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9일 사순 1주간 목요일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열아홉 살 때의 기도
어느 누구든지 살면서 방황을 해본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방황이 없다면 인생의 참맛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할 때나 크고 작은 패배감으로 인생의 어려움에 봉착할 때 우리는 힘들어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때로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누구를 잡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이 적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리게 됩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서 잠시 피아노 회사의 목공부에 들어가서 대패질도 하고, 호마이카 칠 하는 것을 배우고, 얇게 합판을 오려내는 일을 하면서 작업장 선배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하고 때로는 기합도 받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서 나는 참 복이 많은지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 회사에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은 때였는데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대패와 창칼을 숫돌에다 갈기도 하고 정말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렸는데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끌로 구멍을 파고 아교를 녹여 원목을 붙이면서 내 인생도 이 아교처럼 붙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수없이 결심하였습니다. 일당 120원을 받으면 한 달이면 약 3,000원의 수입이 되었는데 그 돈으로 책을 사서 밤에 공부하고 학비를 위해 조금씩 저축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매일 파김치가 되어서 한 방에 셋이 쓰는 작은 자취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굶주린 배를 채우고, 선배와 후배가 잠들면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엎어져 책을 보다가 높이 달린 창 너머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간간히 올려다보면서 혼자 가만히 마음을 다독이며 눈물로 불러보던 이백의 시(詩)가 생각납니다.
정야사(靜夜思)
상전간월광(牀前看月光)
의시지상상(疑是地上霜)
거두망산월(擧頭望山月)
저두사고향(低頭思故鄕)
고요한 늦은 밤, 상 앞에 앉아 하얗게 비치는 달 빛 을 보니,
달 빛 비친 땅은,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보이네.
머리를 들어 창 밖 산기슭에 매달려 있는 달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백(李白 : 당대의 시인 李太白)
혼자 도시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작은 옷 보따리를 겨우 싸들고 집을 나서는 자식을 보고 눈물짓던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이 겹쳐지면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몸부림치던 나는 이를 악물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게 유일한 힘이 되어 주신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붙여서 하나가 되게 하는 아교처럼 붙이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매일 기도하기를 ‘하느님, 흩어져 있는 내 가족들이 같이 모여 살게 해 주십시오. 월 셋 방 이라도 좋으니 같이만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가슴 깊이 올리는 애끓는 기도를 할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 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때에도 내 마음 깊이 울리던 말씀이었습니다. 52년이 지난 그 때의 나의 청원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웠다는 생각입니다. 그 때 내가 돈을 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이 비록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조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상하시게 들어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청원하였는지 또 어떻게 청원하였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는 분이시니,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내가 청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아무런 걱정도 없이 격식도 없이 그냥 청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애기가 엄마에게 젖 달라고 조르고 울며 보챌 때에 그런 격식이 필요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애기처럼 그냥 보채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지식을 믿고 조금 안다고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청하는 것에 이유를 달거나 합리성을 찾으며 찾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하느님과 결별을 선언할 것처럼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내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은 쓸데없는 것을 찾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영혼에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급하고 절실한 소망이 있을 때는 기도를 잘 하고 하느님께 조르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으면 하느님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수수방관(袖手傍觀)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황금률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읍하면서 열아홉 살 그 때 그 시절의 순수함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지금에서야 회한과 뉘우침으로 가슴이 메어져 묵상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다시 그때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것에 언제나 마음모아 기도하게 하시고, 제 모든 것을 바쳐 생 다하는 날까지 하나 되는 접착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희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일생을 이끌어 주시고 사랑으로 채워주신 주님! 어렸을 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주님을 삶 속에서 간절히 만나게 하소서. 정말 소망했던 어린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주님을 찾을 것이오니 한 결 같이 반갑게 껴안아 주시는 주님 품에서 다시 떠나지 않고 머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어 사랑의 접착제가 되게 하소서 자비와 용서의 주님!!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