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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이 주 혁
지난 4월 21일 토요일, 하버드 대학 영어학과 4년 차 여학생이 자기 기숙사 방에서 목매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들어 보스턴 지역에서만 5번째이며, 전국에서 대학생 자살이 매년 1,1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두루 아시는바, 학생이면 참으로, 누구나 꿈에 그리는 명문 대학이다. 이렇듯 유명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지만, 그들의 자신감, 우월감, 행복감은 잠시뿐이다. 가장 우수한 학생들 틈에 끼어서, 고등학교 시절에 최고였던 자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 본다. 결국,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강박감을 견디다 못해 심한 우울증과 싸우다가, 끝내는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처럼 일류대학 재학생이나 졸업자들이 자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즉,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가 없어지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고 생각하며 극적인 자기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 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대상이나 사회를 향하여 극단적인 자기표현을 하려는 행동. 아니면, 자괴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고 미워하며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마지막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누군가가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실한 미소 한 번 던져 주었다면…. 포근히 감싸 안아주고 존재의 의미나 가치를 떠오르게 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줄 수만 있었다면, 고귀한 생명은 꺾이지 않고 새로운 싹을 피웠으련만…….
문득, 아찔하던 순간이 가슴에 메어왔다. 1964년 ROTC〔학군단〕로 통역장교 훈련을 받던 부관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대학 졸업과 함께 화려한 임관식을 마치고, 경북 영천에 있는 부관학교에서 일선으로 배치되기 전, 3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한 내무반에 20명씩 배치되고 6시에 기상하여 구보로부터 시작한다. 여러 가지 힘든 체력 훈련을 받고, 8시간 동안 영어회화 및 군사영어를 공부한 뒤, 다시 저녁 훈련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더하여, 전국 각 대학에서 영어라면 최고라고 자랑하는 장교들로 구성된 부관학교의 과정은 나에게는 몹시도 힘겨웠다. 영어 시험에 합격하여 통역 장교의 보직을 받기는 했지만, 약학 과정을 이수하며 틈틈이 익힌 실력이다 보니, 영어를 전공한 그들과는 실력 면에서, 특히 영어회화에 관해서만은 그들한테 많이 뒤처졌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졸업까지 줄곧 상위권을 누려온 자존심이 나를 죄어왔다.
돌아보면,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진 돈 없이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상경하여, 하루하루의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숨 가쁘게 헐떡이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었다. 하루가 25시간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나누고, 분을 쪼개며, 한 올 두 올 틈틈이 엮어 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고, 이해하여 주는 친구들이 함께한다는 생각만이 위안이 되던 때었다. 〈〈신념의 마술〉〉이라는 책 한 권에 매료되어, ‘할 수 있다’라는 신념 하나로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어내며, 불가능 속에서도 자신감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사정이 달랐다. 공부라면 끝까지 버텨 볼 수 있으련만, 허약한 체질에 아침저녁의 훈련은 체력의 한계에 마지막 선을 넘고 있었다, 10시면 불을 꺼야 하는 내무반의 규정은, 그나마 단어 하나라도 더 암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되어 나를 옥죄어 왔다. 식욕은 떨어지고, 남과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골뱅이처럼 자기 껍데기 속으로 조금씩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를 지탱하여 주었던 ‘할 수 있다’라는 신념과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 대학에서 뽑혀 왔으므로, 내무반 안에 나를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를 내 세울만한 어떤 환경도, 지푸라기만 한 끄나풀도 나에게는 없었다. 나를 긍정시키면서, 열심히만 하면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열심을 낼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가로막았다. 무거운 어둠의 그림자가 나를 서서히 삼켜가고 있었다. 좌절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주던, ‘내’가 허물어져 감을 느꼈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닌, 나약한 인간의 ‘신념’에 의지했던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하현달의 희끄무레한 빛이 어두운 강을 건너는 길손인 양 무겁게 느껴지던 한밤중, 불침번(不寢番)을 서고 있었다. 3월의 싸늘함이 어둠과 더불어 무섭게 덮쳐왔다. 막사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차디찬 총구멍을 턱밑으로 밀었다. 차갑고 둔탁한 금속성 감촉에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마지막, 남아 있지도 않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아쇠에 얹어진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왜’라는 이유가 분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당기고 싶었다.
그때, 번쩍!
‘y=ax+b’이라는 일차 방정식이 엉뚱하게 떠올랐다. ‘사실 아래 내용이 일반 독자님들께는 다소 복잡하게 들릴 테지만, 하여간 슬럼프에서 나를 구해준 방정식이었으니… .’ ‘y 축에 b라는 절댓값이 현재의 나의 가치구나! 나의 ‘환경’, 지금까지 이루어온 나의 ‘삶의 합’이 바로 나의 ‘절대 수치’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의 ‘절댓값’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좋은 부모, 환경, 학교 그리고 우수한 성적이라면, x 축의 어느 시간대에서는, 훨씬 높은 수치로 출발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고, 이 모든 것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금은 만들어 낼 수 없는 눈높이다. ‘그 시간대에서 이 ‘절댓값’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 나의 착각이다.’ 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눈앞에 도표가 섬광같이 지나갔다.
그 기울기 ‘a’를 높여서, ‘x 축’의 시간이 갈수록, ‘y 축에’ 그 총합의 결과가 나아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만이,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음성이 아련히 들렸다.
이렇게, ‘기울기를 계속 높여가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그들보다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생겼다. ‘그들도 기울기를 계속 높이며 살아간다면, 당연히 그들은 나보다 더 우수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나니, 너그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며 후련히 긴장이 풀렸다.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얼음 조각처럼 싸늘하던 조각달이 구름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왠지 따스하게 느껴졌다.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서서, 묵직한 M1 총을 어깨에 걸러 메었다. 싸늘한 오른손 검지를 바라보니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살았다! 이젠 살았어!”
스펑나무(spung tree) 뿌리
이 주 혁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갈기갈기 찢어져서 수많은 다리를 가진 커다란 괴물 같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거인이 큰 다리를 뻗고 성벽에 걸터앉은 것도 같다. 거대한 기중기로 성벽을 몽땅 들어 올리려는 듯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 웅장한 나무. ‘타 프롬(Ta Prohm)’ 사원 안에 있는 거목. 바로 ‘스펑나무’다.
이곳 스펑나무를 소개하자면, 우선 이 사원의 내력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이 사원은 12세기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캄보디아(Cambodia)의 위대한 조상, '크메르(Khmer)' 족의 유산으로,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에 있다. ‘앙코르(Angkor)'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하여 건축한 사원으로 규모는 주1 ‘앙코르 와트(Angkor Wat)'에 버금가는 건축물이다. 당시 수도승과 더불어 12,500여 명이 사원 안에 기거했고, 물자 조달과 건물 유지를 위해 인근에 80,000여 명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왕의 위세도 위세이지만, 이로써도, 아니 가본 분들도 사원의 규모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리라.
하나의 무게가 300kg이 넘는 돌을 그렇듯 수없이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탑을 건립하였다. 벽마다 기둥마다 빈틈없이 각종 조각(彫刻)으로 형상(形象)된, 이 거대한 작품이 단지 5년여 만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자니, 저 애먼 백성들!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까?
이 중에 내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건물의 돌 틈을 파고들며 자라난 ‘스펑나무’다. 일명 ‘카폭(kapok)’이라고도 부르는 나무의 기괴한 장면이다. 이 나무는 본디 멕시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며 나무 높이[樹高]가 60∼70m에 가슴높이[胸高]의 지름은 3m까지 굵어지는 그야말로 하늘을 뒤덮는 큰 나무이다. 그러한 나무가, 본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정착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양토(壤土)가 아닌, 성곽의 그 거대한 암벽 틈새를 비집고 그토록 장구한 세월 동안 자랐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건 숫제 수수께끼이며 기적에 가깝지 않은가!
1860년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자연학자인, ‘앙리모우’가, 앙코르 주변의 캄보디아 정글 속에 묻혀있는 옛 크메르 문명의 유적지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사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시 고고학자들은 장차 사원의 손상을 염려해서라도 그 나무들을 그 후에 제거했어야 옳았을 터인데…….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토록 장구한 세월 동안 숨겨져 있던 사원을 발견했다는 증거. 그 자체를 중시하여 일부러 베지 않고 내버려 두었단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탁견(卓見)이 빛났다. 사실 관광객들은 ‘타 프롬 사원’ 자체뿐만 아니라 그 나무들을 보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에서 모여드는 편이니!
이것이 마음대로 자라면서, 겉 뿌리 하나가 족히 한 아름이 넘는 굵은 나무로 변하며, 벽면을 타고 내려와 바닥까지 파고 들어간 채 버티고 섰다. 벽과 건물의 돌 틈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간 뿌리와 줄기는 금이 생긴, 벽의 형상과 돌벽 사이로 파고들며 육중한 담벼락 자체를 뒤덮었다. 이렇듯, 인간이 이루어 놓은, 앙코르 제국의 위대하고 완벽한 건축물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무참하리만치 짓밟고 통째로 삼켜버리려는 듯싶다. 그것은 우리네 인간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힘이다.
어쩌면, 한 군주가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갈고 닦아 쌓아 올린 무수한 돌 벽돌 한 장 한 장이지만, 그 속에 스며있는, 수십만 일꾼의 허기진 땀. 채찍에 맞아 엉겨진 피. 이를 먹고 자란 나무가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과 억울한 죽음을 들추어내려는가! 갈퀴 같이 엉킨 뿌리로 돌벽을 휘어잡은 ‘꿈틀거림’ 속에서, “아빠!”, “엄마!”하고 외치는 허기진 목소리. 목숨 줄을 놓으며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찾던 가냘픈 신음. 귓전에 스치는 스산한 바람 소리가 괴괴하게 느껴진다.
나는, 스펑나무 그 억센 뿌리 하나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사원의 돌 벽돌 틈에 떨어진 홀씨는 바람에 쌓인 흙먼지 속에서 겨우 싹을 내고, 천신만고로 돌쩌귀 틈으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의 모든 악조건을 견디고 이겨내며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해 왔을 것이다. 폭우가 쏟아져 땅을 흠뻑 적실 때도 돌 틈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로 해갈하며 아쉬움을 달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면서 수백 년 동안 거대한 작품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구불텅구불텅 뻗어진 나무뿌리를 바라보노라니, 이번엔 느닷없이 힘겨웠던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이 기억 속에 스멀스멀 피어난다. 나는, 18살일 적에 당시 39세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이른바,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을 돌보고자 진학을 포기하고 그냥 시골에 머물러있었더라면, 숲속의 작은 나무처럼 그저 왜소하게 자라났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꿈을 품고 서울이라는 곳에 건곤일척(乾坤一擲) 내 한 몸을 씨앗으로 던졌다. 분침, 초침 따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마다 뿌리를 내려 보며, 기고 엉기면서 살아남으려 애썼다. 다들 가는 대학. ‘그때는 다들 그렇게 고생하며 졸업했다’고 남들은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혼혈을 다 한, 삶과 투쟁의 현장이었다. 눈을 들어 옆을 보면 흘러넘치는 것들도 많은데, 나에게는 어찌 그리도 부족한 것뿐이었는지……. 내 팔다리는 멀쩡해 보여도 머릿속의 뇌세포들은 저 뿌리처럼 꼬이고 단단해져서, 무엇이든지 견디어 내고, 움켜잡을 수 있는 강인한 것들로 변했는지 모른다.
내 나이 칠십. 인제 보니 정말이지 스펑나무는 자연이 만든 대형 분재이고, 나는 인간이 만든 소형 분재가 아닌가. 대체로 분재 애호가들은 좋은 흙 대신에 자양분이 거의 없는 마사토(磨砂土)나 암석(巖石)을, 애지중지하는 자신의 분재 발치에 넣는다고 한다. 뿌리는 그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여 뿌리를 뻗고자 자신의 실뿌리에서 암석을 녹이는 물질을 내어놓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거대하고 두려움까지 자아내는 스펑나무는 강력한 용암 물질을 얼마나 많이 실뿌리를 통해 내놓았을까? 또한, 나를 사랑하는 신은 얼마나 나를 아꼈기에 세상 암벽을 뚫을 수 있는 강인한 신경 뿌리를 내리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한 시대를 떵떵했던 ‘자야바르만 7세’의 위업도 자연에 비하면 대단한 게 못 되는 듯싶다. 고고학자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명소’로 꼽을 만큼 대단한 사원이지만, 이 사원의 축대벽마저도 헤집고 온통 뒤덮어버린 스펑나무야 말로 위대한 자연의 힘인 것을.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이 ‘성업(聖業)의 산물(産物)’로 여기는 성전(聖殿)마저도 장구한 세월 동안 서서히 아주 서서히 허물어버리는 스펑나무. 그런 까닭에 이러한 ‘허물어짐의 장관’을 보기 위하여 세계 곳곳에서 밀물처럼 관광객이 몰려온다. 엄청난 파괴가 오히려 최고의 예술품이 되었다. 바닥까지 파괴된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어내는 삶도 결국 자연에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성문을 나서려다, 이번엔 또 다른 광경에 흠칫 놀랐다. 인간의 걸작을 여지없이 지배하고 무력화하는 파괴자 내지는 정복자로만 보았던 스펑나무가 거대한 암석 벽과 공존동생(共存同生) 하며 조화를 이루는 광경에 눈길이 멎었다. 수천 년 동안 요리조리 파고든, 악어 껍질처럼 거친 뿌리는 갈기갈기 담벼락의 돌 벽돌들을 움켜잡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뿌리는 담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돌들과 하나 되어 그 벽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마치, 콘크리트 속 철근과 같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지탱해주고 사랑해 주는 어떤 귀한 존재감을 함께 느끼는 순간이다.
문득, 눈물로 범벅된 나의 ‘시련의 삶’, ‘파괴의 삶’. 이런 삶을 내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 보려고 발버둥 치며, 살벌한 ‘경쟁’ 속에서 무너뜨리고 이기는 것만이 능사였던 젊은 날의 삶을 뒤돌아본다. 그러나 서로서로 굳건히 붙들고 함께 살아가는 온전한 삶. ‘공생’과 ‘상생’의 삶이 있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싶어, 엄숙한 자연 앞에 부끄럽기만 하다.
엉켜져 있는 굵은 뿌리 위에 나의 두 다리를 얹고, 함께 간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사진 한 장 부탁하여 본다. 그는 내 간절한 속마음을 알기나 할까?
註1 앙코르 와트(Angkor Wat): 캄보디아의 앙코르(Angkor)에 있는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자야바르만(Jayavarman) 2세에 의해, 옛 크메르(Khmer) 제국의 도성으로 건축된 사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
" 주혁아 ! 행복에 젖은 주혁이 부부가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구나. 삶의 끝자락에 서서 포기하고픈 생각이 한 두번 쯔음은 맞닥들이지 않았을까. 너와 나 동기들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그 분 하느님도 어쩌면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오늘날의 인간들의 갖은 부패 부정 위법 탈법 범법이 지구 곳곳에 판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그분의 속마음은 어떨까. 흙으로 빚은 아담과 그의 일부분을 떼어내어 이브를 탄생시킴 자체를 늦게나마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더냐. 머언 훗날 우리들의 후손들은 오염원인 지구를 탈출하는 그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미세먼지가 휘젓고 있는 지구이건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보다는 천혜의 요새가 아닌가. 황혼의 끝자락에 서서도 태평양 너울을 넘나들며 동기들과 채팅을 수시로 할 수 있으매 행복한 노객들이 아니랴.
주혁아 ! 성대약대 12회 동기들아 !
앞으로 33년 3개월 3주는 더 동기들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지 않으련가. "
2019년 3월 21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