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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강 침례, 죽음과 삶
침례의 의미
침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침례란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과 여러분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공개적으로 기어 시인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침례식 때 예수님은 순전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가 죽었음을 시인할 뿐 아니라 이제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 안에서 우리가 살게 되었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침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적으로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하는 시간입니다.
만일 침례가 교리 전체를 동의하고 교회에 입교하는 것에 그친다면 참으로 애석하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면,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이 모든 교리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교리가 신자들에게 도움과 보호가 될 것입니다. 구원을 올바로 이해한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으면 그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았고, 그분께서 알려 주고자 하시는 모든 것과 믿어야 할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 앞에 달구지를 놓는 일은 의외로 쉽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옆에 두고 함께 찾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눈 앞에서 죄가 되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습니다. '글쎄, 천국에 가서 오래오래 산다는 것 아닐까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생이 구원에 포함되어 있지만 구원이란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약에 구원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들의 죄에서from their sins.' 이 말은 '그들의 죄로부터 '우리말 성경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죄 있는 중에 in their sins'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해방
구원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 물어볼까요? 하늘에 갈 수 있느냐, 거기서 영원히 살 수 있느냐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별로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전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 잃어버린 의를 되찾을 수 있도록 문을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이 뜻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에 들어갑니다. 그 생명은 아들 안에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장 11~12절).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여러분은 그분의 생명을 지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의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약속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구원이 뜬구름 잡는 추상적 특권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랄지 궁금합니다. 사실 구원은 아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입니다. 영생은 현재적 실체입니다.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당연히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더 나아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오직 한 길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더 낫게 만들 다른 능력도 없습니다. 다른 이름도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장 12절). 구원받았다는 것은 '변화되었다', '의가 회복되었다. 실제로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삶이 주어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금 당장 하늘로 데려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거기는 완전한 이타심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오직 순수한 사랑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십자가의 강도에게 하늘에서 성장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대부분 사람에게 평생의 과업임을 아십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에서 읽은 가장 놀라운 말씀 중 하나는 에베소서에 있는 구절입니다. 나는 늘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에베소서중에도 3장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너비에 대하여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경 말씀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19절의 말씀을 봅시다. 얼마나 놀라운 구절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구절을 처음 읽고 나서 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말도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충만함'을 주시겠다고 제안하십니다. 여러분에게 고백컨대,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내게 보여 주신다면 나는 그 일부라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 충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사랑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용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얼마만큼의 용서가 들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세기에 많은 저서를 남긴 그리스도인 저술가 엘렌 화잇은 <살아남은 이들> 222페이지에 영감적이고 적절한 말씀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침착하였으나
이마에는 큰 땀방울이 맺혔다.
예수의 얼굴에서 흐르는 죽음의 땀방울을
측은히 여겨 씻어드리는 손이 없었고
그분의 인간적 마음을 위로하고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께서 홀로 그 포도즙 틀을 밟으실 때에
만민 중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다.
군사들이 그 무서운 일을 자행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가장 격심한 고민을 하시면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드린 이 기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곧 끝날까지 살 모든 죄인 하나까지 모두 품으신 기도였다.
우리가 그처럼 용서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마음에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능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기 계발 세미나나 상담 프로그램에 빠짐없이 참석해 본다 할지라도,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본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시도록 한다면 성령을 통하여 한순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2~4절, 강조 첨가)
하나님, 곧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생각은 지극히 고상해 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감정은 지극히 풍부해 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사랑은 지극히 심원해 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믿을 수 없는 고백과 회개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성경 말씀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마서 6장 11절)로 여기게 됩니다. 모든 증거가 정반대를 가리키는 상황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가 우리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죄의 힘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여러분 안에 있는 죄가 여러분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사실 영적인 세계에 들어와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이 본성적으로 육적인 사람들보다 끌어당기는 죄의 힘을 더 강렬하게 느낀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전에는 죄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고 신앙적인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들 안에 있는 죄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바라 볼 때 정죄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때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전에 죄로 인해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죄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들어온 후 그 법을 보니 나는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9~13절에 이것을 말했습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사실 바울은 율법이 그의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확대시켰습니다. 율법이 그의 죄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비교함으로 그가 얼마나 죄스러운지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속에서 죄로 기우는 성향과 죄로 끌어당기는 힘을 전혀 느끼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여러분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강렬하게 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울부짖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장 17절, 20절).
사도 바울은 "그것은 내가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제 속에 거하는 죄라니까요. 제가 아니라고요. 하나님! 제 안에 있는 죄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해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게 하셨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브리서 2장 1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로마서 8장 3절).
사천 년 동안이나 인류가 죄로 인해 연약해 진 이후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 사람의 몸을 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셨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내 평생 처음으로 죄란 결국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죄sin란 하나님을 배반하는 상태이며 그것이 육체적인 행동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이를 죄의 복수형태sins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장 27, 28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마가복음 7장 21, 22절).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지점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안에서 죄의 존재를 느끼지 않는다는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이것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지점에 이르러야 이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6장에서 대답을 줍니다. 6절에는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을 보면 이것 앞에 해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장 3~5절).
그 해답은 침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따라 주어집니다. 침례를 받을 때 어떤 이들은 자아, 곧 그들의 옛 본성이 죽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는 그 시점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면, 그때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속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심오한 의미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로 인해 주어지는 엄청난 유익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그 시점이 침례식으로 향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그분의 생명이 아무 제약 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도록 인도하는 것,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보도록 하는 것은 정말 위대한 과업입니다. 그런 수고를 통하여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처음부터 그토록 바라던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이 더 나아 보이도록 만들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더 개선시켜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여러분을 다시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행복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모두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용 복습
1. 침례를 받을 때 공개적으로 무엇을 선언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구원의 경험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2.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눈 앞에서 죄가 되셨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읽어 보십시오
4.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영생을 현재의 실체로 얻을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5장 11, 12절; 사도행전 4장 12절
5. 마음이 변화되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충만함을 지금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3장 14~19절; 베드로후서 1장 4절
6.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때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당기는 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로마서 7장 9~13절
8. 이번 장에서 육체적 행위 혹은 죄들을 가져오게 한 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로마서 6장 3~6절을 통해 침례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