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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해외에 대거 거주하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 후발 자본주의국가로서 식민지를 건설하여 대제국을 꿈꾸던 일본 정부의 식민정책이 그 이유일 것이다. 온갖 달콤한 홍보와 유혹으로 자국민들을 내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패전을 맞이할 때 일본 정부는 해외 자국민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본토에 돌아오지 마라’ ‘현지에서 최대한 버텨라’ 이었다.
연합군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1945년 8월 14일, 일본 외무성은 해외공관에 긴급지침을 내린다. 현지에 있는 일본인의 신변과 재산을 최대한 보호하되, 가급적 현지에 잔류하도록 유도하라는 내용이다. 열흘 뒤 작성된 내무성의 문서를 보면, 조선, 타이완, 사할린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은, 선박 조달의 어려움과 본토의 식량, 주택, 일자리 등의 부족 문제를 고려해 가능한 현지에 잔류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즉, 본토의 사회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해외 일본인들은 본토에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일본 본토의 생산시설 파괴와 주택 소실, 식민지로부터의 농산물 수입 중단 등으로 약 6500만 명의 본토인도 기본생활이 어려운데, 약 700만 명의 해외 일본인까지 한꺼번에 들어온다면 큰 재앙이 될 것이 뻔하다.
외무성의 긴급지침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큰 고민에 빠진다. 이미 치안은 무너지고 일본인들의 동요도 심각하다. 아베 총독은 우선 외무성의 지침을 이행하다가 발생하는 모든 사태는 본토 중앙행정부의 책임이라는 문서를 보낸다. 그리고 여운형 안재홍 등에게 많은 부문의 행정 실권을 내어주면서 조선인에 대한 치안을 맡긴다. 이 조치는 무관 출신 강경파 일본인들의 심한 반감을 산다. 총독부와 조선주둔군 간의 알력이 심각해진다.
은행인출 사태를 직면한 총독부는 본토의 대장성과 상의하여 8월 22일 대량의 조선화폐권을 극비에 공수해온다. 총독부는 곧 진주할 연합군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법도 논의한다. 연합군을 위한 유곽을 설치하고, 일반 부녀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접대부를 대거 모집한다. 통역사도 수배한다.
세화회도 조직된다. 애초에는 조선에 잔류하는 일본인들을 지원하려는 의도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사령부가 일본인 전원 본국 송환으로 결론 내리자 일본인의 송환을 돕는 단체로 바뀐다.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귀국하면서 총독부나 지방 행정부에 항의와 함께 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총독부는 조선근로동원원호회라는 단체를 이용한다. 이 단체는 원래 조선인을 징용하는 단체였으나, 전세가 바뀌면서 귀국 징용자들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에 잔류하기를 희망하는 일본인들은 그동안 금지했던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새로 개설된 조선어 강습소로 몰려든다. 주로 YMCA에서 담당한다. 게다가 미군정은 9월 24일부터 모든 학교 수업은 조선어로만 진행하게 한다니 더욱 필요하다.
항복 방송 이후 도망가느라 혼란스러웠던 며칠이 지나자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이제 귀국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조선에 남아서 정착할 건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인천항을 예로 들어보자.
인천항은 러일전쟁 이후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업단지와 엄청난 물동량을 감당하는 항만 시설을 갖추면서 경성 다음으로 발전한다. 많은 일본인들이 초창기부터 인천항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급하게 가재도구를 팔고 예금 인출을 하던 일본인들은 곧 연합군인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불안감을 가진다.
인천부윤(=시장)은 원로 지도자들과 논의를 하면서 미군을 위한 위안소를 설치하자고 제안하다가 특히 부녀자들에게서 큰 비난을 받는다. 다행히 미군들은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미군이 진주하고 질서를 잡자, 도망 하려던 일본인들이 서서히 눌러앉을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인천세화회도 일본인들의 조선잔류를 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아동을 위한 임시학교를 준비하고, 중고등생을 위한 영어교육도 구상한다. 나중에는 미군과 상의하여 일본인학교와 일본인병원도 개설하는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귀환파들은 자신들의 귀환을 돕지는 않고 잔류만 유도한다고 노골적인 반발을 한다.
이런 다툼도 얼마 가지 못한다. 한달 정도 지나자 미군정에서 조선일본인들에 대한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속속 발표된다. 일본 군인을 위시하여 모든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나야 하며, 미군정의 집단 송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잔류를 희망하던 일본인들도 이제는 그들의 재산과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해진다.
12월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가시이 겐타로, 오이케 다다스케, 하자마 후사타로 등 부산 경남 지역 최고 재력가 3명이 밀항선을 타려다가 붙들린거다. 이들은 자전거 튜브에 거액의 주식, 채권, 보험증권 들을 숨겨 나가려고 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배로 가는 수 밖에 없다. 미군정이 지정하는 순서를 기다려야 하나 송환선으로 쓸만한 선박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진다. 11월 중순에 들어 미해군 선박을 추가로 투입하면서 부터 민간인들의 송환이 차츰 시작된다. 그게 싫으면 밀선이라 불리는 배를 구해 밀항하는 수 밖에 없다
일본으로 가는 가장 좋은 출발지인 경남 해안에는 수많은 밀선들이 성황을 이룬다. ‘하카다 150엔’ 이런 간판까지 걸고 있다. 세화회에서는 밀선 정보도 알려준다. 그러나 밀선은 안전하지 못하고 사기 당할 수도 있다. 전염병에 걸리기도 하고 보따리를 빼앗기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내려주기도 한다. 종종 침몰하기도 한다. 그래도 밀선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출발할 수 있고 짐 검사를 하기 않기 때문이다. 갈 때는 일본인을 태우고 올 때는 귀국하는 조선인이나 밀수품을 싣고 온다. 이걸 노리고 해적까지 등장한다.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으로 송환된 민간인은 약 72만 명, 군인 약 21만 명이나, 비공식적인 밀선을 이용한 자는 약 19만 명으로 추정한다. 엄청난 숫자다.
한편 불법적으로 재산을 처분하려는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난다. 회사 제품이나 원자재를 몰래 내다 팔거나, 현금을 가져나가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10월 동양방직 회사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면포를 암시장에 처분하여 그 돈을 일본으로 빼돌린 사건이 대표적이다. 니시마쓰구미라는 토목회사는 회사 장부를 조작하여 빼돌린 거금으로 일본인 간부들을 밀항시키고 공범인 조선인 직원 일행은 착복한 차액으로 곡물을 밀매하다 붙들린다. 생산과 물류의 마비로 식량과 기본 생활용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모두가 힘들 때이다.
경성에 아직 잔류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추방을 촉구하는 조선인들의 움직임이 드세진다. 끝까지 남아서 재산 처분을 하려던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더욱 강압적인 조치로 결국 빈손으로 송환선을 탄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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