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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방경찰청 경찰관이 이웃간의 말다툼과 폭력사태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이웃들의 다툼의 원인중 중요한 원인으로 주차문제를 꼽았습니다.
그 경찰관이 쓴 글을 한 번 들어보고 오늘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문화는 사라지고 갈수록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갈수록 주택가나 상가앞 도로의 주차난이 심각해지면서 일부 업주와 주민들이 집 앞 도로변에 주차방해물을 설치하면서 이에 따른 다툼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 앞과 상점 앞에 일부 얌체족들이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폐타이어와 화분 등 불법 적치물을 마구잡이로 쌓아놓고 있어 이면도로 차량통행은 물론 보행권까지 침해되면서 주민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어 자정이 요구되고 있다.
자신의 영업점을 방문한 손님이 아니면 아예 주차를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차량운전자와 실랑이까지 벌이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이렇듯 마구잡이로 온갖 주차 방해물들이 즐비하게 나뒹굴다보니 애먼 차량운전자들은 노상 방치물을 피해 이리저리 곡예운전을 일삼게 되면서 사고위험이 증대됨은 물론 도심미관까지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점은 단순히 주차공간을 확보하고자 도로상에 물건을 적치해 두거나 그 밖의 장애물을 쌓아놓을 경우 도로법에 의해 최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주차장애물이지만 이 장애물이 이웃들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심지어는 피를 흘리는 유혈폭력사태까지 일어나게 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이런 조그마한 장애물로 인해 더 중요한 인간관계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께서 새로운 제자를 만나고 제자들을 통해 공생애의 사역을 확장하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과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나다나엘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할 때 처음부터 순종하며 따랐던 것과는 다르게 예수님과 제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나다나엘은 여러 가지로 지식이 풍부하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며 이전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인 것을 보게 됩니다. 나다나엘을 보면 현대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비슷한 종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나다나엘이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마음을 열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살펴보고 우리들, 혹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할 때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방해물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은혜를 받으시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따르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큰 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마음의 방해물들을 모두 떨쳐버리시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우리 속에서 제거해야할 첫 번째 방해물은 이전까지 가졌던 종교에 대한 편견입니다.
45절,46절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님을 먼저 믿게 된 빌립은 자신이 알고 있던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빌립은 모세이후로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며 그 분이 바로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빌립에 말에 반론의 제기합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으냐 나사렛이란 동네가 어떤 동네냐? 지금까지 그런 마을이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너무나도 소외된 그런 마을이 아니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본문이 기록될 당시, 즉 예수님 당대의 나사렛은 너무나 초라한 도시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갈릴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기에 고향이 베들레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은 원래 살고 있었던 나사렛동네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그 때까지 나사렛에서 살았기에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불려졌습니다. 나사렛은 구약성경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역사책인 요세푸스에도 기록된 적이 없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았을 때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얼마 전 새롭게 만들어진 역사가 짧은 신생도시였습니다. 이런 나사렛은 점차 중심지로 알려지더니 주후 4세기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에 유명한 도시로 알려져 성지순례를 거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의 반문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시에서 무슨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구원자이신 메시야가 나올 수 있겠냐는 생각은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볼 만한 생각입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지금까지 현실이 그랬고 보편적인 가치관이 그렇기 때문에 수능을 보면서도 틀림없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강남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일류대학이라고 이야기하는 서울의 일명 SKY대학에 들어갈 사람들은 강남에 있는 학생일거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학생들도 그나마 알려진 대도시, 도시별 최고의 학군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그나마 고교평준화가 되어서 고등학교 등급이 나눠져 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 그 이전까지는 고교평준화가 되지 않아서 일류대학을 들어가는 일류고등학교가 도시마다 정해져 있었고 당연히 그 고등학교에서만 유명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류, 삼류 고등학교출신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이 그런 관점에서 어떻게 나사렛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올 수 있냐라고 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영광이 나타날 수 있고 이전에는 쓸모없는 인생같았으나 엄청난 영광의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학개 2장 9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도립공원내 남한산중턱에 위치한 남한산초등학교가 있습니다. 1912년에 개교해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이 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2000년 여름 학생 수의 부족을 이유로 폐교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경기도 한 지역의 독서단체에서 남한산초 운동장을 빌려 여름캠프를 열었고, 모임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뜻을 모았습니다. 이
학교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 수를 늘어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독서캠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교장선생님은 독서모임의 구성원들과 함께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생활화면서 인격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한 학교를 만들자'는 결론으로 학생확충을 위한 홍보를 시작했고 10년이 지난 지금의 남한산초등학교는 전학 문의로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주목을 받는 학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초라해서 사라질 위기의 학교들이 독특한 교육의 방법으로 전국에서 몰려오는 유명한 학교가 된 곳이 여러 곳이 있습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독특하고 특별하게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교육의 장이 된 곳이 전국 시골마을에 여러 곳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과 10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비록 사람들의 처음 생각에는 쓸모없는, 가치없는 그런 것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고 보면 진정 가치있고 필요있는 것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김형태라는 청년 카운셀러로 유명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이력은 참 특이합니다. 1989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여 설치미술, 퍼포먼스, 회화, 사진 등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다수의 단체전과 개인전을 가졌는데 1996년에는 미술을 접고 황신혜밴드를 결성, 세 장의 정규앨범과 다섯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표하면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으로 인디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03년부터는 청년카운셀링을 시작했고 『너, 외롭구나』 라는 청년상담사례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 “너 외롭구라”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보지도 않은 영화를 재미없을까봐 포기하고 / 가보지도 않은 여행지에 볼 게 없을까봐 안가고 / 먹어보지 않은 요리가 맛이 없을까봐 안먹는 것과 같다. / 경험으로 진리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안목으로 전혀 가까이가기를 거부했는데 그 멀리했던 것인 인생의 소중한 보물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이 만약 끝까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면 신앙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제자의 대열에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속에 가지고 있는 편견이야말로 참 신앙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이 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해보지도 않고 응답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은혜받을 수 있는 기도원과 교회를 찾아보지 않고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걱정을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속의 진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도 신앙의 성장을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시도를 해보지 않고 이미 마음속에서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신앙을 막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편견을 다 내려놓고 참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우리 속에서 제거해야할 두 번째 방해물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48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이 자기 마음을 미리 아시고, 또 빌립과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를 들으며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다른 종교의 지도자처럼 어떤 종교의 창시자정도로 생각하거나 유명한 철학자와 똑똑한 현자중 한 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이 자기에게 특별하신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해주었을 때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똑똑하고 뭔가 세상적인 탐욕을 가지고 특별한 결과을 얻는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난 예수님의 첫 마디는 자신을 처음보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전부터 자신을 알아보았던 그 말씀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것을 찾고 외형적인 것이 그럴 듯해보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것이 그럴 듯해보여도 주님앞에 나아가는 것이 먼저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 해결의 첫 단추를 바르게 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의 모교회인 부산 수영로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하신 이규현목사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한국교회를 진단해달라는 질문에 한국교회는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니 영적 골다공증에 걸렸다고 진단하면서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방법론, 인본주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들어오니 내면이 부실해졌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너무 분주하고 모임이 많고 한 영혼에 생명을 거는 목양일념이나 집중력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한 영광스런 주님의 은혜, 기름부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한국교회가 처한 위중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기에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가를 질문을 받았을 때 이규현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가졌냐의 문제보다 존재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주님과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 붙어있는 작업입니다. 얼마나 잘 붙어있는가의 싸움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무서운 세속화의 물결 앞에 주님께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
우리는 교회가 전도가 되지 않을 때 전도의 훈련을 생각하고 교회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될 때 사회법정에서라도 해결해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는 일이 일어날 때 성장을 위한 어떤 세미나나 세상적인 경영방법이 교회에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문제가 일어날 때 부부세미나를 참석하는 게 어떤 가를 먼저 생각하고 자녀와의 문제가 생길 때 자녀들에게 어떤 훈련과정을 다녀도록 권면하거나 부모의 양육방법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런 것을 먼저 생각하기 이전에 철저하게 하나님앞에 매달리고 주님의 해결하심을 기대하며 온전하게 주님께 살려달라고 몸부림친다면 우리 주님이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인류구원의 메시야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똑같은 어느 한 종교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상의 가치있는 인생관을 정립하신 인생철학자가 아니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며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이시오 구원자이시며 참 신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2~3절을 찾아서 읽으시겠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외부와 내부에서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생각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되시는 참 신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문제속에서 허우적대며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본성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어떤 일이 생길 때에라도 예수님앞에 나와 기도하고 문제를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 우리 성령님께 맡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우리 속에서 제거해야할 세 번째 방해물은 종교를 가지면서 생길 수 있는 인간적인 욕심입니다.
4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기로 다짐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나다나엘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보면서 정치적인 메시야와 권력자이신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에 나중에 얻게될 명예와 권력을 염두해두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정치적인 임금이 되실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된 도리인 부모공경에 있으며, 후손으로서 조상을 잘 받들어 섬김에 있는 것에서 제사를 정성껏 지냅니다만, 정작 마음에 갖는 관심은 그들이 행하는 제사에서의 부모와 조상보다는 제사상에 올려져 있는 젯밥에 있어서 여기에 눈독을 드리고 있다는 것을 빗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랬으며, 장로와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있었으며, 경건의 여러 가지에 힘쓰고, 성전에 드나들었습니다만, 이러한 일을 하는 것에서 이들이 눈독을 들이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자기 의에 있은 자랑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었으며, 백성들 위에 앉아서 명예와 명성과 부귀와 권세로 말해지는 온갖 것을 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탐심자체가 우상 숭배라고 성경에서 말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빌미로 세상적인 부와 명예도 함께 가지려고 했습니다. 사실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 기록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에게서 마음은 멀어지고 죄에 이끌려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그릇된 신앙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오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물질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며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들의 주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된 주님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라도 교회속에는 이런 사람들이 꼭 존재합니다. 교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고 부르는 모든 집단속에 순수한 신앙인이 아닌 돈, 명예,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는 이런 유혹과 영적생활의 방해물들을 거부해야합니다. 쫓아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세상적인 안락을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유익한 것들이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는데에는 무익한 것이 많다라고 고백합니다. 아니 무익함을 넘어서서 해가 되는 것이 많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얼마나 충격을 가져다줄까요?
교회나오는 부모님들 중에 특별히 중직자들 중에도 자녀들이 교회에서 신앙으로 성장하기보다 교회를 발판으로 돈과 권력과 명예와 출세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인 수능시험이 끝이 났습니다. 수능일이 되면 온나라가 난리도 아닙니다. 수능일정에 따라 비행기스케쥴이 조절되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됩니다. 시험을 치는 학교 주변의 교통도 조절되고 전국에 공무원들과 공공기관들의 출퇴근시간도 조절됩니다.
이 정도로 국가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정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시험의 당사자들은 집중력을 오로지 이날에 맞추고 컨디션을 조절합니다.
그래서, 왠만한 교회에서는 이 날 수능기도회를 갖습니다.
수능기도회뿐만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기도회를 진행하면서 승진을 위한 기도를 하기도 하고 각종 시험합격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물론,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다분히 기복적인 기도의 내용이 많이 나오고 이기적인 기도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부적을 쓰며 굿을 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식만 잘되기를 기도하는 세상 종교의 사람들처럼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없다고 누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부터가 목적부터 잘못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게 될 때 우리 주님은 슬퍼하시고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복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을 잘 믿고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매일매일이 행복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이 잘 될 때만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지 마시고 일이 어려울 때도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은혜의 길로 이끄심을 경험하며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나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어떤 일도 은혜가운데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무엇보다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도하십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