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책 읽기/김훈
김득신金得臣(1604~1684)은 조선 중기 시인이다. 그는 경상관찰사를 지낸 벼슬아치의 아들이다. 여러 시인묵객들이 그를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꼽았다. 그는 산문보다는 시에 주력했다. 그는 여러 시인묵객의 풍류행각과 작문을 수집하고 비평을 덧붙여서 <종남총지終南叢志>라는 시화집을 남겼다.
<종남총지終南叢志>는 47명의 짧은 시화詩話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대의 시인들이 문장을 겨루어서 자랑하고 서로 비판하는 이야기들이다.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김득신보다 50여 년 앞선 시대의 문신으로 그의 문명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명나라에까지 떨쳤다. 그는 서른 살 때(1586년)관직에 몸담고 있는 신분으로 남의 과거시험 표문表文을 대신 써 주어서 장원급제시킨 죄가 드러났다. 그의 죄는 사형에 해당할 만 했으나 선조가 그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감형했다. 그는 곤장 50대를 맞고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사면 복직되었다.
복직된 후에 차천로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에 머무는 동안 4천 수 이상의 시를 지어서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그가 명明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관장하게 되자 그의 필명은 명나라에까지 떨쳤고, 그는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차천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다.
김득신이 지은 시화집 <종남총지>에는 차천로의 죽음이 시화로써 기록되어 있다.
허균許筠(1569~1618)은 당대의 억압적 현실에 좌충우돌하면서 이단아의 생애를 살았다. 그는 시대의 질곡과 모순을 깊이 고뇌했고, 가끔씩 퇴폐방탕했고, 벼슬살이와 유배와 투옥을 거듭했다.
김득신의 <종남총지>에 쓰인 이야기에 따르면 허균운 차천로의 문장과 명성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중국북경에 가서 성관星官(별자리를 보고 천문을 관측하는 관리)을 만났더니, “조선 쪽에 해당하는 별 하나가 빛을 잃었으니, 반드시 조선의 큰 문장가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허균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압록강을 건너와서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정신이 멍해졌다(악연자실愕然自失).
이것이 김득신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사실과 허구를 가려낼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글과 관련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고 있다.
김득신이 전하는 이야기를 뜯어서 읽어 보면, 허균은 자기 자신이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성관의 천문해독에 따라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는데,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악연자실’했다는 것이다. 문장에 대한 허균의 자부심과 경쟁의식은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것으로 후배 문인들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오자마자 허균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으니 북경 성관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써 그가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관의 말이 될 것이다. 김득신은 당대 현실의 질곡에 처한 독서가와 문장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득신의 시문詩文은 당대에 울려 퍼졌다. 남의 시를 평가하는 그의 감식안은 날카로웠고 언사는 사나웠다. 남의 시에서 글자 한 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칠게 찍어 눌렀다. 그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참으로 더럽고 우스꽝스럽다.”
“광대들이 장난조로 떠드는 소리다.”
“섬마을에서 부는 피리 소리 같다.”
김득신은 문명文名이우뚝해지자 여러 시인들이 다투어 김득신의 시를 칭찬했다. 김득신을 이 허접한 아첨배들을 신랄한 어조로 경멸했다.
김득신은 조선조에서 책을 가장 많이, 그리고 열심히 읽은 지식인으로 꼽힌다. 여러 선비들이 인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다.
김득신 <사기史記>, <한서漢書>, <한유문집韓愈文集> 같은 책들은 손으로 베껴 써 가면서 만여 번을 읽었고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 그는 1억 번을 읽고 나서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경술년(1670)에 팔도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서 굶어 죽은 시체가 전국에 깔렸는데, 그해에도 김득신은 오로지 책을 읽었다. 어떤 사람이 김득신에게 물었다.
“금년에 굶어 죽은 사람과 자네가 읽은 책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은가?”
이 물음은 김득신의 독서를 조롱한 것이다.* 자신의 책읽기가 당대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김득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김득신의 시대에는 민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었고 개가 사람의 시체 토막을 물고 다녔다. 굶주린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서 유리걸식했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에서 울었다. 배고픈 사람들은 작당해서 산속으로 들어가 화적火賊이 되었다. 화적은 배고픈 강도의 무리다.
여든 살 되던 해 김득신은 충청도 괴산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집에 쳐들어온 화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허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이으려다가 죽었고, 김득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끊어 놓고 죽었고, 차천로는 북경 성관의 ‘인정’을 받으면서 죽었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의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153~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