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듈깽의 아노미이론
1. 현대사회의 분업과 아노미현상
아노미를 일개인의 심리현상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려 고집하였던 듈깽은
1893년에 발간된 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에서 분업이 개인간의 결속을 공고하게 해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노미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될 것임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Durkheim, 1933: 203):
"개개인의 일시적인 이해관계만을 위해서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란 극단적인 개인주의만을 조장하게 될 것이고 인간사회는 홉스가 주장한 이른바 무질서가 지배하는 자연상태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개인과 개인간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간 조정해 줄 수 있는 메카니즘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간의 적대적인 관계는 언제라도 재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모래알처럼 낱낱이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일시적이 아닌 장기간 단단하게 결속시켜줄 수 있는 메카니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는 곧 인간사회에 유기적인 유대관계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인 개개인의 동의에 바탕을 둔 합심에서 울어 나오는 상부상조의 행동 (Einverstaendnishandeln: consensual action)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개개인 인간이 어떤 경위를 거쳐 사회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희생시키려 할 것인지를 듈깽은 밝혀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이론은 이른바 사회 전체를 위한 “개인 모두의 동의 (consensus of parts)”나 “사회적 가치의 통합체 (social value-complex)" (Merton, 1938: 321-324)가 어떻게 형성 가능해 지는가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듈깽이 빈번히 저지르는 논점선취 (petitio principii)의 오류를 발견하게된다.
분업화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가 다양화된다는 것은 곧 가치관의 다양화로 귀결된다는 논리는 그가 주장하는 기계적 유대관계가 유기적 유대관계로 바뀌어 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뿐만 아니라, 듈깽의 논리에 따르면 기계적 유대관계가 사회질서유지의 원동력이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보상법 (restitutive law)보다는 응징법 (repressive law)이 사회의 결속력을 보다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응징법이 지배하는 전근대사회의 집단결속력은 보상법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집단결속력보다 훨씬 취약하였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된다.
그러나 머어턴 (Merton, 1938: 322)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기적 유대관계가 지배적인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도 기계적인 유대관계가 지배적이었던 전근대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었던 원초적인 집단결속력이 역시 강력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즉 기계적인 유대관계가 반드시 유기적인 유대관계로 바뀌어 진다는 듈깽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명예 (Ehre, honor)를 생명보다 더욱 중시하였던 전근대사회 못지 않게 현대사회에서도 명예는 중요시되는 만큼 응징법이 지배적이었던 전근대사회에서만 명예가 중시되고 보상법이 지배하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명예는 사회의 결속력과는 무관하다는 성급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명예란 성질상 객관적인 계약관계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비명문화 된 개개인간의 정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큼, 현대사회의 집단 결속력과는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명예는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하나의 강력한 방편 (a powerful regulatory device making for social cohesion)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2. 극단적 실증주의 (생물학주의?)와 극단적인 사회사실주의간의 갈등
듈깽에 따르면 아노미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현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히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종사하고 있는 많은 직업에 몰두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사회전체의 이해관계에 배치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되는 경우가 발생하게되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추구하는 목표달성을 꾀하다보면 개인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전체가 추구하는 목표를 도외시하고 일개인 자신의 목표달성만을 꾀하다보면 결국 아노미현상에 빠지게되고 결과적으로 일탈행위, 즉 범죄행위에 탐닉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듈깽의 이와 같은 생각은 그의 사회학 방법론의 문제점을 여실히 반영해 주고 있다. 아노미란 현상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듈깽이 시인하고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아노미현상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아노미현상이 아닌 것은 정상적인 것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환언하면, 인간사회에는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이 각각 별개의 현상으로 존재함을 인정할 뿐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은 엄연히 구분되어지며 또한 구분되어 저야 함을 뜻한다. 이는 바로 롬부로조등이 주장하는 생물학주의에서 인간을 병적 유전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분류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듈깽의 극단적인 실증주의 (radical positivism) (Merton, 1934: 321)를 그대로 수용하게되는 경우, 인간사회에는 아노미현상을 겪게되는 부류의 사람들과 아노미현상을 절대로 겪지 않을 사람들의 부류로 양분될 수밖에 없게된다. 즉 정상과 비정상은 확연히 구분되며, 범죄자는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정상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된다.
듈깽의 이상과 같은 양분법은 그의 저서 The Rules of Sociological Method (p. 65-68)에서 그가 역설하고 있는 극단적인 사회사실주의 (social realism) (Orru, 1987: 131) 방법론과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그는 범죄행위는 원천적으로 정상행위와 구별될 수가 없다는 이른바 “犯罪 正常論 (normality of crime)”을 개진하면서 만약 우리가 범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범죄발생원인을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듈깽의 아노미이론을 보다 자세히 분석해 보기 위해서 아노미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는 범죄발생에 대한 그의 생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Durkheim, 1938: 66-67):
"범죄를 비정상적인 사회병리현상으로 다룬다는 것은 범죄를 우리사회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우발적인 (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현상과는 완전히 별개의 성격을 띤 어떤 병적인 신체구조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범죄란 건강한 사회에서
항시 나타나는 것이며 (an integral part of all healthy societies)...범죄행위가
정상적인 행위와 구별될 수 없는 이유는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인간사회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듈깽 자신이 정상적인 (normal)행위와 범죄행위, 즉 비정상적인 (pathological) 행위를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아노미현상은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병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아노미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므로 사회학에서 굳이 정상적인 행위와 구별하여 논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처럼 듈깽은 아노미현상과 아노미에서 비롯되는 범죄행위를 설명하면서 극단적인 실증주의와 극단적인 사회사실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설득력 있는 해답을 모색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듈깽이 어느 정도까지 생물학적인 요인에 근거를 둔 극단적인 실증주의와 후천적인 사회학적인 요인에 근거를 둔 극단적인 사회사실주의의 양극단에서 고심하고 있었는가는 아래의 내용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Durkheim, 1938: 66, 110):
“범죄가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현상이라고 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생물학적으로나 또는 정신적으로 정상인과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이유는 범죄행위가 인간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하등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과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과는 전혀 별개의 성질이기 때문이다....범죄가
하둥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이 아니라는 주장은 사회현상은 오로지 사회적인
깃으로 설명 가능할 뿐이지 결코 개인의 심리상태나 개개인의 생물학적인
시체구조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듈깽이 강조하고 있는 사회적인 현상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The determining cause of a social fact should be sought among the social facts) 사회학주의의 뜻을 재삼 음미해 보게된다.
3. 듈깽의 “범죄자와 범죄” 분리논리
그러면 여기서 듈깽의 범죄에 관한 논지를 다시 한번 면밀하게 분석해 보자. 그는 사회적인 것과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인 것을 전혀 다른 상이한 차원에서 논의를 시도하고 있다. 즉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신체적 내지는 심리적인 요건이 정상인의 그것과 상이하거나 또는 상이할 수도 있다고 하여, 이들 범죄자들이 저지르는 범죄행위가 결코 인간사회에 피해만 가져다주는 비정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범죄 없는 인간사회가 존재할 수 없는 만큼 범죄란 엄연하게 정상적인 사회현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단순히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범죄자 (criminal)들이 비정상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범죄 (crime)행위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범죄자들은 비정상적인 존재이나 범죄는 분명히 정상적인 사회현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듈깽은 위에서 설명한 내용과는 다르게 때때로 아노미를 겪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노미라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인 현상을 다같이 비정상적인 “병적인 존재” 또는 “병적인 현상”으로 동시에 묘사하고 있어 듈깽의 이론전개에서 사회학적 차원과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원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는 듈깽이 아노미현상을 개인이 겪게되는 심리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개인의 심리적인 현상과는 별개의 성질을 띤 사회구조적인 현상인지를 밝히는데 실패한데서 근본적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된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듈깽의 방법론에서 논란의 초점이 되는 것은 사회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객관적, 서술적 (descriptive) 분석방법을 동원하기보다는 객관적인 분석방법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주관적인 당위성을 강조하는 평가적 (e-valuative) 방법을 구사하고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범죄자들이 신체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정상인과 구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수긍하면서도,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행위는 인간사회에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현상이므로 정상적인 행위로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고집함으로서, 범죄자와 이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범죄를 별개의 성질로 다루고 있다. 물론 듈깽이 강조하고 있듯이 범죄자의 육체는 생물학적 현상인데 반하여 범죄는 사회적 현상이라, 이들 양자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 져야함은 분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긍이 간다.
그러나 범죄자가 없는 곳에 범죄가 발생할 수 없듯이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곳에 범죄자가 존재할 수 없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곧 범죄자를 떠나서는 범죄를 논할 수가 없고 동일한 이치로 범죄를 떠나서는 범죄자를 논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범죄자와 범죄를 다같이 논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심리학적인 요인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며, 사회학에서만 다루어지는 사회적 요인을 첨가해서 설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따라서, 범죄발생원인을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측면에 국한시켜 다룬다는 것은 곧 범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만을 다루는 결과가 되며, 범죄발생 원인을 사회적 측면에서 다룬다는 것은 범죄자에 국한시켜 범죄발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범죄자를 제외(?)한 체 범죄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환경요인만을 집중 조명함을 의미한다.
결론지어서 말한다면, 듈깽은 그의 사회학 이론에서 범죄의 발생원인을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에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천부적, 생물학적인 요인이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사회환경요인과 상호 작용할 때 범죄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듈깽은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과 후천적인 사회환경요인 두 가지 중에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중요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즉 아무리 열악한 사회환경에 처해지더라도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쉽사리 범죄에 빠져드는 강한 범죄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태어날 때부터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날뛰는 성질의 것이라 사회질서를 어기려는 성향이 강하며, 특히 범죄성향 (criminality)이 강한 사람의 경우는 이를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Durkheim, 1952: 255-256; Lanier, Henry, 1998: 213-214).
그러면 왜 듈깽의 이론이 범죄발생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 요인보다는 후천적인 사회적요인의 중요성을 더욱 중요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비록 범죄가 생물학적, 심리학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긴 하지만 듈깽은 사회학주의 (sociologisme)를 주장하는 사회학자답게 범죄라는 현상을 유독 사회적 측면에서만 고찰하려는 고집에서 찾아 볼 수 가있다. 즉 그는 범죄발생원인을 규명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인 범죄자의 신체적인 여건과 같은 생물학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설명해야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생물학적인 경향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죄행위를 실증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지극히 추상적인 “사회적인 것”으로 불리어지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듈깽의 방법론상의 문제점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근거로 모든 사회현상을 규명하려는 북미 사회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우선 이들 사회학자들은 듈깽의 사회학적 방법론을 일컬어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추상적인 사회현상을 가설로 설정하는 (hypostatizing abstractions) (Taylor, 1982: 9)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추상적인 특성을 띤 사회현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지극히 구체적인 특성을 띤 개인의 신체적인 특성과 같은 생물학적 요건을 추상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듈깽의 방법론이 실증주의와 사회학주의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그의 사회학 초기 이론이 다분히 경험적, 실증적인 자료를 중시하였던 계몽주의의 영향을 많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후기 사회학이론은 사회학주의로 기울면서 반계몽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데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범죄라는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범죄자 개개인을 중요시 할 것인가 아니면 범죄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환경을 중요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사회학의 풀리지 않은 숙제인 개인우선론 (individualistic approach)과 사회우선론 (collectivistic approach)의 문제로 귀결된다 (Infantio, 1998: 57-99; Martindale, 1976: 623-626).
4. 자살풍조와 사회생물학
듈깽은 그의 자살론에서도 자살자 개개인의 자살행위 (individual suicidal acts))와 자살풍조 (courants suicidogenes)를 별개의 현상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자살자 (suicide)는 자살행위 (suicidal act)와 구별되어야 함은 물론, 자살자, 자살행위도 자살풍조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자살이라는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요건인 자살자의 신체적인 구조를 설명해야하고, 아울러 이 같은 신체적인 구조를 가진 자의 어떤 육체적, 심리적인 상태 (biological, and psychopathic states)가 범죄를 유발하게 되는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 마지막으로 자살자의 육체적, 심리적 요건과는 구별되는 사회적인 성격을 띤 자살풍조가 어떻게 자살률을 증가 또는 감소시키는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듈깽은 자살이라는 현상을 지나치게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만 논하려다 보니 자살자나 자살행위가 없는 상태에서도 자살이라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극단론을 펼 정도로 생물학적인 현상보다는 사회적인 현상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모든 자살자들이 한결같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생물학적인 요건을 갖추고 태어났으리라는 생물학주의를 지지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자살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학적현상도 아닌 사회생물학적 (socio-biological)인 현상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Barash, 1977: 40) 생물학적인 단일요인이나 사회학적인 단일요인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사회현상을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같은 이유로 범죄행위를 사회적현상으로 보지 않고 사회생물학적 현상으로 다룬다면 사회학의 영역을 벗어나 생물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결과가 되겠으나 특정 부분의 사회현상은 사회학의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실제로 듈깽은 그의 자살론에서 그가 극구 강조하였던 사회학주의 방법론 (Durkheim, 1938: 110-121)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자살자 개개인의 신체적, 인구학적인 특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Gane, 2000: 22-35). 즉 그의 The Rules에서 적용되었던 방법론이 Suicide에서 일대 방법론의 전환 (reversal of Durkheimian methodology)을 거치면서 자살자의 생물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은 듈깽 자신이 사회학주의와 생물학주의 양극단에서 고심하고 있음을 또다시 여실히 반영해 주고있다.
듈깽은 물론 생물학적 환원론 (biological reductionism)을 배격하였지만 인간의 사고란 뇌 세포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의 육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만으로 인간의 사고가 형성될 수는 없음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은 자살이라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인간이란 존재를 기술하고 있는 듈깽의 주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Agnew, 1997: 36):
“인간은 사회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욕구의
일부는 인간의 육체, 즉 생물학적인 성질을 띠고 있고 (these needs are
biologically based), 일부는 문화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a product of
the cultural system).“
이는 곧 인간의 사회적 욕구는 성질상 생물학적, 사회학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사회학적인 단일 방법론으로는 범죄나 자살과 같은 사회현상을 해명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음을 지적해 주고있다. 자살론이나 범죄 발생이론 또는 아노미이론에서 다같이 사회생물학의 이론이 보다 설득력이 있음을 재차 시사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