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페도라
원준연
둘째 날, 착한 양들을 사각의 우리 안에 풀어놓듯, 우리는 사각형의 넓은 링과 같은 마요르 광장에 풀어졌다. 꼭 10년 전 군중 속의 고독처럼 외롭게 다녀간 추억이 아스라하다.
광장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펠리페 3세의 기마 동상 앞에서 다시찾아왔다는 신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볼거리에 비해서 자유시간이 좀 여유 있게 주어졌다. 사각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 카페테리아, 기념품 가게에 눈길이 갔다. 어림으로는 10년 전 그대로인 것 같다.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 스티브의 눈처럼 스캔하듯 주욱 훑어보는데 어느기념품 가게에 한 무리가 비친다. 우리 일행임을 직감하고 들어섰다. 모자점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다크그린의 베레모를 찾고 있는데 마음에 쏙드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 엉겁결에 중절모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무슨 색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어울린다고 한 것 같다. 그때 운명처럼 아주 예쁜 새빨간 페도라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갖고 싶었던 바로 그 색상의 중절모다.
빨간 페도라. 20여 년 전에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모자다. 그때 가이드로 나온 훤칠한 키의 유학생이 쓰고 나 온 모자가 빨간 페도라였다. 그는 많은 군중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잘 찾으라고 일부러 새빨간 페도라를 사서 쓰고 나왔단다. 퍽 인상적이었던 그 멋진 모습과 마음 씀씀이가 기억에 오롯하다. 지금 내가 빨간 페도라에 한눈에 반한 것은, 내가 이끄는 문화탐방 모임에 나도 새빨간 페도라를 쓰고 나가고자 함이다. 순전히 그의 모습에서 자극받은 것이다.
빨간 중절모도 잘 어울리지만, 검은색 중절모자가 더 잘 어울린다고 노(老)점원은 검은색을 권유한다. 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또래의 점원은, 아마도 빨간 중절모는 남자가 일상에서 쓰기 어려우니 괜히 돈 낭비하지 말고 무난한 색을 택하라는 노파심에서 한 말일 것이다. 흔히 빨강은 열정, 즐거움, 사랑 등을 나타낸다고 하여 남성보다는 여성에 맞는 이미지의 색깔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빨강은 남성적이고 태양을 상징하는 강인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점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나는 용기 있게 빨간 중절모를 쓰고 개선장군처럼 가게 문을 나섰다.
아직도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일행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두 와~ 하며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함께 찍자는 주문이 쇄도한다. 괜히 우쭐해지는 마음이 하늘까지 닿는 듯하다.
이번 여행에 참여한 일부 수필가는 해외여행 때마다 리마인드 웨딩촬영을 하는 특이한 행사를 10여 년 전부터 지속해 오고 있다. 극성스러우리만큼 열정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다른 여행객보다 드레스와 그에 딸린 모자나 장신구 등을 별도로 챙겨야 하니, 그 성의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그들은 다른 호텔 투숙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로 아침 식사 전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호텔 로비나 정원 등에서 촬영하였다. 간혹 외국인들은 늘그막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꽃처럼 화사한 웃음이나 엄지척으로 격려하기도 한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는 모습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장관일 것 같다.
우아한 신부가 있으면 응당 고상한 신랑이 있어야 제격 아니던가. 나도 신랑역으로 제안을 받았지만, 드레스에 걸맞은 신사복을 준비하지 못하여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위력을 보였던 빨간 페도라의 위세를 믿고 과감히 나섰다. 빨간 페도라는 베이지색 점퍼도 양복으로 둔갑을 시킨 것인지 하얀 드레스와 한 세트인 양 잘 어울렸고, 그
위에 빨간 중절모는 어둠을 사르는 촛불과 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10여 명의 신부에 둘러싸여 한동안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둘도 찍고, 셋도 찍고, 프러포즈 신도 찍고, 찍고 또 찍었다. 내 생애 이렇게 우아한 신부들과 멋진 사진 촬영은 두 번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그 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내려올 때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아름다운 시간일지라도 미련이 남을 때 그쳐야 그 황홀함은 더욱 오래도록 기억되지 않을까.
귀국해서도 한참 리마인드 웨딩 사진이 스마트폰으로 날아들었다. 다시 보아도 흐뭇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제 또다시 그런 시간이 올는지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월간 수필문학 202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