 하늘타리에 만발한 흰 꽃이, 마치 동산에 노니는 오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 하늘타리는 태양(임금)을 사모하는 한결같은 신하에 비유되었다. 정과정곡(鄭瓜亭曲)이란? '한결같이 임금을 그리는 정서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주2] 과정(苽亭) : 위 글 정서가 적은 과정(苽亭)은 우리나라 중, 남부에 많이 자라는 한울타리로 불리는 하늘수박(하늘타리)을 말한다. 온 울타리와 지붕을 여름내내 덮고 푸른빛 과실이 익으면 황금빛으로 변하며, 그 줄기가 두줄로 시작되어 뻗어간다.
열매를 과루(瓜蔞) 그 속에 들어있는 씨를 과루인(瓜蔞仁) 땅속에 들어있는 뿌리를 천화분(天花粉) 이라 부릅니다. 하늘타리의 다른 이름은 괄루(?樓, 지루:地樓: 신농본초경), 왕보(王菩: 여씨춘추), 택거(澤巨, 택치:澤治: 오보본초), 왕백(王白: 광아), 천과(天瓜: 이아, 곽박주), 부(?: 목천자전, 곽박주), 과루(瓜蔞: 침구갑을경), 택고(澤姑, 황과:黃瓜: 명의별록), 천원자(天圓子: 동의보감), 시과(?瓜: 의림촬요), 야고과(野苦瓜: 귀주민간방약집), 두과(杜瓜, 대두과:大?瓜: 절강중약책), 약과(藥瓜: 사천중약지), 압시과(鴨屎瓜: 광동중약), 천을근(天乙根, 천원을:天原乙: 고려시대, 이두 명칭), 천질월이(天叱月伊, 천질타리:天叱他里: 조선시대), 하늘수박, 하눌타리, 한울타리, 천선지루라고도 부른다. 다년생 덩굴식물이다. 괴근은 중약학에서는 천화분(天花粉)이라 한다. 덩굴손은 액생하고 선단이 둘로 갈라져 있다. 잎은 어긋나고 원형에 가까우며 (3)-5-7개로 천열(淺裂) 혹은 중열하며 가장자리에는 듬성한 톱니가 있거나 다시 천열(淺裂)한다.
꽃은 단성의 자웅이주이고, 수꽃은 3-8개씩 총상화서에 달리거나 단생하며, 꽃받침은 통모양이며 5장의 꽃받침잎이 있고, 화관은 백색으로 열편은 5개이며 선단부분은 가늘게 가라져서 유소상(流蘇狀)을 나타내고, 암꽃은 단생(單生)한다. 열매는 호과(瓠果)로 난원형이고 성숙시 등황색(橙黃色)을 띤다. 종자(種子)는 여러 개이다. 풀숲이나 숲 가장자리, 산 계곡에서 자라고 재배도 한다.
5) <<현대어로 바꾼 정과정곡>> 유배문학의 원류,
내님 그리워 우니나니
옷깃 적시지 않은 날 없어라
봄 밤 깊은 산속의 두견새야
내 신세도 꼭 너와 같구나
묻지 말아라 사람들아
지난 날 나의 잘못을.
다만 내 가슴 알아주는 것은
저 조각달과 새벽 별 뿐이리.
[전문 풀이]
내가 임(임금)을 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니
산에서 우는 소쩍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저에 대한 혐의가 사실이)아니며 거짓인 줄을
희미한 달과 샛별(천지신명)이 알 것입니다.
(기 - 자연물에 빗댄 자신의 처지와 결백)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 가고 싶어라.
(저를)헐뜯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저는 결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것은 뭇사람의 참언이었습니다.
슬프도다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서 - 결백의 직접적 진술)
마소서 임이시여, 마음을 돌이켜 들으시어 다시 사랑해 주소서.
(결 - 임에 대한 간절한 애원)
// 갈래 : 향가계 여요. 형식 : 3단 구성. 구성 : 기 - 자연물에 빗댄 자신의 처지와 결백
서 - 결백의 직접적 진술. 결 - 임에 대한 간절한 애원
주제 : 충절. 연군지정(戀君之情). 출전 : <악학궤범>
의의 : ① 10구체 향가의 전통을 잇고 있는 3단 구성의 가요 ② 충신연주지사의 원류 ③ 유배문학의 원류
< 정과정 작품 해설 >
이 작품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문인 "정서"가 귀양지인 부산 동래(東萊)에서 임금에게 자신의 죄 없음을 밝히고 선처(善處)를 청하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시 내용이나 정치정황, 13년 동안 암담한 귀양살이를 한 거제도에서 지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로 과정이 동래에서 지었다고 기록하고 표현하는 분들이 많은 건, 정서의 고향이 동래라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향찰로 표기되어 전해지는 향가는 아니지만 형식면에서 볼 때, 10구체 향가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3단 구성이나 ‘아소 님하’와 같은 여음구는 모두 향가의 영향을 입은 것이다. 또한, 내용면에서는 신충(信忠)의 ‘원가(怨歌)’와 그 성격이 서로 통한다. 그렇지만 형식에서 감탄사의 위치가 바뀌고, 내용상 다소 격조가 떨어지는 등 향가의 형식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형식의 흔들림이나 격조 낮은 표현은 시각에 따라 형식의 자유로움과 표현의 진솔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 자유로움과 진솔함은 곧 고려 속요의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이 향가에서 고려속요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6) 정서(鄭敍)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에 맞서고 공을 세운 아버지, 정항(鄭伉) 덕분에 음서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서의 누이들은 왕가와 명가의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정5품인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고 동서간인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정서가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의종의 즉위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인종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장남이 현(晛)인 의종이고 차남이 대녕후 경이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대녕후 경은 도량이 넓고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종은 현(晛)인 의종을 태자에서 폐위하고 대녕후 경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현을 보좌하고 있었던 정승명의 옹호로 태자를 폐하려는 논의는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현이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배경을 갖고 있던 의종은 대녕후 경을 멀리했으며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정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녕후 경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은 권력을 탐했던 무리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참소한 결과로 의종 5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의종에게는 이모부이기도 했던 정서는 배척해야하는 대상 중 한명으로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라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것은 여러 번의 소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예의 상 했던 약속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이유로 명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소환되지 않았고 이런 배경 가운데 정과정이 창작되게 되었다. 7). 정과정(鄭瓜亭)은 고려 때의 문인인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이다. 《고려사》 악지와 《증보문헌비고》 악고에 가요의 제작 동기와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있고, 우리말 가요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지며, 또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가요와 함께 곡조도 표시되어 있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작자는 고려 인종(仁宗)과 동서 간으로서 오랫동안 인종의 총애를 받아 왔는데, 의종(毅宗)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 이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정서는 거문고를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정과정의 내용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산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었으므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노래(忠臣戀主之詞)'라 하여 궁중음악으로 불렸다. 이 노래는 <동국통감>에는 <정과정>이라 하였고, <악학궤범>에는 <삼진작(三眞勺)>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이 삼진작이란 이름은 정과정에 붙인 악곡명이고, 가사명은 아니다. 즉 <삼진작>은 가사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현존하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드러나는 작품인 만큼 작자가 처한 처지,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미리 파악하고 작품 분석을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과정은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이며 형식면에서 향가와 시조 그리고 가사를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적 가치를 더욱 빛 낼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연구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라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밝혀둔다. 그의 유배기간은 19년 6개월이었다. 동래에서 6년, 거제현에서는 13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묵죽화(墨竹畵)에도 능했다. 거제현에서의 유배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으나 그의 관향이었던 동래보다는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의 사정을 지인(知人) "임춘(林椿)"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① 禦魅二十年 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동래 거제 유배 생활)
愆過懲於昔 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벌써 그 죄가를 치렀다)
遷徙席不暖 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所居如郵馹 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오양역)
南中瘴霧深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可虞傷氣脈 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거제 유배)
優游縱巖壑 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屢躡登山屐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하네. //
② 追悼鄭學士敍(추도정학사서) 학사 정서를 추도하며 / 林椿(임춘)
先生瀟灑出塵埃(선생소쇄출진애) : 선생은 속기를 벗은 고매한 분
忽嘆風前玉樹催(홀탄풍전옥수최) : 아, 바람 앞의 등불처럼 꽃다운 선생의 모습 꺾이다니
上帝已敎長吉去(상제이교장길거) : 하늘이 이가 같은 시인을 불러 가심은
海山曾待樂天來(해산증대락천래) : 바다와 산이 백락천 같은 시인을 기다렸음이라
當年翰墨爲人寶(당년한묵위인보) : 선생의 글 사람들의 보배였으니
高世聲名造物猜(고세성명조물시) : 선생의 높은 명성 조물주의 질투라네
從此四明無賀監(종차사명무하감) : 이제는 사명산의 가지장 같은 감식가도 없으니
誰能知我謫仙才(수능지아적선재) : 누가 우리의 귀양 간 신선의 재주 일아주리..
③ 정학사에 차운하여 처음으로 머물며 짓다. 次韻鄭學士 之元留題
眼界遐觀極大千。아주 멀리 보이는 지극히 먼 곳에
登臨聊與老南泉。애오라지 함께 남천에 익숙하게 올랐네.
門前櫓響淸溪月。맑은 계곡에 비친 달이 문 앞 망루를 향하고
村外樵歌薄暮天。나무꾼의 노래가 외딴 저물녘 하늘가에 퍼진다.
漠漠古灘沙似雪。넓디넓은 오랜 여울, 눈 같은 모래밭에
超超春岸草如煙。봄 언덕 위, 연기 같은 풀은 초연하네.
效嚬欲繼風騷句。맹목적으로 시문 짓는 풍류, 따라 해 보는데
才短多慙溟涬然 짧은 재주에 아무생각 없어 심히 부끄럽도다.
8) 고려시대 995년 성종 14년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 합천∼ 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 오양역이다.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으로 연결되었다.
9). 정과정(鄭瓜亭) 각종 시(詩) 소개.
① 이제현(1287년 ~ 1367년) 소악부에 실린 한시
憶君無日不霑衣(억군무일부점의) 님 그려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정사춘사촉자규) 바로 봄산의 자규와 비슷하도다.
爲是爲非人莫問(위시위비인막문)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只應殘月曉星知(지응잔월효성지) 응당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과정(瓜亭 정서(鄭叙)의 호)의 계면조(界面調) 역시 애상(哀傷)하고 유면(流湎)하여 상간(桑間, 용풍(鄘風)의 상중(桑中) 편을 이름)의 음악과 마찬가지인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배우고 익히지 않는 자가 없어 더욱 오래갈수록 폐해지지 아니하니, 진흥왕의, “가야국은 음란해서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풍악에 무슨 허물이 있단 말이냐?”는 말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인지, 대개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② 이유원(李裕元)의 정과정(鄭瓜亭) 거제유배 : 1881년 8월1일~동년 12월까지(거제면)
정과정(鄭瓜亭) 임하필기 해동악부(海東樂府) 이유원(李裕元)
種瓜餘力撫絃琴 오이 심고 남은 힘으로 거문고를 타니
曲曲悽哀撼樾林 곡조마다 처량하고 애처롭기 그지없네.
亭上啼禽亭下月 정자 위엔 우는 새 정자 아랜 밝은 달
春山疑是蜀規吟 봄철 산속의 접동새 소리인가 하노라.
정서(鄭敍)는 시골로 귀양 가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었으며,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임금을 사모하는 뜻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과정(瓜亭)’이라 하였다. 이익재의 한역시에 이르기를, “님 생각에 옷깃 젖지 않을 날 없으니 흡사 봄철 산속의 접동새와 같네.[億君無日不沾衣 正似春山蜀子規]” 하였다.
鄭叙放歸田里 정서가 방귀전리(벼슬을 떼고 그의 시골로 내쫓는, 귀양보다 한 등이 가벼운 형벌)되어
築亭種瓜 정자를 짓고 오이씨를 심었다.
撫琴以寓意 거문고를 치며 자기 생각을 풍자했다.
號瓜亭 호를 "과정"이라 하였다
益齋詩云 고려말 익제집(이제현)에 전하는 鄭瓜亭 정과정 시이다./ 이유원(李裕元).
[주] 이유원은 순조 14년(1814)에서 고종 22년(1885)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이 분은 <진작(眞勺)이란 악곡을 애호하고 정서(鄭敍)와 '정과정(鄭瓜亭)'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정과정과 똑 같이 거제도에 유배 온 사실을 환기시켜 이글을 작성하였다. "정자 위에 새 울고 정자 아래 달빛 흐르며"의 시구에서 이 분이 당시에 거제도가 정과정를 지은 곳으로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조선 말기까지 '정과정(鄭瓜亭)'과 '과정'이 조선 상류층에서 계속 작시의 대상이 되었다.
③ 양희지(楊熙止) 시
[제 정과정 題鄭瓜亭] 大峯先生文集, 양희지(楊熙止,1439~1504년)
他鄕作客頭渾白。타향에 나그네 되어 머리 모두 세었거니
到處逢人不見靑。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눈길이 차가워라
淸夜沈沈滿窓月。맑은 밤은 깊어 가고 달빛 가득한 창 아래
琵琶一曲鄭瓜亭 한 곡조 비파 타노니 정과정곡 일러라
④ 정추(鄭樞)의 시
가을바람에 강 여울리고 기러기는 우는데 風淸江瀨鴻雁鳴
해돋는 해저에는 교룡이 꿈틀댄다 日出海底蛟龍驚내
이곳에 와 옛 자취 회상하니 我來此地訪前古과정(鄭瓜亭) 한 곡조 내마음 아프게 하네 瓜亭一曲傷我情
[주] 정추(1333-1382, 고려 충숙와 복위2∼우왕8)는 호를 원제(圓濟),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로 이색을 사우(師友)로 한 문재(文才)였다. 신돈을 비판한 죄로 남쪽에 유배당했다가 신돈이 역주(逆誅)되자 개경에 환도하여 재보(宰輔)까지 승진했다. 정추가 위의 시구 이외 "동래회고시"를 남겼다는 점으로 미루어 정과정 옛터를 답사했다고 생각된다.
⑤ 이원진(李元鎭)의 시
일찍 거문고 옛 곡이 전한다는 말 듣고 琴上曾聞古曲傳
오늘에사 유적 찾으니 남은 자취 의연쿠나 此尋遺跡更依然임금 그린 깊은 뜻 아는 사람 없는데 戀君深意無人會
생각건대 솔바람이 거문고를 배운 듯 惟有松風學七絃
[주] 이원진은 조선 인조 22년(1644)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이 때 '과정' 옛 터를 찾아 그 유적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즉 1644년까지는 '과정' 옛 터는 관료 시인들이 직접 탐방하고 정서(鄭敍)의 억울하고 애틋한 사연을 읊고 있다.
⑥ 소두산(蘇斗山)의 시
題鄭瓜亭 /幷序. 月洲集 소두산(蘇斗山)
鄭名敍。仕高麗。被讒歸田。乃築亭種瓜。撫琴作 歌。以寓戀君之意。辭極悽惋。自號瓜亭。卽其曲也。其亭至今存焉。
他鄕爲客鬢無黑。살쩍 온통 하얗도록 타향으로 떠돌았네
何處逢人眼有靑。가는 곳 어디에나 다정한 눈빛 있었던가
一曲琵琶千古意。비파 한 곡조에 천고의 뜻 서려 있어
時時獨上鄭瓜亭。때때로 혼자서 정과정(鄭瓜亭)에 오르노라.
[주] 소두산(1627-1693)은 조선 숙종 연간의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연합정치가 치열할 때 서인 송시열 송준길 문하 사람으로 이들과 정치 운명을 같이 한 인물이다. 현종과 숙종 초 효종과 효종비의 사망으로 두 차례에 걸친 그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팽팽하였다. 효종 복상은 서인설, 효종비 복상문제는 남인설이 채택되었으나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에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복귀하였다. 이후 소두산이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과정'을 현장답사하고 읊은 시였으니 1680년 경까지 '과정'이 남아 있어 소두산이 혼자서 때때로 정과정(鄭瓜亭)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붕당 정치 정국이 소두산에게 어떤 심리적 갈등을 가져왔고 이 때마다 고려시대 정과정(鄭瓜亭)의 처지로 돌아가 공분을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⑦ 정권(鄭權)의 시
東陵一岳小如拳 동쪽 능선의 산 하나 작아 주먹만 한데 亭毁田空葛廖纏 무너진 정자 황폐한 칡덩굴만 왕성쿠나 明月滿江人不見 밝은 달빛 강물에 가득하나 사람은 안 보이고 冷冷松韻學琴絃 거문고 소리 배웠던가 냉랭한 저 솔소리여..
[주] 정권은 58세 되던 영조 25년(1749) 정월에서 그 해 6월까지 동래부사로 복무한 인물이다. 이 때 '과정'은 이미 무너지고 참외 밭은 칡덩굴만 무성했다고 하였으니 이 모습은 현장을 답사하고 실견(實見)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피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무렵은 어찌하여 '과정'이 무너지도록 방치하였던가.
1151년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재상 최유청(崔惟淸)·문공원(文公元) 등과 함께 의종의 아우인 대녕후 경(大寧侯暻)과 태후(太后)의 매서(妹婿)인 내시낭중(內侍郞中) 정서(鄭敍)가 서로 결탁하여 연락유희(宴樂遊戱)한다고 탄핵하였다. 대녕후 경은 인종의 둘째아들로서 도량이 있어 중심(衆心)을 얻었으므로 당시 일부에서는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었다. 환자(宦者) 정함(鄭諴)과 간신(諫臣) 김존중(金存中)은 대녕후와 친한 정서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대녕후와 정서를 모함했던 것인데, 재상 최유청, 간관 김영부 등이 이 모함을 그대로 탄핵하여 결국 정서는 동래로 귀양가고 대녕후는 파하게 되었다.
⑧ 秋日雨中有感 가을비 속에서 느낌 / 이숭인(李崇仁)
琵琶一曲鄭過庭 정과정 한 자락 비파로 타는데
遺響凄然不忍聽 그 소리 처량하여 차마 듣지 못하겠네
俯仰古今多少恨 고금을 헤아림에 새록새록 한 솟으니
滿簾踈雨讀騷經 성긴 비 가득한 주렴에 이소경만 읊조리네.
⑨ 秋日雨中有感 가을비 속에 느낌 / 柳淑(유숙)
他鄕作客頭渾白(타향작객두혼백) 타향 나그네 되어 머리 다 희니
到處逢人眼不靑(도처봉인안불청) 도처에서 사람 만나도 즐거운 눈빛 아니로다.
淸夜沈沈滿窓月(청야침침만창월) 맑은 밤 고요하고 창에 달빛만 가득한데
琵琶一曲鄭過庭(비파일곡정과정) 비파 한 곡조로 정과정을 뜯노라.
[주] 柳淑(유숙) : 1316-1368년, 고려 공민왕때의 문신 본관 서령 자 순부(純夫), 호 사암(思菴).
⑩ 이병기(李秉岐) 鄭瓜亭曲 삼천리문학 제1집, 1938년-1월-1일
鄭瓜亭은 高麗때 사람 鄭叙의 號다. 그는 喬木世臣인 鄭沆의 아들로서 仁宗 外戚과 聯婚하고 得寵하였다. 그러나 毅宗이 즉위(1147)하매 宗室과 사괴어 놀다가 鄭誠, 金存中 등이 誣陷하여 毅宗이 의심하고 또 臺諫의 彈効를 받어 東萊로 귀양을 가는데 王이 이르되 오날일은 朝廷의 議論에 不得己한 것이니 가면 마땅히 돌오 부를터이라 하고 간 뒤에 오래되도록 民命이 이르지 아니하며 검은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었다. 그 뒤 사람들이 이 노래를 鄭瓜亭曲이라 하였다.
내 님을 그리와 우니다니
山접동새난 이슷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殘月曉星이 알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되 녀져라 아으
벼기더신이 뉘러신이잇가
過도 허물도 千萬업소이다
힛 말어신뎌 읏브뎌 아으
님이 나 마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소서
[주] 이는 樂學軌範(李朝 成宗때 成俔撰) 三眞勺에 전하는 것이다. 즉 鄭瓜亭曲이다. 高麗때 사람 李齊賢의 譯詩인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日蜀子規 爲是爲非人英問 只應殘月曉星知]는 이 노래의 첫 구절만 번역한 것이다. 이런 譯詩가 아니라도 이 노래는 읽어보면 짐작할 수가 있다. 그 구구절절이 몹시 구슬프다. 그야말로 접동새(子規) 우는 소리와 같다. 답답한 정을 참아 견딜 수 없어 북바처 나오는 그 소리란 古人이 「極悽惋」하다고 評함도 그럴듯하다.
⑪. 향찰로 표기한 <정과정(鄭瓜亭)> / <악학궤범(樂學軌範)>
前腔 내 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中腔 山(산) 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後腔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附葉 殘月曉星(잔월 효성)이 아시리이다.
大葉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附葉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二葉 過(과)도 허믈도 千萬(천만) 업소이다.
三葉 힛마리신뎌
四葉 읏븐뎌 아으
附葉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五葉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시어, 시구 풀이]
우니다니 : 울며 지내더니
이슷요이다 : 비슷합니다
거츠르신 : 거짓인 줄을
녀져라 : 함께 살아가고 싶구나
벼기더시니 : 우기시던 이. 고집하던 사람이
읏븐뎌 : 사뢰고 싶구나. 슬프구나. 사라지고 싶구나
마 : 벌써
아소 : 금지의 뜻
내 님믈 그리와 - 난 이슷요이다. : 임을 그리워하며 울고 지내는 서러운 모습을 두견새와 같다고 여기는 작자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殘月曉星(잔월효성)이 아시리이다. : 새벽달과 새벽별은 알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결백을 믿어 달라는 심정을 자연물에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영혼만이라도 임과 함께 가고 싶다는 의미로 충정이 잘 드러나 있다.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 나를 헐뜯고 우기던 사람에 대한 원망의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마리신뎌 : ‘뭇 사람들보고 참소하지 말아 달라’는 청으로 볼 수도 있고, ‘말씀이 마르다, 즉 할 말이 없다’는 평서문이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아소 님하, : 그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어로서, 원망과 기원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기원하는 구절로서, 임금이 돌려 들으시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10). 고려사절요 정서의 기록
二月(이월) : 2월에 고려사절요/권십일/의종장효대왕/ 정축 11년(1157)
徙配鄭嗣文于巨濟縣(사배정사문우거제현) : 정사문(鄭嗣文)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 귀양보냈다. 嗣文(사문) : 정사문은 卽敍也(즉서야) : 바로 서(敍)요, 貽永(이영) : 김이영은 敍之妹壻也(서지매서야) : 서의 매부이며, 克正(극정) : 임극정은 元厚之子(원후지자) : 원후(元厚)의 아들로서 於大寧侯(어대녕후) : 대령후의 舅也(구야) : 외숙[舅]이다. 時樂工崔藝(시악공최예) : 이때 악공 최예(崔藝)가 遇赦還京(우사환경) : 사면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는데, 與妻不協(여처불협) : 아내와 불화하였다. 妻誣告(처무고) : 최예의 아내가, 藝尙不悛(예상불전) : “최예는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않고 往來大寧侯第(왕래대녕후제) : 대령후의 집을 왕래한다."고 무고하였다. 王命崔褒偁(왕명최포칭) : 왕이 최유칭(崔褎偁)에게 명하여 鞫之(국지) : 국문하였으나, 無驗(무험) : 증거가 없었다. 王素信圖讖(왕소신도참) : 왕이 본래 도참(圖讖)을 믿어 不友諸弟(불우제제) : 여러 형제와 우애가 없었기 때문에, 故猶且疑之(고유차의지) : 이들을 의심하여 密諭諫臣(밀유간신) : 은밀히 간신(諫臣)에게 일러 論劾大寧侯及克正等罪(론핵대녕후급극정등죄) : 대령후와 극정 등의 죄를 탄핵하게 하고, 又恐太后救之(우공태후구지) : 또 태후가 구할 것을 두려워하여 先遷太后於普濟寺(선천태후어보제사) : 먼저 보제사(普濟寺)로 옮겨 놓고, 陽若不得已而允之(양약불득이이윤지) : 겉으로는 부득이해서 윤허한 것같이 하였다.
史臣林民庇曰(사신림민비왈) : 사신 임민비(林民庇)가 말하기를, 象之惡(상지악) : “옛날 상(象)의 악행은 天下之所共知也(천하지소공지야) : 천하가 모두 알았으나, 而舜(이순) : 순(舜)이 封於有庳者(봉어유비자) : 유비(有庳)에 봉(封)한 것은 恐傷友于之義也(공상우우지의야) : 우애의 정을 상할까 두려워함이었다. 大寧侯(대녕후) : 대령후의 叛狀未明(반상미명) : 모반한 정상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母后尙在(모후상재) : 어머니 태후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而忍使流竄(이인사류찬) : 굳이 귀양보냈으니, 毅宗(의종) : 의종도 亦少恩哉(역소은재) : 또한 은애(恩愛)가 적은 군주이다. 惟淸(유청) : 유청은 秉心正直(병심정직) : 마음가짐이 정직하여 一代名臣(일대명신) : 일대(一代)의 명신이었고, 綽升(작승) : 작승도 淸白謇諤(청백건악) : 청백하고 강직하여 有諫臣風(유간신풍) : 간신(諫臣)의 풍채가 있었는데, 見忌於鄭諴(견기어정함) : 정함에게 미움을 받아 未免流放(미면류방) : 추방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惜哉(석재) :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三月(삼월) : 3월에 流禮賓卿李仲齊(류례빈경리중제) : 예빈경 이중제(李仲齊)와 及家屬于南島(급가속우남도) : 그의 가속(家屬)을 남쪽 섬으로 귀양보냈다. 仲齊妻李氏(중제처리씨) : 중제의 아내 이(李)씨는 性惡(성악) : 성질이 악한데, 嘗語僕(상어복) : 일찍이 사내종에게 한 말 가운데 有不臣語(유불신어) : 신자(臣子)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이 있었다. 僕妻(복처) : 종의 아내는 素怨李(소원리) : 본래 이씨를 미워하였기에 遂訴宦寺以聞(수소환사이문) : 환관에게 말하여 왕에게 알리니, 王怒命近臣(왕노명근신) : 왕이 노하여 근신에게 명해서 面縳李氏以來(면전리씨이래) : 이씨를 묶어 오게 하여 闔家流竄(합가류찬) : 온 가족을 귀양보낸 것이다. 自是讒言交構(자시참언교구) : 이로부터 사람들이 참소의 말로 서로 이간질하니, 王多疑群臣(왕다의군신) : 왕이 여러 신하들을 매우 의심하였다.
11). 정항(鄭沆) 묘지명 정서의 아비(父)
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使) 정 문안공(鄭 文安公) 묘지명. / 공의 이름은 항(沆)이고, 자는 자림(子臨)이며, 그 선조는 본래 동래군(東萊郡) 사람이다. 아버지 목(穆)1)은 섭대부경(攝大府卿)이고, 조부 문도(文道)와 증조 지원(之遠)은 모두 동래군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 고씨(高氏)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에 봉해졌는데,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익공(益恭)의 딸이다. 선친인 대부경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제(濟), 점(漸), 택(澤)과 막내인 공이다. 제(濟)는 현달하지 못한 채 일찍 죽었지만,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 조정에 이름을 날렸다. 공은 왕씨(王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知政事) 경열공(景烈公) 국모(國?)의 딸인데 거듭 봉해져서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 되었다. 자녀로 아들은 네 명을 낳았으나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고, 막내인 사문(嗣文)7)이 음(蔭)으로 장사랑 양온승동정(將仕郞 良?丞同正)이 되었는데, 지금의 상국(相國) 임공(任公, 任元?)의 사위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시어사 지제고(侍御史 知制誥) 최유청(崔惟淸)8)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내궁전고판관(內弓箭庫判官) 이작승(李綽昇)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내시 호부원외랑(內侍 戶部員外郞) 김이영(金貽永)에게 시집갔다. 鄭嗣文은 뒤에 이름을 鄭敍로 바꾸었으며, 「鄭瓜亭曲」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12). 정시랑(정서) 서시 차운 次韻鄭侍郞敍詩 (并序) / 고율시(古律詩) 六十一 서하집(西河集) 임춘(林椿,1148-1186).
[故學士鄭公。余不及見之。有藏其遺藁者。乃公貶南時所和中淳禪老詩也。追和其韻。
고 학사 정공을 나는 만나지는 못했다. 남긴 유고를 감추고 있다가 공이 남쪽 귀양가 있을 때, 중순선로의 시를 모아 준 것이다. 그 운에 뒤쫓아 화답한다. ]
先生自名家。선생은 동래정씨 명가(名家)출신으로
累葉傳侯伯。여러 세대에 걸쳐 후백(侯伯, 후작과 백작)했다 한다.
相襲 珥貂蟬。담비의 꼬리(고관대작)의 유지를 물러 받으니
皆立門前戟。문에 들어서면 그 앞에 모두 굽혔다.
公初有異器。공은 처음에는 이기(異器)가 있어
能繼前人迹。이전 선조의 자취를 이어갈 수 있었다.
斷乳始屬文。젖을 떼면서 처음 글을 지었는데
技巧又兼百。기교 또한 온갖 것을 아울렀다.
至尊召之見。지존(임금)을 초대해 보이니
降輦迎大白。가마에서 내려 큰 술잔으로 영접했다.
欣然賜龍顏。임금은 흔쾌히 기뻐 하사하니
寵愛日以益。나날이 총애가 더하였다.
握手入臥內。손에 이끌러 침실 안으로 들어가
契密如金石。맺은 약속을 황금같이 굳게 지키었다.
廷臣多缺望。조정의 신하들이 우러러 볼 정도로
聲勢方炎赫。기세가 무르익고 성대하였다.
中間忤貴倖。중간에 권세 있는 대관을 거스르게 되니
巧讚含沙射。모래를 머금고 그림자를 쏘듯, 교묘하게 모함하였다.
見黜金閨名。대궐의 벼슬에서 쫓겨나가니
良由釁所積。도리어 허물이 쌓이게 되었다.
長沙逐賈生。장사로 가생(가의)이 쫓겨 갔다가
無復虛前席。이전 자리로 다시 돌아오니 헛되지 않았다.
滄浪作釣翁 창랑수에 늙은 어부가 되어
浮家而泛宅。물 위에 둥실 뜬 집을 지었네.
千載雖一遇。천년에 비록 한번밖에 못 만나고
飜覆在朝夕。아침 저녁으로 언제 바뀔지 모르니
固知行路難。세상살이 험하고 어려움을 진실로 알겠노라.
擧足多岝峉。발을 옮기니 웅장한 산이 많구나.
始自毫髮差。예전의 티끌만한 차이가
遂成丘山責。산더미처럼 많이 쌓인 책임으로
終身纏罪辜。죽을 때까지 얽힌 죄과가 되어
顚踣常動魄。고난을 당해 늘 넋이 뒤흔들렸다.
禦魅二十年。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20년간의 유배 생활)
愆過懲於昔。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遷徙席不暖。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所居如郵馹。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오양역)
南中瘴霧深。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可虞傷氣脈。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
優游縱巖壑。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屢躡登山屐。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
聖明方在上。임금의 총명이 나라위에 있으니
招還劉禹錫。류우석을 다시 불러 들이 듯,
識者聞而喜。식자(識者)는 듣고 기뻐하며
以手但加額。손으로 이마에 얹고 기다린다.
是時仇家去。이 즈음에 원수의 집으로 가서 (말하길)
誰作鴟鴞嗝。"누가 올빼미 울 듯 했는가?"
歸來守先廬。본가로 돌아와 머물렀는데
賜書存舊壁。임금이 내린 글이 묽은 벽에 남아 있었다.
一日朝紫宸。어느 날 아침 궁전에서
經筵爲之闢。경연을 열었는데
天語垂丁寧。임금이 틀림없는 말씀하시며
問以寒暄隔。그 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及當危難際。그러나 위험한 재난에 처한 때에
立朝多逼側。벼슬에 올라 기웃거리게 된다면
忠誠不見知。충성은 알려지지 않고,
空使血化碧。피로 하여금 푸른빛으로 얼룩져 헛되리라.
忽昨見遺墨。문득 어제 남겨둔 필적 보니
之人猶目擊。직접 눈으로 본 분 같다
神毫鬪蛟螭。신령한 붓글씨가 교룡이 다투듯 하고,
大手搏貙獥。맹수와 이리를 다루듯 뛰어난 솜씨였다.
翻瀾一快讀。파도가 뒤집히듯 한번 시원스레 읽어보니
嗜閱空成癖。고질병이 뚫리듯 즐겨 읽힌다.
還疑照乘珠。구슬이 비스듬히 비추니 도리어 미혹되어
初從頷下索。처음으로 용(龍) 턱밑의 구슬 찾게 한다.
觀者已爭購。보는 사람들이 다투듯 구해가니
流傳遍蠻貊。오랑캐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哀哉命壓頭。슬프도다, 운명이 먼저 찾아와
平生困廝役。평생 천한 사역에 시달렸도다.
雖俟河之淸。아무리 흐린 황하강물 맑아지기 기다려도
百歲如過客。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세월이었다.
否泰各有理。운수는 각각의 이치에 있는 바,
豈用占蓍策。어찌 시책(점치는 법)으로 점을 치고자 하는가?
至人齊寵辱。덕이 높은 진인(眞人)은 총애와 수모를 경계한다네.
困窮無戚戚。어렵고 궁핍함에는 근심이 없도다.
相從子輿遊。자여와 서로 벗하여 노닐다가,
解以生爲脊。'삶을 등뼈로 삼는다'는 장자의 막역지우(莫逆之友)를 깨달았다.
靜默閱時人。당시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침묵하는데
狂惑等李赤。이씨를 몰살하는 등 미쳐서 혹하였다.
國恩終未報。나라의 은덕을 끝내 보답하지 못하고
慨爾懷奮激。슬퍼할 뿐, 분개해 떨쳐 일어날 마음으로만 달랬다.
膽氣雖不讓。비록 양보하지 않으려는 담력이었으나
動輒遭嘲嚇。무엇을 하려해도 비웃음만 당하고
音郝朴切。怒也。학씨 박씨 말만 들어도 온통 노여워했다
窮途墮千仞。천 길로 떨어진 곤궁한 처지가 되었어도
長綆呼烏獲。언제나 수레를 막으며 힘센 자들(무인들)을 호통 쳤다.
出袴當俛就。바지 밑으로 굽히며 빠져 나갔으나(큰 뜻을 품고 굴욕을 참는 일)
唾面何敢逆。얼굴에 침을 뱉으니 어찌 감히 거역했다 하리오?
自從劉備瓜。예로부터 오이를 준비하여 베푸는 것을 따르나,
常恐郭生麥。언제나 두려운 건 보리가 자란 성곽이다.
閑棲多暇日。한가하게 쉬는 날이 많아
章句搜且摘。문장을 찾아보고 남의 글을 인용했구나.
感憤寓諸文。모든 글월을 보내니 분한 마음 생겨나는데
紛紛盈簡策。서책이 가득하여 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
子雲方草玄。자운(子雲, 양웅)이 세상명리에 관심 없이 초연했듯이,
聊愛窮居寂。조용히 궁하게 사는 것을 사랑하였다.
詞人多薄命。시인의 운명은 기박함이 많다더니
自古例陷阨。예로부터 고난 속에 빠진 예가 많다.
海山有歸處。섬의 산에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나
仙遊邈難覓。신선이 노니는 먼 곳이라 찾아보기 어렵다.
今修玉樓記。이제 옥루기를 쓰고자(돌아가시니)
不向人間謫。인간의 귀양살이로 향하지 않는구려,
所恨不同時。언제나 같은 때에 있지 못해 한(恨)인데
意若調飢惄。아아~ 허전하여 계속 굶주린 듯하구나.
[주1] 양습(相襲) : 서로 영향을 미침을 가리킨다. “襲”에는 “及”의 뜻이 있다.
[주2] 이초(珥貂) : 옛날 시중(侍中)ㆍ상시(常侍) 등의 관에 장식으로 꽂았던, 담비의 꼬리를 모자에 달았던 것, 고관귀족만 달 수 있었다.
[주3] 초선(貂蟬) : 초선(貂蟬)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폐월초선(閉月貂蟬)이란, "달이 부끄러워 숨어버린 얼굴"이란 뜻이다. 이름은 한자 그대로 담비와 매미를 뜻하는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
[주4] 이기(異器) : 끊임없이 뱉어내는 멧돌, 저절로 술이 차오르는 술잔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을 행하는 도구들을 후세에 '이기'라 불렀다.
[주5] 가생(賈生, BC200~BC168) :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유명한 학자인 가의(賈誼)의 별칭이다. 20세에 박사(博士)으로 임용되었고, 박사가 된지 1년 만에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올랐다. 그러나 건국공신들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모든 일을 문란케 한다.’고 반대하여 그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장사(長沙)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가생은 우울한 심사를 상수(湘水)을 건너면서「조굴원부(吊屈原賦)를 지어서 나타냈다. 4년 후에 복귀하여 왕자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굴원(屈原, BC343?~BC278?)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것이었다.
[주6] 창랑(滄浪) : 창파(滄波)라고도 하며 큰 바다의 푸른 물결이란 뜻이다. 이 시에서 창랑은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의 뜻과
[주7] 유우석(劉禹錫) : 중국 당(唐)나라 시인, 강서성. 오군(吳郡) 출신으로서 한(漢)나라 때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劉勝)의 자손임을 자칭했었지만 기실은 흉노족의 후예로 조상이 북위(北魏) 때 낙양(洛陽))으로 옮겨왔다는 게 정설이며, 자존심이 강했다. 혁신을 주장하던 왕숙문당(王叔文黨)에 가담했다가 805년 9월에 연주(連州 자사(刺史)에 좌천되었다가 10월에 다시 낭주(朗州) 사마(司馬)로 옮겨졌지만 시를 쓸 때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었다. 아무리 불우한 처지에 처하더라도 의젓하고 굳건한 자세를 견지했었다. 그의 시작(詩作)들이 ‘담백하면서도 오묘한 맛’을 내는 것도 그런 자존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말년에 시를 주고 받으며 교유했다는 백거이(白居易)가 감상(感傷)으로 시를 썼다면 유우석은 절제(節制)로 시를 썼다.
[주8] 초현(草玄) : 태현경(太玄經)을 초함. 한(漢)의 양웅(揚雄)이 역(易)을 본떠서 태현경을 지었음.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양웅이 바야흐로 태현경을 초하면서 스스로 몸 갖기를 깨끗이 하였다" 한 말이 있다.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字).
[주9] 옥루기(玉樓記) : 죽음을 일컬어,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거처한다는 누각의 옥루기(玉樓記)를 쓰기 위해서 불려 올려간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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