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원생금(元生金) - 미리 아시고 미리 부르시고
6. 개척전도에 나가다
1 그 후 하기 계몽 때에는 전국 413개소에 전도사가 파송되었는데 나는 충남 논산군 두마면 두계리로 나가게 됐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대부분 미리 도인들의 증거를 받았는데 모두 수록할 수는 없고 간단한 것만 적어본다.
2 그곳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면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몇 번을 가도 만나 주지를 않았다. 한 번은 내가 그냥 들어가겠다고 하자 허락을 해 주어 여섯 번 만에 만났는데 면장은 수염이 하얀 노인이었다.
3 통일교회의 이념을 대강 말씀드리자 좋아하면서 내일 또 와보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에는 커다란 갓을 쓴 할아버지 세 분이 내가 들어서자 일어나더니 절을 똑같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분들이 “이 부인을 지난밤에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4 나는 면장이 유학자라는 것과 세 도인들도 그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이 내 나이를 물어서 45세라고 했더니 운에 맞추어 나왔다고 하며 “그 교회의 운에 맞추어 세계의 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며 집에 들어가면 하늘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40여 일 동안의 전도 기간 중 열흘을 계룡산에서 보내게 되었다. 계룡산은 산세가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5 같이 간 강일숙 권사와 함께 산을 오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때의 우리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잠시도 마음속에서 선생님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4시간 후에 산꼭대기에 다다라서 강의를 했다. 이렇게 9시간 정도 보냈는데 모든 초목들이 벙긋거리며 웃는 것 같았고 하늘에선 한 줄기 빛이 쏟아지고 향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6 나의 몸에선 많은 성신의 불이 타오르고 하늘땅이 화동하며 만물이 기뻐하는 역사를 체험하였다. 내 마음속에서 어떤 리듬이 막 쏟아져 나와서 나는 참부모님 만세를 삼창하고 춤을 추었다. 동서남북을 향하여 경배를 드리고 또 기도하였는데 그때에 있었던 은혜를 어떻다고 표현할 수가 없다. 해가 질 때서야 강일숙 권사님이 올라오셔서 곧 함께 내려왔다.
7 날이 어두워 어느 집을 찾아 하룻밤만 쉬어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다른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 집에는 90 고령의 할머니가 딸과 외손녀, 사위와 함께 사는 화전민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새우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분의 고향은 평북 정주였다.
8 이 노인의 꿈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천도교를 진실히 믿는 그분은 자기가 죽어서 저 나라에 가는 꿈을 꿨다. 커다란 개울을 도저히 건널 수가 없어 바라보고 서 있는데 음성이 들리기를, 이 다리는 문(文)서방이 놓아야 되고 그 문서방이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원리 강의를 했다.
9 내려오는 길에 우리가 온다는 계시를 받고 음식을 장만하여서 메밀국수를 대접해 주는 이도 있었다. 또다시 내려오다가 청룡사라는 절에 들리게 됐는데 거기에는 60여 세 된 여승이 주지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여 우리 교회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들께 할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10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계시 받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 이가 말하기를 세계의 참부모가 한국에서 나타난다. 그 참아버지를 위해서 백일기도를 하라고 했다. 그 백일기도가 끝나니 또다시 참어머니도 이 땅 위에 오신다. 그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두 번째 시작한 기도가 40여 일 된다는 것이었다.
11 그때에 우리의 뜻과 선생님에 대한 증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우리는 선생님의 사랑 가운데서만 자라다가 산 설고 물 설은 땅으로 나오게 되었기에 매일 서울 하늘을 쳐다보며 선생님을 그리워했다.
12 처음, 임지가 정들기 전에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유난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대신자로서 이 땅에 파송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다졌던 것이다.
13 계룡산에 다녀옴으로써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알 수 없는 때에 항상 쉼 없이 이 땅을 위해 수고하시며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4 그때에 선생님께서 대전으로 순회하시기 전에 우리가 있는 곳을 들려 가신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를 서둘렀다. 10시에 도착하신다는 것을 알고 9시부터 기다린 우리는 9시간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 그냥 가셨나 보다 생각하고 대전으로 가려고 하던 차에 선생님께서 오셨다.
15 옷고름을 매다 말고 뛰어나간 나는 그토록 뵙고 싶었던 선생님을 뵈었지만 반가움보다도 먼저 나오는 말이 왜 이렇게 늦게 오셨느냐는 항의를 먼저 드리고 말았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래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시며 곧바로 떠나시려 하시는 것이었다.
16 시간이 너무 연착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가셔야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과일조차도 깎아 드리지 못하고 준비한 과일을 차에 싣게 됐다. 필요한 짐은 선생님의 차에 싣고 우리는 기차로 출발하였다.
17 대전 집회는 참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전도대원들에게 기념으로 동전 일 원씩을 주셨다. 식사 시간 후에 선생님께서 나오시어 나에게 간증을 하라고 하여서 한 20분 동안 보고를 드렸다. 이튿날 9시경에 떠나시면서 지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시었다.
18 다시 임지로 돌아와서 힘찬 활동을 하였다. 그때 국사봉에 있는 손철화 씨를 찾아갔었다. 국사봉까지는 약 4시간 걸렸다. 그분은 만나자 마자 반갑게 맞아주며 그는 “부인께서 통일교회에서 오셨다니 참 반갑습니다. 나는 6년 전에 유 선생한테서 원리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통일교회에서 물질적인 신세를 많이 졌었습니다. 전도하시기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의 집에서 한 3일 동안 쉬어가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서울 본부를 찾아가고 싶어도 교통비가 엄청나게 들어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 그때 우리는 유교인 불교인 기독교인들을 차례로 만나보며 때를 알리고 원리를 전했다. 어느덧 40일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올 땐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후 10월 4일엔 능곡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서대문 형무소 출감 기념 예배를 보러 갔었다.
20 우리가 산에 오르니 선생님과 몇몇 분들이 식구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박보희 씨가 행주산성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유효원 전 협회장님께서 입감하신 경위와 지난 일에 대해 말씀하시었다.
21 우리는 다시 사탄의 악랄한 수법에 넘어가지 말고 말씀을 기필코 찾아 세울 것을 다짐했다. 열흘 후에는 흥남감옥 출감 기념 예배를 흑석동 화장사에서 보게 됐다. 이때 말씀 가운데는 깊은 내용이 많았으며, 흑석동에서 생활하신 말씀도 해주셨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