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시간 만에 돌아온 박정희…JP “휴, 빨갱이 아니었구먼” (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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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 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 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참 조그맣고 새까맣던 사내…“나 박정희요” 또렷한 첫 만남 (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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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드려라.”
1952년 4~8월 김종필 대위(왼쪽)는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본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육사 교정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종필 대위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文官)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박정희란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내가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행정처에 사병으로 근무할 때 7기 특별반 1중대장을 하던 분이었다. 그러다 어디로 잡혀갔다고 하는 소문만 들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듬해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었다.
박정희 사관학교 제1중대장은 비분에 차 있었다.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울분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일제의 지배 시대, 박정희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新京, 지금의 長春)에 갔다.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특별 입학, 졸업(57기)한 엘리트 장교였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나와 소위로 임관했다. 미 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군인정신을 찾기 힘든 장교들도 있었다. 사명감 투철한 엘리트 장교 출신의 박정희 소령이 개탄할 만했다. 해방공간 속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1950년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시절 육사 8기 동료들. 앞줄 왼쪽부터 서정순(훗날 정보부 차장)·석정선(정보부 차장)·전재덕(정보부 차장), 뒷줄 왼쪽부터 이영근(유정회 국회의원)·고재훈(정보부 국장)·안영원(경제 과학심의회의 부이사관). 중앙포토
사관학교 2중대장이던 강창선 대위는 박 소령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친했다. 비밀 남로당원이었던 강창선은 우수한 장교와 육사 생도를 당원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강창선 대위가 박정희 소령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도, 그 뒤로도 박정희 소령은 술과 술자리를 좋아했다. 강창선은 박 소령에게 접근해 저녁 자리를 벌였다. 박 소령은 술만 들어가면 마음속 응어리를 분출해 내곤 했다. 세상과 군대에 대한 답답함과 비분강개를 한바탕 쏟아내야 속이 시원했다. 술김에 과장되고 격한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군 내 빨갱이 검거에 열을 올리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는 이미 강창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좌익계열 숙군(肅軍)의 바람은 거셌다. 일본군 헌병보 출신인 김창룡은 공산당을 때려잡겠다며 한창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강창선과 자주 어울리는 박정희가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나중에 육사 8기로 나와 동기생이 되는 전창희에게 밀명을 내렸다.
박정희가 사상이 온건치 않아 보인다. 네가 책임지고 전모를 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