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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족과 이웃 전도의 달☜
*마12:39).....악하고 음란한 세대.....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딤전4:5) 계1:1-5절) 묵시의 시작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서 시청자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던 역사드라마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극들은 워낙 규모가 크고 긴 시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하드라마*라고 말합니다. 이런 대하드라마 중에는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거의 픽션에 가까운 작품도 있지만, 세종대왕이라든지 왕건 같은 왕궁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역사들은 일단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먼 과거의 일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궁중 안의 권력 다툼이나 암투같은 것을 훤하게 꿰뚫어 볼 수 있고, 또 등장인물이 아주 많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재미까지 있어서 많은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요한 계시록은 거대한 하나의 드라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외딴섬에서 보았던 이 묵시는 초창기 기독교가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 속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을 드라마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의 음모라든지, 혹은 기독교인이 당해야 했던 어려움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의 묵시록은 때때로 이 지상의 범위를 벗어나 *천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와 사탄 사이의 세력 갈등과 대립까지* 보여주면서 앞으로 이 세상에 실현될 하나님의 새로운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요한 계시록에 대하여 어려워하는 이유는 계시록에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많은 상징(象徵)이나 숫자가 등장하고, 또 괴상한 짐승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 드라마에서는 용이라든지, 특별한 짐승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현대에도 판타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들을 보면, 하늘을 나는 용이 나타나서 입으로 불을 뿜는 것은 기본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상한 괴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일종의 *판타지(fantasy)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 자체는 결코 판타지(fantasy)가 아닌 실제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요한계시록을 사랑해서 많이 연구도 하고, 강단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산에 올라가서 오직 계시록만 연구(硏究)하고 내려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이단(異端)들,특히 신천지는 대구에 3만 7천여명을 입교하고 온라인과 유튜브채널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억지로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목회자 1.200명 신천지와 교류 기독신문 제공)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몇 가지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속히 될 일*을 기록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시켜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떤 핍박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일어났던 핍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나중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실제로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요한계시록을 현대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은 앞으로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싸우는 3차 세계대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666*이라는 숫자는 상품 거래할 때, 사용하는 바코드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셋째는 요한계시록을 초대교회 당시에 진행 중이던 여러 일들을 드라마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진행이 되어서 결국 최종적으로 사탄(詐誕)의 세력은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되어 질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드라마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앞에는 일곱 교회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일곱 인봉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드라마의 뼈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의 뼈대 사이에 중간 중간 막간 드라마가 나오는데, 사실은 중간에 나오는 막간 드라마가 더욱 중요한 메시지일 때가 많습니다.
*묵시(默示)*라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유행했던 문학 형태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민족이나 불신앙의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너무나 답답하고 힘든 나머지, 환상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혹은 이런 글들을 남겼는데, 이런 것들을 묵시(默示)라고 말합니다.
대개 이런 묵시(默示)들은 익명으로 되어 있어서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내용도 황당한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善)과 악(惡)이 싸워서 선(善)이 이긴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계시의 내용을 묵시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이 일반 묵시(默示)의 글들과 다른 이유는 저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고, 또 내용이 허황된 내용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썼을 때는 로마가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일 때였습니다. 로마는 유대교에 대해서는 관대하다가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그 이유는 아마 오순절 이후에 기독교가 너무 급속하게 로마에 확산되는 것에 대하여 황제가 겁을 먹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로 황제 때는 이미 로마에도 많은 신자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황실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주 연로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직속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게 되니까(전설에 의하면 끓는 기름 가마에 요한을 넣었다고 하기도 함)
요한을 다른 신자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서 밧모라는 섬에 유배(流配)를 보내었다고 합니다. 일설(一說)에는 밧모에는 탄광촌이 있어서 요한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을 것이라고 하지만, 늙은 사도가 밧모에서 탄광 일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로마 당국은 이 늙은 사도를 사랑하는 성도들로부터 강제로 격려된 그 자체만 해도 충분히 교회에 대하여 억압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배(流配)되어 있는 요한에게 새롭고 놀라운 말씀을 드라마처럼 보여주셔서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심으로 교회가 더욱 힘을 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Ⅰ.가장 복된 자들(상)
아마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복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본 다면, 대개는 가장 잘사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라든지, 혹은 대기업에 다니거나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인들은 복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곧 그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대로 모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여기서 *계시(啓示)*라는 것은 *묵시(默示)*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언(預言)*이라고 하면, 앞으로 되어 질 것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영감(靈感)을 받아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언 중에는 환상(幻想)의 형태도 있지만, 거의 대개는 언어(言語)의 수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묵시(默示)*라는 것은 주로 눈으로 보이는 *비주얼(visual)*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묵시(默示)*라는 말은 연극할 때, 무대에서 가려져 있는 것을 치워서 그 안에 있는 실체를 드러나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대에 큰 막이 쳐져 있어서 일반 관객들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단지 무대 뒤에는 연출(演出)자나 연극에 관계하는 사람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연극을 준비하고, 일반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서 연극이 시작하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다가 무대의 막이 오르게 되었을 때, 관객들은 드디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감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救援)계획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막을 치셔서 일반인들은 일체 하나님의 드라마를 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하나님은 무대 막을 올리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던져놓으시고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실제로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감독(監督)하고 계시며, 연출(演出)하고 계신 감독(監督)인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지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진행 중인 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게 하신 것은 지나간 먼 과거의 일이나 혹은 다가올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그 당시에 진행 중이면서도 앞으로 되어 질 일들에 대하여 드라마 형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상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상당히 판타지(fantasy)의 성격을 가진 묵시(默示)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른 성경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것이지만, 요한계시록만은 천사들을 보내어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시각적(비주얼한)방법을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각적 방법을 많이 쓰신 것은 이제 되어진 일들에 대하여 이 정도로 모든 것이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 당국을 의식해서 검열(檢閱)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사도 요한이 직접적으로 로마 정부를 비판하면, 보복을 당할 수 있지만,*666*이라든지
*짐승*이라고 하면, 꼭 로마를 비판한다고 집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그 종들에게*란 누구를 말할까?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목회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키는 그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용기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1:3절)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 교회가 모여서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 교회는 요즘 같은 교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요즘은 교회라고 할 때, 독립된 건물(建物)이 있고, 그 안에 교회를 맡은 성직자들이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교회는 가정(家庭) 같은데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아는 자들이 많지 않아 교인들 중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일어나서 성경 말씀을 큰 소리로 읽습니다.
그러면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그 읽는 말씀을 듣고 나서 읽은 사람이나 혹은 가르칠 수 있는 은사(恩師)를 가진 사람이 그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훈으로 가르친 후에 성도들은 그 말씀대로 살기로 굳게 결심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글을 읽을 수 있고, 또 자기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기독교인들이 개인 성경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두루마리 성경책을 예배로 모이는 곳에 두고, 주일마다 모여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부터 주님의 교훈을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려운 시기에 교인들을 향하여 굳게 교회를 지켜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지키는 것을 계속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교회에 주신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일차적 책임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맡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책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3:1-2절)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은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맡은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고전4:1-2절)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맡겨놓으셨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지킨다는 것은 이 비밀(祕密)의 두루마리를 창고 저 깊은 곳에 두고 보관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우리가 매일 그 말씀을 읽고 또 들으며, 그 말씀을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교회에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교회에 맡겨졌다는 것은 이 말씀의 선포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말씀을 은닉(隱匿)하고 숨기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면, 세상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의 복을 이 세상에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계속 선포하는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고, 또 말씀으로 인한 핍박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변함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고 은혜를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복만 가지고 자기들은 성공했다고 자랑하지만, 진짜 복받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하늘의 복을 오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과 같다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우리 같은 질그릇 안에 담긴 가장 귀한 보화와 같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보물(寶物)들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이 말씀은 천사들에게도 맡기지 않은 귀한 보물(寶物)입니다. 교회(공동체)의 가장 귀한 사명은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비밀(祕密)을 읽고, 묵상(默想)하고, 선포하는 중에 밝히고, 이 세상에 선포(宣布)하는 이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킬 때, 하나님의 복이 먼저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교인들이 세상이 악해지고 날로 핍박이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찬송가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알림(2)
1-4월 보고서 댓글 또는 교갱원 이메일로 받습니다. 선교 사역에 소통으로 적극 동참합시다. 5월부터 주일은 요한계시록과, 평일은 신구약 한 편을 상.중.하로 용량만큼 나눠 공급하는데, 거르면 그 내용을 몰라 손해입니다.(재 발급은 없고. 제목에 5/0 X 0로 표합니다.)
다음 날 계속 ⇨ 오늘 5월 7일 주일 예배
매일 새벽(夏)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진리의 복음💖
†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심방(尋訪) 및 궁금한 내용 문의 ☞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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