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몸 들여다보기
온깍지궁사회 현곡(顯鵠)
우리 활터에는 특별히 활터에서만 쓰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깍지손, 줌손, 죽머리, 중구미, 반바닥, 회목, 범아귀, 하삼지, 등힘, 불거름, 분문 등의 말 등은 활터에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또 활에 관한 고유어도 참 상세하게 많습니다. 줌통, 대림끝, 밭은오금, 한오금, 먼오금, 삼삼이, 정탈목, 창밑, 도고자, 냥냥고자 등 세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활터에서 사람의 신체와 각궁의 각 부분에 대한 고유어가 많다는 것은 결코 한 두 세대가 아니라 수많은 세대에 걸쳐서 경험이 누적되어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정 분야에 언어가 많다는 것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 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雪)에 관한 수십 가지의 표현을 사용하며, 태평양의 섬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바다 색깔에 관해서 수십 가지의 표현을 사용한답니다. 서양의 양궁이 과녁에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려서 세분화하는 것과는 비교되게 우리는 과녁에 대해서는 단지 정곡에 맞는가, 변에 맞는가만을 구분할 뿐입니다. 과녁을 세분화하는 대신에 우리는 쏘는 사람의 신체에 더 주목하여 신체에 관한 많은 활터만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활을 쏘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었는가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활쏘기는 쉽지 않은 무예이고 평생을 수련해도 그 끝에 도달할지 장담할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나 날씨 등 자연환경의 영향이나 활의 구조와 성능 등의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활을 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에 관한 탐구와 수련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활쏘기를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무술마다 각기 발차기나 주먹지르기 등 기본 동작들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동작을 ‘잘 한다’라고 하면 그것은 단지 그 동작에 파괴력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의식하든 안하든, 그 동작이 인체의 뼈와 근육과 힘줄의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활을 ‘잘 쏘려고’ 공부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업은 애기 삼년 찾듯이’ 과녁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제 몸 삐뚤어진 줄 모른다면, 비록 과녁에 맞는다고 해도 오래갈 수 없을뿐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활쏘기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한 동작이지만 한순간에 온몸을 두루 살피고 정신을 집중하는 과정을 걸쳐야합니다. 과녁을 바라만 봐도 몸이 알아서 절로 반응하는 문자 그대로 신궁(神弓)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잊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중심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작한 상태에서 과녁만 보이는 것이 활쏘기의 시작이고 차츰 줌손과 깍지손이 보이기 시작하며 어깨와 가슴 그리고 발이 그려집니다. 그러다가 호흡과 기운이 점점 가라앉아 몸의 중심이 의식되고 몸의 중심으로써 활을 낼 수 있게 됩니다. 몸과 정신이 그 중심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이 천지간에 바로 서있다'(이자윤명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심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신마저도 잊는 경계'(정진명접장)가 열릴 것입니다. 자신마저 비우면 다시 본래의 과녁이 보이는데 그것은 처음에 활을 시작할 때 보았던 과녁과 같지만 전혀 다를 것입니다.(여러 궁사들의 특이체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