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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 창 13:1-9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어느 날 교회 생활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어떤 젊은이가,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와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교회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젊은이여, 자네가 만약 그런 완벽한 교회를 찾거든, 나에게도 꼭 알려주게나. 나도 그 교회의 멤버가 되고 싶네. 그러나 만약 그런 교회를 찾거든,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의 멤버가 되지 말게나.” 그럽니다. 그래서 “왜요?” 하고 물었더니, 스펄젼 목사님 말이 “당신이 끼면 그날부터 그 교회의 완벽은 깨어져 버리고 말 것이네.”라고 했답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형성하는 공동체는 그 어디든지 언제든지, 그런 불완전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고, 믿는 사람들끼리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내재하고 있는 죄성이나 부패성이, 언제든지 돌출 될 수 있는 필연적 존재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그 내재된 죄성과 부패성을, 새로운 속성으로 바꾸어가는 인내를 배우고 절제를 배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도 완전한 곳이 아니라, 완전을 이루어가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그럴 수 있냐? 믿는 사람들이 어째 저럴 수가 있냐?”고 하는 가운데도, “그래도 교회니까,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나마 그 정도인 것이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시각만큼이라도 줄 수 있어야, 현실 속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이란 갈등 앞에, 주저앉아 버리는 삶을 배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생각하며,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이고, 어느 쪽을 선택해서 갈등을 최소화 시키느냐를 배워나가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망신만 당하고,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잔뜩 화난 얼굴로, ‘네 아내 여기 있으니, 빨리 데리고 가!’ 할 때, 아브람은 뒤도 돌아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렸겠습니까? 아브람은 서둘러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잃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아브람을 지켜주셨고, 매순간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과 함께 계셨는데, 아브람은 하나님을 잃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람의 하나님입니다. 그 사실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브람의 상태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10절의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는, 지리적으로 봐도 맞게 표현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동시에 영적인 측면에서도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아브람의 신앙은 내려간 정도가 아니라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시작 부분에 회복의 기미가 보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애굽을 떠난 아브람이 “네게브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 역시 지리적으로 올라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이 올라갈 것에 대한 전조입니다.
3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어디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하나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바로 그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람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말씀을 놓쳤을 때,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답은 처음 주님을 만났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은, 아내를 또 빼앗길까봐서가 아닙니다. 아내를 팔아 얻은 수많은 육축과 은금을 바로가 되돌려달라고 할까봐, 바로의 마음 변하기 전에 도망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놓쳤던 하나님을 다시 붙들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대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처음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되레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브람이 장막을 친 이곳은,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창 12:7-8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람은 처음 출발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면서, 그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게서 말씀이 사라지자, 그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듣지 못하자, 그는 영적인 파국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말씀이 없으니까, 그는 세상의 방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 뭔가 잘못 됐구나!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혹시 요즘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온 것처럼 느껴집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왠지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거 같습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까? 하루 한 시간 기도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까? 그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자리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 예배는 형식적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와 감격이 넘치는 예배였을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잃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괜히 신경질만 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채 삶을 근근이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때의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시간 어린 아이 같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붙들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회복 없이 신앙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회복 없이, 삶의 회복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주간을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주간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다가, 주일예배의 자리로 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 능력을 받아서, 다시 한 주간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아브람이 기도한 것으로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의 기본이란 말입니다. 첫째가 말씀입니다. 말씀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행위이다.’ 둘째는 당연히 기도입니다. 기도를 말씀의 정의와 연관시켜 정의해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 말을 거는 행위이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갔을 때,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은 동시에, 기도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도가 끊어졌을 때, 아브람의 신앙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의 회복 없이 신앙의 회복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음 생활을 잘하려고 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정상적인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을 기도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루 한 시간 기도로 충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루 한 시간은 개인 기도의 커트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은 자기 영혼을 위한 기도의 최소한의 시간인 셈입니다. 하루 한 시간 기도에 대해서는, 좀 율법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도란 길이와 시간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짧은 기도라 해도,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긴 기도라 해도, 형식에 치우친 기도는 응답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잠자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막 14:37절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막 14:38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요즘 하루에 얼마나 기도합니까? 기도해야 할 분량과 실제로 기도하는 분량에, 상당한 간격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통장이 마이너스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할 수만 있으면, 길~게 할수록 좋습니다. 2시간 3시간은 못해도, 한 시간 정도는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마귀와의 싸움이고,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신앙의 기본인 말씀과 기도를, 억척스럽게 붙들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서먹서먹한 관계를 복원했습니다. 그는 다시 말씀의 자리에 섰습니다. 다시 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다시 기도를 우선 순위로 삼았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런데 아브람의 앞에는 뜻하지 않았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조카인 롯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롯은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는 롯을 가엾어 했을 것입니다. 애비 없이 자라는 그가 불쌍해서,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사할 때도, 특별히 롯을 챙겼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가는 아브람에게, 조카 롯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아브람도 자기에게 아들이 없었던지라, 그를 아들처럼 여겼습니다. 아브람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갈 때도,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때도, 롯은 항상 아브람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꽤 긴 시간을 한 식구로 같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서로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둘의 꿈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12장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창 12: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롯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냥 아브람과 함께 갔습니다. 그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아브람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 말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아브람과 헤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롯에게 어떻게 해서 재산이 생겨났는지는 모릅니다. 롯이 아브람의 가족이었다면, 그에게 따로 재산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처럼 롯이 자기 몫으로 빼돌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사람 좋은 아브람이 조카의 장래를 생각해서 따로 떼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한 집에 두 살림을 차린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을 위한답시고 좋은 일을 했지만, 롯이 개인 재산을 소유한 것이, 둘 사이에 갈등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전에 이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명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조카인 롯을 데리고 떠난 것이 잘못입니다. 아브람의 부분적 순종이 낳은, 예견된 일인 셈입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애굽에서처럼, 즉각적인 징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장은 괜찮아 보인다고, ‘뭐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말씀에 불순종한 후에 처음엔 조마조마하지만, 하나님의 채찍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건망증이 있으신가 보다’ 생각하는 것은, 위대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아브람과 분리시키십니다. 아브람이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반드시 롯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괜한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억지를 쓰면, 괜히 관계만 악화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6절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소유가 많은 것은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킨 이유가 됩니다. 베델과 아이 사이의 골짜기는 불어난 가축을 먹이는 데는 너무 비좁았습니다. 물이나 풀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결국 돈이 탈이었고 재산이 문제였습니다. 아브람에게 물질이 없을 때도 시험이 왔고, 물질이 많을 때도 시험이 왔습니다. 물질이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시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적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도둑질을 하기 쉽고, 많으면 하나님을 몰라보거나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2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람의 재산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 재산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래가 자기 아내임을 숨기고, 바로에게 신부지참금을 받고 판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근로소득입니까, 불로소득입니까? 불로소득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럼 롯은 재산을 아브람과는 다른 형태로 모았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로소득에서 조금 떼어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생겨난 부를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된 부자를 일명 졸부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부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부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노동의 대가로, 부를 얻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부를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르게 벌어서 근사하게 사용하는 깨끗한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브람과 롯 사이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표면상으로는 목자들의 싸움이었지만, 사실상 아브람과 롯의 싸움이었습니다. 목자의 싸움이, 두 사람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직접 두 사람이 싸웠더라면, 문제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의 가축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 문제를 확대시킨 면이 있습니다. 두 집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싸우고 나서, 주인에게 어떻게 보고했겠습니까? 아브람 집의 목자들은 자기들이 잘못했음에도,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잘못한 것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롯 집의 목자들도 그렇게 거짓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서로에 대해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그런데 이 다툼이 누구 앞에서 벌어진 것입니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앞에서’입니다. 사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도 불신자들 앞에서 싸우면 안 됩니다. ‘그래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더 낫겠지’ 하고 지켜보는데, 자기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손해 안 보려고 싸우고 있을 때, 불신자들이 신앙인을 우습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하는 예수님까지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잘 믿고 천국 가라” 합니다.
직장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에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이익에 눈멀어 양심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전도해 온다고 해도, 전도한 사람 이상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지탄의 대상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보여주어,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다툼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끼리 싸우는 것은, 믿음의 한 식구 됨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라고 해서,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초대교회도 갈등이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고 헤어졌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갈등이 교회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문제는 어떻게든 교회 안에서 풀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 앞에 가서 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갈등하고 다투면,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는 못해도, 그분의 영광을 가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갈등하고 싸우면, 우리 원수 마귀가 박수를 칩니다.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쾌재를 부릅니다. 우리 교회가 평안하여 말씀과 기도로 든든히 서가기를 소원합니다.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은 더 이상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람이 롯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서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아브람의 태도를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라는 말입니다. 당시 문화권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잘 잘못을 떠나서, 손아래 사람이 손위 사람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합니까? 아브람이 롯을 찾아갔습니다. 큰아버지 아브람이 조카 롯을 찾아갔습니다. 손위 사람인 아브람이 손아래 사람인 롯을 찾아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아브람이 믿음이 별로 없는 롯을 찾아간 것입니다. 불신자 앞에서 다투는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 아브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지만, 롯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직장에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이웃과 무슨 일로 다투고 난 후, 서로 얼굴 대하기가 서먹서먹할 때 어떻게 하는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믿음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찾아갔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특징은, 먼저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이게 맞습니다. 어른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좋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행위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원리입니다.
둘째, ‘우리는 한 친족이라’입니다. 아브람은 누가 잘 했느냐 잘못 했느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잘 잘못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잘 잘못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누구의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잘못을 따지는 것으로는, 갈등을 풀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정만 상하고, 관계만 더 악화될 뿐입니다. 정 따진다면, 롯에게 잘못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합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한 식구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 아브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서로 사는 길을 찾았습니다. 공존과 상생의 길이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멀리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말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땅이 비좁아서 생긴 것이니까, 땅을 넓게 쓸 수 있는 대안을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그곳까지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의 골짜기만 바라보니까,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좀 더 넓은 시야만 가졌어도, 이렇게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원망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원망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원망이 좋은 말은 아닙니다. 관계를 회복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망은 관계를 악화시키고 깨뜨릴 수 있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원망은 멀리 보지 못하고 크게 보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공존과 상생하는 쪽으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 보는 게 어떨까요?
아브람은 양보심을 발휘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실 이게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아낌없이 양보하는 모습을 조카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아내까지 포기하면서 자기만 살려고 했었던 아브람입니다. 그는 다소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꽤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남도 아닌 아내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는 믿음의 시련과 실패를 통해, 자기 인생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땅보다 하나님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으면, 땅에서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하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면,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선택의 순간마다 갈등하며 얻은 결론은 어느 쪽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신앙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언제나 현실적인 것에만 시선이 머물러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잘못 선택하고 살아가는 롯 쪽입니까?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따른 내 운명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선택은 내가 잘못해 놓고, 운명은 하나님께 맡기는, 이런 이기적이고 비 신앙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 성도님들, 특히 오늘 헌신예배 드리는 청년들은,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실 올바른 선택을 하므로, 늘 기쁘고 즐겁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기근의 시험을 당하자 애굽땅으로 내려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처음 믿었을때의 순수함과 열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오랜 신앙생활을 하다가 믿음의 첫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단하거나,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우리 자신도 괴롭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갔듯이, 저희들도 불신과 불순종의 삶에서 돌아서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중단되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고,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도 가끔은 내 선택이 올바른지, 내 운명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바른 선택에서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하옵소서.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향락대로 육체에 끌려서, 스스로 한 걸음씩 소돔으로 들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이미 깊이 발목이 빠져 묻혀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다 / 창 13:10-18
어떤 그리스도인이 로또 복권을 늘 한두 장씩 사곤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이런 복권을 사도되나 망설여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을 읽다보니 성경에 로또가 여러번 나오더랍니다. 창세기 12:4절상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창세기 13:5절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물론 이 ‘롯도’가 그 ‘로또’는 아니지요. 아무튼 오늘 본문 이전까지는, 아브람이 가는 곳에 롯도 함께 갔고, 아브람이 있는 곳엔 롯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땅을 바라보았기에, 한 사람은 멸망의 길을, 다른 한 사람은 복된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사람이 늘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바라보고,어떤 영상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 미래가 좌우됩니다. 아름다운 영상을 그리며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추하고 부정적인 영상을 그리며 사는 사람은, 추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특별히 시대가 어렵고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영상, 밝고 빛나는 영상을 그리며 살아야 복받는 사람이 됩니다.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시험은, 기근 곧 먹을 것이 모자라서였습니다. 그는 이 시험에서 보기 좋게 넘어졌습니다. 시험을 맞았던 아브람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람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시험은, 너무 넉넉해서였습니다. 시험은 모자람에서도 올 수 있고, 넉넉함에서도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느냐가 결정적이지, ‘모자라냐, 넉넉하냐’라는 환경의 문제가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두 번째 시험에서는 승리했습니다. 눈앞의 환경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하였습니다. 아브람도 사람인데,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렇게 결정한 후에는, 무척이나 자유했을 것입니다.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은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이, 한달음에 조카에게 찾아가, 이렇게 제안합니다. 아브람이 말씀을 놓았을 때는, 자기가 중요했습니다.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니까, 손해 볼 줄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어떤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래서 조카에게 선택권을 먼저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목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면, 목이 좋은 곳에 위치한 가게가 잘 될 것입니다. 당연히 목축하는 사람에게도, 양을 칠 수 있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목초지를 잘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선택하기만 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목초지의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조카 롯을 끔찍이도 위해주는, 큰아버지의 훈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카가 잘 되는 것을, 곧 자기가 잘되는 것으로 여기는, 아브람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습니다.
10-11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그러나 조카는 큰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아브람과 함께 갔던 롯은, 아브람의 ‘조카 먼저’의 제안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좋은 목초지가 있는 요단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큰아버지가 먼저 그곳을 차지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자기에게 선뜻 양보 해주니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습니다. 롯은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잘 행사했습니다. 모양새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좋은 땅을 달라고 떼쓰지도 않았는데, 자기에게 기회가 굴러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마치 에덴의 동산같은 요단 지역을 선택한 후에,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만사가 형통할 줄 알았습니다. 롯은 철저히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다니는 것을, 그 동안 곁에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생하려면 혼자나 하지, 왜 식구들까지 끌고 다닐까?’ ‘말씀을 붙들었으면 일이 잘 풀려야지 왜 가는 곳마다 고생일까?’ 가나안에 와서도 ‘이곳이 아닌가벼’ 하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하마터면 저승 사람이 될 뻔하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게 무슨 인생낭비란 말인가?’ 먹고사는 문제로 큰아버지를 따라 나섰지만, 머리가 커지고 철이 들고 보니,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큰아버지가 어리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롯처럼 미래가 현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한번 선택을 잘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꼭 그렇게만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나의 현재의 선택에 전적으로 달렸다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롯과 아브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결국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아브람이라고 요단 지역에 흐르는 물을 못 보았겠습니까? 그곳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비옥한 곳인 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람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붙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롯의 생각에는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요단 지역은, 행복이 보장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하나님밖에 모르는 아브람 곁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작별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자기의 목축과 목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동으로 옮겨갔습니다. 성공이 보장된 곳을 향하여 떠나는 롯은, 아마 콧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떠나는 순간부터, 롯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할 것을 예고합니다. 연달아 벌어지는 비극적인 일들이, 아브람을 떠나는 데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롯은 아브람을 무시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답답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너무나 쉽게 복의 근원인 아브람 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부모님을, 복의 근원으로 대우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등불을 밝히는 사람을, 복의 근원으로 대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에 반해 아브람은 어떻게 합니까?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직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그 땅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 땅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이곳에서 죽는다’는 자세였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말씀으로 승부를 내고 말 것이다’ 하는 태도였습니다. 반면에 롯은 어떻게 합니까? 12절하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은 이익을 따라서 갔습니다. 자기 이해관계를 따라서 갔습니다. 득실을 계산하고 득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롯은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롯이 결국 어디까지 갔습니까? 소돔입니다. 전에 남방으로~ 남방으로 가다가, 결국 애굽까지 간 아브람과 닮았습니다. 소돔은 장차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게 될 땅입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롯은, 소돔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이 갔습니다. 소돔은 보기에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집을 선택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집값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곳을 고를 수 있습니다. 자녀교육 곧 학군이 좋은 곳을 감안할 수 있습니다. 생활주변의 편리성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드물게는 교회 가까운 쪽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 교회 쪽으로 점점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가까우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달려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교회에 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새벽에 걸어 나와서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돔까지 이르렀더라”라는 표현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현실밖에 모르면,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 걸면, “소돔까지” 이르게 됩니다. 롯이 처음부터 그곳까지 갈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어떻게 가다보니, 결국 소돔까지 이르고 맙니다. 하지만 그 길은 롯에게 멸망의 길이요, 심판의 길입니다.
13절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자기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말씀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소돔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롯은 소돔에 죄인이 많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롯의 계산에는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계산에서 하나님을 뺀 사람은 죄도 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시는 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죄에 대해 민감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우리 가정에서 죄를 몰아내야 합니다. 롯처럼 죄인이 많은 곳을 향해 가면, 미래에 대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롯이 가기 전에, 소돔 사람은 보통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곳으로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소돔에 가도 나는 잘 믿을 수 있어.’ 롯은 세상을 너무 순진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악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죄와 세상과 금방 친해지게 만듭니다.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은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홀로 남았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신앙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고독이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고, 외로움이 신앙의 성숙을 불러옵니다. 예수를 믿을 때 가장 힘든 것이, 자기 곁의 사람이 떠나는 것입니다. 같은 비전으로 달려가다가,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고 자기 홀로 남겨진 것입니다. 그럼 자기 안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그래도 이 길을 가야하는가?’ 아브람에게서 위로를 받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아브람을 잘 알 거 같은 롯마저,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이 손해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도 숨죽이며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며 손해를 선택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항상 아브람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발 물러나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하나님의 부재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없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갈등하고 고민할 때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다만 한 발 물러나 타이밍을 재고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와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있지 말고, 눈을 들어 끝없이 펼쳐진 땅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처해 있는 환경으로 고개를 숙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믿음으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말씀을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부족함에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크게 두려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돼도, 일이 잘 풀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질 때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그 때야말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어디서 보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너 있는 곳이란 현재의 자리를 말합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말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가 있는 곳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면 지금의 자리를 피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합니다. 지금의 자리만 아니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에서 승부를 내려고 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마음을 묶어야 합니다. 마음이 떠 있으면 지금의 자리에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기적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내가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찾아오십니까? 내가 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떠나보낸 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브람에게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세계에 눈뜬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고,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개처럼 취급했던 이방인들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선교사라는 칭호를 최고의 영예로 여겼고, 결국 이방인의 선교사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이라는 문화권 속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광활하고 넓은 중국 대륙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C.T 스터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켐브리지 7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으며, 성공이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중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에 갔다가, 더 시야가 넓혀져서 아프리카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자기의 뼈를 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까? 하루하루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고 있습니까?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눈을 드는 게 중요합니다. 고개를 숙이고는 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어떤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하나님은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시기 전에 먼저 보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시기 전에 먼저 보고 기도하며 땅을 밟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세대보다 다음 세대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가문을 일으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믿음의 가문을 든든하게 세워놓지 못하면, 믿음의 대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권력 지위 명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것은 믿음의 족보입니다. 우리 후손이 믿음의 가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16절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약속하시는데, 아브람에게 아들이 한 명이라도 있는 상태입니까?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한 명도 없는데 몇 명도 아니고, 얼마나 주신다고 했습니까?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하나님은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하시면 크게 주십니다. 믿음의 그릇만 준비되면, 통 크게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에 반해 세상이 주는 복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승부수를 던져야 할지, 누구에게 투자해야 할지, 답이 분명히 나옵니다.
17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라”는 말씀에 이어 또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보았으면 일어나야 합니다. 보이는 땅을 일어나 밟아나가야 합니다. 고개 숙이고 있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고만 있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 보이는 땅을 두루 다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일어나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는 자에게 허락하십니다. 먼저 전도대상자를 보게 하십니다. 그 사람을 마음에 전도대상자로 정하여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다입니까? 그렇게만 하면 그 사람이 교회 나옵니까?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야 합니다.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야 합니다. 종으로 횡으로 두루 다니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그 영혼을 추수하게 됩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이 동서남북 비전을 보았지만, 현실은 아직 ‘상수리 수풀’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본 것이 현실이 되는 데까지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또 대가만 지불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지만, 하나님께는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았지만, 아브람은 들뜨지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평소처럼 하나님께 예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생활을 잘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생활을 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생활을 잘했습니다.
이 시간 예배를 위해 기도해 보겠습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낙심한 영혼들이 돌아오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잃은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축제하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일예배의 정신이 가정으로, 일터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익을 따라가지 말고, 말씀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눈앞의 현실보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땅의 기업이 아닌,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주는 자로서, 베푸는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은 희생해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아 누리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거룩한 꿈을 주시고, 그 거룩한 꿈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꿈꾸는 사람,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마음에 꿈을 품고 찬양하오니, 주님, 이 꿈이 내게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가운데, 이 광야를 지나 영원한 천국의 가나안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웃음이 가득한, 그 날의 삶을 소망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