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홀든 (William Holden,1918~1981)
미국의 영화배우. '윌리엄 홀든(William Holden)'은 미국 일리노이 주 태생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지역 라디오에서 연극에 몰두했으며, 이후 연극과
관련해 좋은 평판을 받았던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재능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1937년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는 중에 '파라마운트 社' 와 계약을 맺고 배우가
되었다. 그는 <Golden Boy, 1939>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는데,
음악과 운동사이에서 갈등하는 청년 역이었는데, 이 작품 이후 그의 별명은
'골든 보이'가 됐다.
1940년대 초반 '윌리엄 홀든'은 'Columbia Pictures'와 계약을 맞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공군으로 입대하기 전 '파라마운트사'와
'콜롬비아사'가 제작한 몇몇 마이너 영화들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1950년대 초반 시나리오작가 겸 감독인 '빌리 와일더'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주요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Sunset Blvd>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중요한 배우로 급부상하게
됐다.
<Sunset Blvd>이후 '윌리엄 홀든'은 인기 배우가 되었고, <Born Yesterday,
1950>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순탄하게 연기활동을 하던
그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제17 포로수용소>에 출연하면서 또 다른 전기(轉機)를
마련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재치가 넘치고 잔재주가 많은 인물인 미군 포로
세프턴(Sefton)을 연기했는데, 평단 으로부터 시니컬한 매력이 있는 인물을 잘
연기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 영화로 1953년 뉴욕영화비평가협회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1954년 아카데미 (Academy Awards)에서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그 다음 '윌리엄 홀든'은 <Executive Suite, 1954>에 출연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젊은 엔지니어를 연기했다. 그리고 이어서 <The Country Girl, 1954>라는
작품에서는 뮤지컬 감독인 '버니'역할을 맡았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슬럼프를
겪고 있는 명가수 '프랭크 엘진(Frank Elgin)'의 재기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역할이었다. 당대의 가수 겸 미남 배우인 'Bing Crosby'가 프랭크 역을 맡고,
미녀 스타 'Grace Kelly'가 아내인 '조지'역을 맡았다.
같은 해 '윌리엄 홀든'은 한국전쟁을 다룬 <원한의 도곡리 다리>(The Bridges at
Toko-Ri, 1954)에 출연했는데, 주인공인 전투기 조종사 '해리'가 중공군의 험난한
방어망을 뚫고 적들의 요충지인 '도곡리 철교'를 폭파하는 데는 성공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적들의 공격으로 장렬하게 전사(戰死)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그레이스 켈리'가 아내로 출연을 했다.
이즈음 '윌리엄 홀든'은 '빌리 와일더' 감독과 함께 다시 <Sabrina, 1954>라는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윌리엄 홀든'은 부잣집의 차남으로
'Audrey Hepburn'이 연기한 운전 기사의 딸 '사브리나'의 호감을 얻게 되는
플레이보이 '데이비드'를 연기했다.
이후 '윌리엄 홀든'은 <모정>(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1955)에서
홍콩, 중경, 싱가포르 및 마카오 등을 돌며 한 여자와의 사랑을 이어가는 남자를
연기했다.
그리고 1957년 '윌리엄 홀든'은 자신을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널리 알리게 되는
작품인 '데이비드 린'(David Lean)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에 출연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는 다시금 수용소의 포로인 시어즈(Shears)를 연기했다.
일본군의 강압적 명령에 굴복하여 영국군 및 미군 포로들이 험한 계곡에 거대한
목조 다리를 만들었지만,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이 다리를
폭파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시어즈를 다시
그곳으로 파견하여 다리 폭파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윌리엄 홀든'은 전쟁 멜로물인 <The Key, 1958>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예인선의 선장 역을 맡았고, 그리고 당대의 명배우인 '존 웨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The Horse Soldiers, 1959>에서는 군의관인 '헨리 소령역'을 맡았다.
'윌리엄 홀든'은 전쟁영화와 로맨스 영화에 주로 나왔지만 가벼운 코미디에서 밝은
성격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영화에서 다양한 역을 맡은
그였지만,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콰이강의 다리> 이후부터 다소 하향세를 탔다.
이후 그가 출연한 작품들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9년 격렬한 서부영화 <The Wild Bunch>에 출연하여
성공적으로 재기를 했다.
5년 후에는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 등 쟁쟁한 후배 스타들과 함께 출연한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 1974)에서 빌딩의 주인인 '짐' 역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당시 제작비 1천4백만 달러를 들인 이 대작영화는 미국에서
1억1천6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비평적으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 홀든'은 1976년 시드니 루멧(Sidney Lumet) 감독의 대표작인 <Network>에도
출연했는데, 여기서 그는 시청률 저하 때문에 고통을 받는 뉴스 앵커의 상사로 나와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그리하여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로 1977년 全美영화비평가협회에서 최우수주연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홀든' 은 다 알다시피 <Sabrina>, <모정>(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그리고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 등과 같이 세월이 흘러도
기억되는 영화들을 남겼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잊힌 영화들도 많다. '매슈 코니엄'은 상기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홀든은 스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배우였다”고
전제하고,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연기는 <제17 포로수용소>(Stalag)의 냉소적인 하사관,
<Sunset Blvd.>의 악착같은 작가, <The Wild Bunch>의 세상사에 찌든 악당 두목,
그리고 <Network>에서 패배한 프로듀서 역이었다”고 평가한다.
'윌리엄 홀든'은 1954년부터 1958년까지, 그리고 1961년에 각각 ‘그해의 최고의 스타 탑
10’에 6번이나 등재됐고, 미국영화협회에서 선정한 ‘100년간 100명의 스타’ 중 25번째로
기재되는 등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자리매김 됐다.
'윌리엄 홀든' 1981년 11월 16일 63세를 일기(一期)로 '산타모니카' 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