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링 강의] 강사 김삼배 -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뒷모습을 좀 사진으로 좀 모아봤습니다.
지금의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중국의 청화대학 아주 유명한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학 같은 곳입니다.
철학과 교수였던 주자청이라고 하는 분이 수필집을 낸 게 있습니다.
이게 이제 한글로 번역된 책인데요. 이 책에 보면 이 주자 교수가 쓴 수필 가운데에 아버지의 뒷모습이라고 하는 수필이 기록된 게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자기가 20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셔가지고 집이 이제 서주 쪽인데 그러니까 중국에서 아래 역 남쪽입니다.
남쪽인데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내려가서 장례를 모시고 이제 북경에서 청와대학을 다닐 때 이제 대학을 다시 올라가는데 자기 아버지하고 같이 올라가게 됐어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직업 때문에 일자리 때문에 같이 이제 열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중간에서 이제 좀 이렇게 갈아타는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이 당시가 꽤 오래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제 아버지는 가서 남경에서 이제 내리고 자기는 북경까지 이제 가야 되는데 그 중간에 이제 여기서 헤어지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이제 혼자 올려보내야 되니까 이제 그때 아주 귀한 과일 중에 귤이 아주 귀했던 그 시기에 아버지가 이제 저쪽 플랫 기사 플랫폼에서 저쪽 넘어가서 이제 가게 가서 귤를 사다가 아들을 이제 주고 이제 올려보내려고 아버지가 규를 사러 이제 가는 그런 때에 그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본 겁니다.
근데 자기가 어릴 때 생각할 때 아버지는 참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힘이 있는 그런 분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날 자기 눈에 비친 그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 어머니를 장례를 모시고 많이 지쳤겠지 마음도 몸도 그리고 이제 그 아들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아들한테 그 귀한 귤을 좀 사주려고 그렇게 차에서 내려가서 저쪽 건너편으로 가는데
아버지가 키가 좀 작은 모양인데 그날따라 뒤뚱뒤뚱하는 그 모습이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아버지가 너무 이렇게 안 돼 보이신 거예요.
너무 연약해 보이고 그래서 자기는 20세가 된 그 청년인데 아버지를 새롭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눈물을 많이 흘렸다.
이제 그런 내용으로 이제 쓴 수필지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이제 그 글을 보다가 저도 사실은 제 신앙 경험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모태 신앙인이 아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저를 인도해서 교회를 처음 나간 기독교 집안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런 신앙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고 일대 교회를 이제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1학기 때 친구가 옆에 이제 앉았는데 저는 고향이 충청북도 청주시가 제 고향입니다.
근데 청주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교육 도시잖아요.
학교가 지금도 뭐 대학들이 많은데 그 당시에 한 학년에
한 65명 이렇게 지금보다는 훨씬 학생이 많았죠.
그리고 한 학년에 한 반에 65명, 한 학년에 6반 7반 있는 최소한 칠반 6반 이렇게 있는 학교마다 그렇게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3년 동안 다니면서 중학교를 3년 다니면서 한 번도 같은 반이 안 됐던 친구가 고등학교 들어갔는데 같은 학교로 들어갔고 같은 학년 같은 반이 됐고 같은 옆에 짝꿍이 됐어요.
그래서 그 친구랑 이제 잘 지냈지. 근데 그 친구가 저희 교회를 먼저 자기 형님이 이제 인도해서 다니는 친구인데 저보고 어디를 가자고 자꾸 조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 따라서 간 곳이 교회였습니다. 처음으로 교회를 간 겁니다.
근데 갔다가 너무 쑥스러워서 교회를 못 들어가고 이제 도망을 갔어요.
토요일날 오후에 갔는데 그리고 그다음 주에 또 붙잡혀 갖고 가고 하도 졸라가지고 또 따라갔는데 속으로 이제 이번 주도 도망을 가야 되겠다 이제 서울하고 따라갔는데
청년들이 나와 있다가 딱 저를 붙잡았어요. 그래서 붙잡혔습니다.
그래가지고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게 점심 국수.
그 당시에 국수 끓여졌는데 국수를 얻어 먹고 오후에 학생반을 이제 참여하고 그게 이제 계기가 돼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학년 이제 겨울방학이 되면서 토요일 오후마다 학생 반에 가서 성경을 이제 배웠는데 성경을 잘 모르지 뭐 잘 들어오지도 않죠.
근데 한 가지를 딱 배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안식일 문제를 깨달았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그 10계명 가운데 네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그 안식일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고등학교 교과목 중에 세계사가 있지 않습니까?
세계사에 보면은 거기 세계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게 성경 다니엘서를 이렇게 공부하다 보니까 딱 맞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나도 안식일을 준수를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겨울방학 때부터 이제 겨울방학 시작하면서부터 토요일 날은 이제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서 이제 교회를 가서 하루 종일 교회에서 이제 예배를 드리고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하고 2학년 때 이제 겨울방학 끝나고 개학하면서부터 집에서 토요일이 되면 학교 간다고 가방 들고 나와가지고는 교회로 갔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다 지키고 그렇게 보내기를 2학년 올라가서 한 4월경까지 이렇게 몰래 부모님들 몰래 이렇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집에서 이제 알게 됐습니다. 토요일마다 학교를 빠지니까 나중에 이제 알게 되겠죠.
그래서 집에서 이제 많이 혼이 나고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릴 때 하나님께서 저한 마음의 용기를 주셔서 그렇게 이제 아버지하고 씨름을 하다가 청주는
이제 주로 서울이 가깝기 때문에 서울로 우리 교우님들 자녀들이 학교를 이제 자녀들을 다 보냈습니다.
저는 이제 저도 안식일을 지키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선배 청년 선배 누님 중에 한 분이 저한테 야 선배야 너 안식일도 지키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귀가 번쩍 뛰었지 그래서 그런 학교 있습니다.
전학 가겠다고 그랬더니 이제 서울에 있는 서울 36 고등학교를 소개를 했어요.
그래서 가겠다고 집에 가서 이제 전학 가겠다고 하니까 청주가 교육 도시잖아요.
그때만 해도 고입 대입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충청북도 내에서 공부 좀 한다고 하는 친구들은 전부 다 청주로 다 유학을 나오던 때입니다.
와서 자취하고 하숙하면서 학교를 다니던 때니까 서울로 간다고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이 막 노발대발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너 니 고집 피우는 대로 하면 학비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해준다.
그래도 자가 고집 피우고 알았다고 내가 혼자 벌어서 공부하러 공부 하겠다고 해서 서울 학 가서 이제 물어보니까 이게 사립이잖아요.
등록금 따로 내야지요. 기숙사 또 집단 안으니까 기숙사비 내야지요.
뭐 용돈 써야지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청년 누님이 하루는 또 부르더니 야 너 안식일도 지키고 공부도 하고 학비도 벌어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소개해 준 학교가 지금 충남 광천에 있는 서해 36 고등학교입니다.
그 당시에는 광천 36이라고 그랬어요. 귀가 번쩍 뛰어서 그러면 당장 내가 가겠다고 그래서 안식일날 그 이야기를 듣고 일요일날 청주에서 천안까지 버스 타고 가고 천안에서 장항선 그 비둘기를 타고 한 2시간 내려가 가지고 광천이던 날 처음 찾아갔어요.
가서 가니까 운동하는 당직 선생님이 있어 갖고 상담을 하고 이만저만해서 전학을 오겠다고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교감 선생님을 이제 전화해갖고 이제 오시게 해갖고 상담을 하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전학을 올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 못 모시고 옵니다. 그랬더니 안 된대요.
그러면 알겠다고 그러고 이제 인사를 하고 와서 월요일날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서를 떼달라고 그냥 했어요.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도 그 당시만 해도 부모님이 허락 안 하면 절대 안 떼주는데 하도 골치가 아프니까 토요일마다 빠지니까 담임도 골치가 아프잖아요.
맨날 이제 월요일 가면 혼나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그냥 떼주더라고요.
전학서를 그래가지고 전학서를 가지고 책가방 하나 그야말로 책가방 하나 이불부터 조그마한 거 하나 이렇게 두 개 딱 들고는 혼자 전학을 갔어요.
근데 저희 부모님이 안 따라오셨어요 반대를 했으니까 이제 가서 전학을 가서 기숙사 이제 전학 간 그 주에 외박을 와가지고는 이제 교회에 와서 본 교회 와서 침례를 받고 정식 이제
신앙을 교적을 등록을 하고 그다음에 이제 생활하는데 이제 해가 바뀌어서 3학년이 됐습니다.
3학년 1학기 중간쯤 됐는데 한 5월경으로 기억하는데요.
담임 선생님이 야 선배야 너 누가 손님이 왔다는 거예요.
오전 이제 4교시가 끝났는데 누가 손님이 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봤더니 저희 아버님이 오신 거예요.
아무 연락도 없이 근데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 거예요.
저희 아버님 표정이 이렇게 보더니 제 손에 뭐를 하나 이렇게 쥐어주고 그냥 돌아서 하고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식사하고 가셔야지요. 점심 때가 됐으니까 근데 데리고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리신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은 학교가 참 좋아였습니다.
그 당시는 제가 전학을 가려고 딱 갔는데 반도 두 반밖에 없고 학교 교사 동이 이제 지났으니까 이야기할 수 있죠.
그 당시에 제가 생각하기에 이게 무슨 창고인가 무슨 회사 건물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열악했어요.
그러니 저희 아버님이 고집 피워가지고 전학을 고집스럽게 왔는데 따라오지도 않다가 이제 한 번 와본다고 오셨는데 보니까 학교가 너무 형편없는 거예요.
보기에 그러니까 속이 아주 대단히 상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말도 안 하고 그냥 그냥 가버리신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하고 그냥 잊어버렸지 그렇게 하고 저는 이제 목회를 나오고 제가 목회 나와서 안수를 받던 해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이제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저희 집에서 한 두 달 정도 이렇게 모시고 있으면서 아버님이 이제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해서 돌아가시긴 하셨는데 그렇게 하고 그냥 교회장으로 다 모시고 끝냈어요.
그리고 이제 잊어버리고 사는데 제가 목회를 교회를 나온 지 딱 10년 만에 인턴 전도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 목회 안수를 받은 지 한 10년 정도 지나서 그 당시에는 제가 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재림연수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때인데요.
그 뒤에 치악산이 있습니다. 제가 산을 좋아해서
어느 날 산을 이제 혼자 올라가는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게 고3 때 그 학교에 오셨던 저희 아버지 생각이 딱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 그때 이제 돌아가시던 집으로 돌아가시던 그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라 가지고 그때 그제서야 그날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그렇게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냉정하게 가시던 그 저희 아버님의 마음이 그때 이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면서 혼자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 조금 철이 든 거예요. 이제 그런데 그렇게 저희 아버님의 마음을 알게 된 이해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깨닫고 나서 그다음에 저희 육신의 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엔 제가 제 약간의 간증 제 신앙 간증과 같은 것인데요.
제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게 됐는지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여기 창세기 22장에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내게 지시하는 한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하나님께 주신 아들 외아들이지 이삭이 20세가 됐을 때에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 가지고 내 아들을 내 사랑하는 독자를 번죄로 내게 재물로 드리라 이렇게 명령을 하십니다.
근데 여러분 번죄라고 하는 성경에 보면 구약 당시에는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렸냐면 양을 잡아가지고 또는 소를 잡아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근데 여기 나오는 번죄가 이게 글자로만 이렇게 썼기 때문에 이게 번죄가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 가운데 세 번째 창세기 줄에 레위기 세 번째 책인 레위기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 레위기서입니다.
그 레위기서에 보면 여러 제사가 있는데 그중에 번죄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드리는지가 자세히 나왔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양 한 마리를 흠이 없는 양을 끌고 와가지고는 그 머리에 자기 죄를 다 고하고 전가시킨 다음에 그다음에 그 양을 자기 죄의 희생 재물로 대신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근데 그걸 드릴 때 어떻게 하냐면 그 양을 이 죄를 지은 사람이 손수 자기 손으로 그 양의 심장을 찌릅니다.
죽이는 거지요. 그리고 그 피를 받아서 제사장이 성서에 가서 번제단에 피를 뿌립니다.
그렇게 해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근데 이 번죄가 실제로 이 글자로만 이렇게 썼기 때문에 그 번죄가 얼마나 끔찍한
재산지를 잘 못 느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 여러분 중에 보신 분 있을지 몰라요.
장막회에서 실제로 그 번죄를 시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 살아있는 양을 갖다가 잡아서 그 양을 번죄로 들인 그런 왜냐하면 이 번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이 있는데요.
제가 그걸 영상으로 담은 게 있습니다. 한번 보여드리려고 그러는데 조금 끔찍스럽습니다.
무섭습니다. 근데 여러분 좀 마음이 약한 분들은 안 보셔도 됩니다.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 제가 음성은 좀 뺐습니다. 저렇게 죄를 지은 죄인이 직접 찌릅니다.
그러면 숨을 헐떡이면서 피를 토하면서 죽죠. 그 피를 받아가지고 성수에 들어가서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저렇게 죽은 양을 가죽을 벗깁니다. 이 번죄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면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서, 죄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시는 하나님의 외아들 독자를 상징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저렇게 가죽을 다 벗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볼 때는 중요한 부분은 가렸지만 사실상 실상은 시루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밝아 벗겨진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이 본죄가 그것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저렇게 각을 다 떠요.
목을 자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그다음에 속에 있는 내장을 꺼내가지고 다 물에 씻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각을 떠서 번제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중국에 가시면 중국 북경에서 조금 한 3~40kg 떨어진 외곽에 가면 실제로 저렇게 번죄를 들였던 큰 재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 저렇게 내장을 다 꺼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당하신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잘 못 느낍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그 고통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흉악한 것인지를 몸소 친히 다 겪으신 예수님이 그 표현하신 내용입니다.
그럼 저렇게 번제단에 다 올려서 저걸 어떻게 하는 거냐면 불로 사루는 겁니다.
저게 번죄입니다. 그러니 글자로 그냥 번제로 두자고 하는 그 말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명령인지를 우리는 잘 못 느낍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제 120세가 된 그 노인 할아버지에게 그 눈에 넣어도 그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을 저렇게 번죄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러니 저 명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우리가 글로만 봐서는 잘 모릅니다.
그 명령을 받은 다음에 아브라함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어요.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인지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잘못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가 여기 있는 것처럼 자신이 기만을 당했을 것이라고 믿도록 유혹을 받았습니다.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 결코 해보지 않았던 기도를 엎드려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인지, 만일에 그 번제로 드린다면 약 50년 전에 내 몸에서 날 자손이 하늘에 무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하는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 명령이 계속 귓전에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겁니다.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기도하다가 일어나서 자기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갑니다.
20세의 건장한 청년이 된 아들이 가슴이 벌렁벌렁하면서 심장이 벌떡이면서 깊이 잠을 자는 모습을 봅니다.
가슴이 떨려서 더 이상 아들을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가 자는 방으로 갑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아내가 곤하게 깊이 잠을 잡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이 명령을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이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그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아마도 하와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여보 일어나 봐.
하나님이 나한테 우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어.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아마도 당신 당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면 나 먼저 죽이고 그다음에 당신 아들을 바쳐야 하고 자기 아내가 그렇게 했을 것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나누고 싶은데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그렇게 표현했어요. 그는 칼이 그 여자의 아들의 생명을 끊을 때에 그것이 그 여자의 가슴을 찌르리라 하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그 몸을 간신히 가누고 뒷걸음질 쳐서 그 아내의 방을 나옵니다.
그리고는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낙위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안을 데리고 번죄를 들일 나무를 가지고 그리고 칼과 그 모든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일찍 집을 나섭니다.
자기 아내한테 아내한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서 번제를 드리고 오겠다고 그리고는 사흘 길을 갑니다.
하루 종 종일 아무 소리 안 하고 걸어갔습니다. 밤이 됐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갔으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종들하고 아들이 잠을 곤하게 자는데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 밤에 또 기도로 간절히 이 명령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이 명령을 순종을 해야 되는 것인지를 기도로 씨름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하는 혹여 그런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이틀 밤을 지냅니다.
그 밤이 얼마나 길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멀리 모리아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위에 둥실 주먹만한 구름이 둥실 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는 이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종에게 너희는 여기 있어라.
내가 아들과 함께 가서 번제를 드리고 돌아올 테니 여기서 하루를 머무르라고 그 두종들을 떼놓습니다.
그리고는 아들과 함께 둘이 걸어갑니다. 종들이 메고 왔던 그 번재했을 나무를 아들한테 지우고 본인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는 둘이 걸어갑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물어봅니다.
아버지 본죄를 드릴 드리기 위해서 나무도 있고 불도 있고 칼도 있는데, 번재들을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아브라함의 가슴이 덜컹합니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마음을 모아서 아들아 번제할 양은 바로 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또 길을 갑니다.
드디어 번제를 드릴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리고는 아들에게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아 3일 전에 하나님께서 밤에 나타나셔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여기까지 양위 없이 온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그 아들과 깊은 포옹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순종을, 순종의 역할을 잘 배웠던 아들 이삭이 그 120세 된 노인과 같은 아버지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지칠 대로 지친 그 아버지를 얼마든지 밀치고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순종을 배웠던 아들은 떨리는 그 아버지의 손을 도와서 오히려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아버지와 함께 번제단에 제물로 올라갑니다.
발가벗긴 채 재단 위에 누웠습니다. 그 시퍼렇게 제사를 드릴 때마다 사용했던 그 날카로운 칼을 아브라함이 손에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벌벌 떠는 손으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높이 올려 치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벌떡이는 그 20세의 건장한 아들의 심장을 향해서 그 칼을 힘껏 내리꽂았습니다.
그때 천사가 손을 딱 잡았습니다. 비록 천사가 손을 잡아서 아들을 찌르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그 아들을 이미 죽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혼자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보다가 이 아브라함에 관한 기사를 쭉 보다가 이 창세기 22장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좀 공부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냥 그 새벽에 혼자 펑펑 울게 됐어요.
한 3시간 이상을 목놓아서 울었습니다. 왜 제가 울었냐면 제가 어떻게 울었냐면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저희 큰아이가 고등학교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집을 떠나서 기숙사에 있었는데 만일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을 주셨다면 하나님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저는 제 손으로 제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제가 외친 외마디 이면에 제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은 하나님은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기 위해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손수 당신의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으셨습니다.
그날 저는 그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신 것이 하시기 위해서 어떤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는지 그날 저는 그 새벽에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울다가 울다가 제가 습관이 이 노트북을 가지고 성경과 성경을 가지고 혼자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있는데 그날 눈을 감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판을 두드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a4 용지로 빽빽하게 4 페이지를 썼어요.
그중에 일부를 여러분에게 좀 소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제 마음의 고백을 소개해 드린 이유는 그날 제가 저의 눈이 새롭게 뜨여졌고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그날 하나님께서 제게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서 어떤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는지를 그날 알게 해주셨고 저희의 신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목을 나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제가 정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에는 나의 아버지의 심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 심장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걸려 있고, 그 율법을 범한 자는 누구든지 죽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당하실 때 내가 지은 모든 법에 대한 책임까지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당신의 의를 제게 유산으로 남겨놓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분의 죽으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오거든, 그 유산을 내게 전해달라고 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가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의 유산인 의를 붙잡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나의 아버지, 나는 오늘도 나의 아버지인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가지셨던 그 사랑을 저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게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못난 자식임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내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 달라고 울며 애원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법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범한 아버지의 법 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법을 다시는 범치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는 다시는 나와 같은 불효자가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나의 아버지께서 주신 그분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가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는 내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롭게 된 것은
내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나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유산인 그분의 의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그 가슴 시린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그토록 사랑했듯이, 당신의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실 거라고 당신이 지금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지라도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당신도 나처럼 울게 되고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라고 여러분 이 저의 작은 간증 가운데에 담겨 있는 제가 나누고 싶은 내용이 이런 것들입니다.
십자가는 그저 단순히 하나님이 돌아가신 장소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님만 돌아가신 장소가 아닙니다.
시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가려운 다음에 거기에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아들이 죽어가는 그 모습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보시고, 아니 저는 그날 새벽에 자기의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은 그 아브라함이 다름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그날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제게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죽은 장소로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이심으로 당신의 의를 죄인인 저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유산이 바로 그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죄가 무엇인지를 제게 알게 해준 그런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내가 이제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그렇게 율법을 무시하거나 자행자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럴지라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기가 거듭났다고 의롭겠다고 구원받았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행위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랑을 경험하고 알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제가 제일 듣고 싶고 사랑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라고 하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끔찍스러운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이 무서운 시련이 아브라함에게 이른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를 보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너무도 위대한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신 그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복음이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실제로 체험된 실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잘 우리의 경험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이 너무 값싼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날 이후로 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의 사건을 제가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 가운데에는 십자가라고 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신약에는 있지만 그러나 단어가 없다고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은 구약의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창세기 20장의 사건을 구약의 십자가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하나님 밖에 아무도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하늘 아버지의 그 아픈 가슴을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아브라함에 대하여 뭐라고 표현했냐면 나의 벗이라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당한 그 아픈 경험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벗이라고 하는 의미가 뭡니까? 어릴 때부터 같이 그야말로 우리 표현으로 그냥 불알친구라고 그러지 어릴 때부터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벗이라고 부릅니다.
한마디 하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서로 금방 알 수 있는 사이 그렇게 가까운 것이 벗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르쳐 나의 벗이라 그는 하나님의 벗이었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아픈 가슴을 아브라함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여기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할 때 단순히 그저 피상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추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의 사랑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준다. 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을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생명을 지어준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그 지점이 어디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1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해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저는 이런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밑에 오랫동안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비쳐오는 빛에 노출시키고,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십자가에 달려 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십자가 밑에 오래 머물러 있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려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거기서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십자가 앞에 오랫동안 머무르시고, 그 십자가에서 하늘 아버지의 그 아픈 가슴,
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하신 그 하늘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경험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은 더 이상 피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으로 머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가시고 그 십자가를 더 높이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셔서, 그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명령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질지라도 순종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그런 귀한 삶을 모두가 살아가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님 오늘 이 조용한 아침 주님의 그 십자가에 사랑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성령께서 조용히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그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저희들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 깊은 사랑 알게 해주시고, 그 사랑에 잠겨서 그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 십자가에 달려 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또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하루를 살게 해 주시옵기를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아픈 고통을 당하신 우리 주님의 귀한 이름 의지하여 기도드립니다.
clovano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