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중고등 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한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필적할 만큼 근현대 과학과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영양부족의 胎生期부터 여든넷의 한평생을 살아본 나는 그 이론을 전혀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일제 통치하의 힘든 땅에서 고고지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온 해가 1941년, 칠흑의 야밤에 삯꾼의 등에 업혀 소위 38선을 넘어온 여섯 살과 용산의 어느 언덕(흥국사라는 절이 있었다)에서 동네 어른들 틈에 끼어 김일성과 소련, 중공의 뒷세력이 밀고 내려온 6.25 동란의 포화 불빛을 바라보던 그 가난한 유년기는 하루 두세 끼의 영양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다른 불만이나 불행은 축에도 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동족상잔의 처참한 석 달과 다음 해 1월의 雪寒氣에 남산 집터를 떠나 경상도 선산의 낙동강변 시골마을까지 피난이라는 凍死, 餓死, 病死의 고행 길 방황은 글이나 말로 참 여러 번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처절한 다섯 식구의 <死의 행군>이었으니까.
(지금 젊은이, 아이들은 6.25 남침을 '육점이오'나, '육백 이십오'로 읽던데, 이들이 國難이 뭔지, 전쟁과 사망의 참화가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중고등을 대구에서 살며 수학한 다음 종로구 낙산의 대학생이 된 후 눈여겨보며 킥킥거리던 여학생들의 다리가 지금처럼 곧고 예쁘지 않다고 철없는 평판을 입에 담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아마도 내가 4,50대 중년이 되었던 때에는 거의 모든 가정의 母女가 함께 서있는 모습을 보면 다 딸의 키가 더 크고 어머니는 작았다.
웬만큼 먹일 수 있는 세상 형편의 차이에 따라.
진화론을 꺼낸 까닭은 이 말 한마디를 위한 것이었다.
신통한 것은 딸들이 엄마 보다 더 큰 키를 갖게 된 시절도 잠시 지나 지금은 거의 모든 모녀 또한 같은 키, 시원한 체격들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화론의 명료한 증거가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앞으로 넉넉 잡아 30-40년 후에는 자연진화를 넘어 유전자 분석과 조작의 인위적 처치를 거쳐 서로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미녀, 미남과 평균수명 200-300세와 화성 이주의 일상적 우주생활의 세상으로 건너가게 될 수도 있겠지.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수단 방법을 모두 도모하여 100壽를 넉넉히 넘기시기 바랍니다. ㅎㅎ.
당면한 반역의 무리들을 말끔히 잡아 가두고 세상을 얼마간 바로 잡은 후에.
부디 큰 아픔 없이 건강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하여 축원합니다.
세강
2025년 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