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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s://www.psychotherapy.net/interview/thomas-szasz
사라의 열쇠에 와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뭐라도 기여하고 싶어서 재미삼아 한 번역을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는 역사장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정신과의사 토마스 사스(1920-2012)에 대한 인터뷰입니다.
우연히 구글링하다가 찾은 것으로, 2000년 12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참고로 토마스 사스는 반정신의학의 대표적 학자입니다.
이건 그냥 가끔하는 쓸떼없는 생각인데 개인적으로 반정신의학이라는 용어는 좋은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정신의학 프레임 하에 속에 있기 때문에 확장성 측면에서 새로운 대안을 구축하는데 한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물론 안티조선운동이나 낙선운동 등 안티라는 이름을 달고도 나름대로 성공한 운동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을 구성하는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요새 mad studies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라의 열쇠 회원님들도 추후 mad studies를 찾아보시면 흥미있게 보시리라 생각합니다.
mad studies(광기학 혹은 광인학으로 해석할 수 있을듯) 이 이름은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좋은 용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여간 저는 이 인터뷰를 꽤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소심함 속에 내재된 반골기질 때문인지 저는 이런 새로운 관점의 사고가 일단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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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신화>
인터뷰어: 당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의 다양성을 고려해서, 다양한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정신병의 신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000단어 미만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사스: ‘정신병의 신화’는 정신질환이 질병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의 과학적 개념은 신체적인 병변을 나타냅니다. 즉 기계처럼, 신체의 물질적(구조적 혹은 기능적) 비정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Virchowian(피르호주의자, 병리학을 추종하는 자를 일컫는 용어-역자주)가 가지는 질병에 대한 병리학적 정의이며, 이는 여전히 병리학자나 의사가 과학적 치료자로서 사용하는 질병에 대한 정의이기도 합니다. 뇌는 뼈, 간, 신장 등과 같은 신체기관이며, 물론 뇌에 질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경학의 영역입니다. 마음(mind)은 신체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은유적 의미를 제외하고는 질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은유적으로 ‘아픈 농담’ 혹은 ‘아픈 경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어떤 행동(혹은 상태)에 대해 좋지 않거나, 탐탁찮아 하거나,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을 말하는 은유적인 방법입니다. 즉, ‘아픈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픈 농담’ 혹은 ‘아픈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정신질환의 경우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은유적 표현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오직 여성들만이 소위 ‘마녀’로 불리고 비난을 받았지만 마녀는 없었던 것처럼, 정신질환도 없지만, 오직 정신과의사에 의해 허용되지 않는 행동만이 소위 ‘정신질환’이라고 불립니다. 자, 어떤 사람이 공개된 장소에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과의사는 ‘광장공포증(agoraphobia)’이라고 그것을 부르며, 그것은 질환이라고 주장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이상한 사고 혹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정신과의사는 그가 ‘망상’ 혹은 ‘환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불법 마약을 사용했거나, 다중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질병이 아니라 행동의 예시입니다. 내가 정신의학에 대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이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인터뷰어: 예를 들어, 현대과학이 유전학과 생화학 분야의 모든 진보와 함께 생물학적 결함이나 불균형 혹은 유전적 결함들이 어떤 행동들과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환각이나 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물학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것이 당신의 생각을 구성하는데 어떻게 작용하나요?
사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내 주장이 무효화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나의 주장을 입증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뇌 질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신질환이 뇌 질환이라면 우리는 이제 정신질환을 뇌 질환으로 지칭해야 하고 뇌 질환을 치료해야 합니다.
19세기 광인의 집(madhouses, 정신병원이 설립되기 전 광인을 수용하던 곳)에는 ‘미친’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뇌 질환으로 드러났으며, 주로 신경 매독(neurosyphilis), 뇌 손상, 중독, 혹은 전염 등이었습니다. 이것이 발견되면서 신경매독은 더 이상 정신질환이 아닌 뇌 질환이 되었습니다. 간질 또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습니다.
인터뷰어: 이것은 흥미롭네요. 왜냐하면 당신의 책을 읽거나 당신의 주장을 들었던 저의 많은 학생들과 동료들은 아까 지적했듯, 정신건강의 문제가 뇌 질환이라고 생각되면 당신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의학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이것이 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의학적 진단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왜 꼬리표를 붙이는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유나바머(Unabomber)로 불리는 테드 카진스키(Ted Kaczynski)는 정부에 소속된 정신과의사에 의해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받았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유전학적 결함’에 의해 일련의 영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할 때, 그것은 그의 재능과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의학적 진단검사는 세포 조직의 화학적, 물리적 변화를 측정합니다. 그것은 관념 혹은 행동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정교한 진단검사가 있기 전에 의사들은 ‘히스테리 발작’으로 불리는 단순한 가짜 간질과 진짜 간질(즉, 신경계적 발작이라 할 수 있는)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간질이 뇌의 일부 영역의 흥분성 증가 때문이라고 이해되면, 그것은 정신병리학 혹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신경병리학 혹은 뇌 질환의 문제가 됩니다. 이후 간질은 신경학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간질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신경매독은 여전히 존재하며, 정신과의사에 의해 치료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뇌의 감염이기 때문에 전염병 전문의에 의해 치료됩니다.
모든 정신질환이 뇌 질환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정신의학이 신경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인 검사에 의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정신질환’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X가 신경매독을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임상진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방법으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X가 정신분열증 혹은 ‘임상적 우울’, 혹은 PTSD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명사나, 동사와 마찬가지로, ‘질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문자 그대로 쓰여 지거나, 은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정신과의사가 정신질환의 문자적 의미를 객관적인 기준으로 변경하는 것을 꺼리는 한, 문자적 의미의 ‘정신질환’과 은유적 의미의 ‘정신질환’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인터뷰어: 물론 정신과의사는 정신질환과의 관련성에서 밀려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신분열증을 가능한 오랫동안 붙잡고 있기를 원할 것이며, 현재 우울증과 도박 그리고 약물남용 등은 생물학적 혹은 유전학적 결과인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유전학적 표식(genetic marker)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며, 심지어 일반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스: 나는 이 어리석은 짓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정신의학의 역사와 의미론(semantics)에 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진단은 질병이 아닙니다. 기간입니다. 정신과의사가 결코 사과하지 않았던 매우 유명한 질병이 있습니다. 가장 명백한 2가지는 자위행위와 동성애입니다. 소위 ‘질병’으로 불린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신과의사에 의해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아이들은 반자위행위(antimasturbation) 치료에 의해 고통 받았습니다. 동성애자는 정신과의사에 의해 감금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앞서 당신이 언급한 새로운 질병을 정신과의사가 발명하는 동안, 지금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잊어버렸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인 정신의학-사법적 포그롬(집단학살)입니다. 그리고 아동들과의 전쟁은 ‘과잉행동’으로 불립니다. ‘speed’라고 불리는 거리의 불법 약물은 학교에서 독으로 여기지만, ‘리탈린(Ritalin, 대표적 ADHD 치료제)’이라고 불릴 때, 그것은 과잉행동 아동을 위한 기적의 치료제가 됩니다.
다른 의학에는 없는, 정신의학과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특성을 언급하겠습니다. 오직 정신의학에만 환자가 되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 대한 나의 비판은 양면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의 비판 중 한쪽 측면은 개념적인 것입니다. 즉, 정신질환은 진짜 질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측면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즉, 정신질환은 치료감호(civil commitment 민사상 구금행위. 미국에 존재하는 제도이며 우리나라의 치료감호제도와 비슷함-역자주)와 정신착란성방위(insanity defense)의 합법화를 정당하게 만드는 일종의 레토릭(수사학)입니다. 피부과의사, 안과의사, 산부인과의사의 경우 환자가 되고 싶지 않은 환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과의사의 환자는 전형적인 비자의적 환자입니다.
본래, 모든 정신과 환자는 비자의적이었으며, 주립병원의 환자였습니다. 이러한 개념,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정신의학의 핵심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의학에 있어서 잘못된 것입니다. 내 견해로는, 강제입원과 정신착란성방위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즉, 노예제가 폐지된 것처럼, 여성의 공민권 박탈(disfranchisement)이 폐지된 것처럼,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가 폐지된 것과 마찬가지로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소위 ‘정신질환’이라는 것을 다른 행동들처럼 특정 행동의 형태로 조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노예, 마녀 그리고 정신의학>
인터뷰어: 강제입원과 강제적 정신의학에 관하여 당신이 작업한 텍스트를 통해 비판했습니다.
사스: 죄송합니다만, 모든 정신의학은 실제로 혹은 잠재적으로 강제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정신과의사의 진료소로 들어가면, 특정 조건 하에서 그 사람을 저지할 법적 권리와 법적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신과의사는 자살과 살인을 예방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받을 때 그러한 의무는 없습니다. 변호사와 판사도 이러한 의무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다른 누구도 정신과의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었던 권력을 박탈한 것처럼 정신과의사도 박탈 당해야할 권력이 있습니다. 성직자는 비자의적인 신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강제적인 종교적 회심, 종교적 박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 혹은 ‘사랑의 주님’이라고 불리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강제적인 정신과적 회심과 정신과적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정신건강’ 그리고 ‘치료’라고 부릅니다. 만약 이것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경우라면, 재미있을 겁니다.
(뒤에 나오지만, 사스는 자유의지론자 libertarian이다. 이를 감안해고 인터뷰를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자주)
인터뷰어: 정신의학의 상징적인 성질과 정신의학의 사회학은 강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문자 그대로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의사에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잠을 못자요. 난 우울해요. 내가 잠에 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내가 잠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유로운 교환입니다.
사스: 맞습니다.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정신과 치료에 대한 교환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나는 동의된 성인들 사이의 정신과적 치료행위를 진심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본질적으로 가짜 의료(pseudo-medical)인데, 왜냐하면 당면한 문제는 의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의료적 거래가 종종 약물에서 자유시장의 범죄화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왜 수면제나 진정제를 구입하기 위해 의사에게 가야합니까? 백년전에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약국이나 Sears Roebuck에 가서 아편, 헤로인, 포크랄시럽 등 원하는 모든 약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신과전문의는 오직 의사만이 약물처방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부는 대부분의 약물을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약물로 만들었습니다.
인터뷰어: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약물남용이나 마약 판매로 감옥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인과 소수민족인데, 약물처방의 자격을 가진 사람은 대다수 주류이며, 비록 합법적이지만, 그들은 동일한 약물을 판매하면서 사회에서 영웅 취급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스: 그렇습니다. 저의 저서 ‘약물에 대한 우리의 권리’에서 새로운 형태의 흑인 노예화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종 법률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들이 종종 원하고 요구하는 기분에 영향을 주는 약물을 처방합니다. 이것은 마약 유통이 의료화 된 버전입니다. 의사들은 금주법 기간 동안 알콜성 약물로 같은 행위를 하였는데, 이것은 꽤 수익성이 있었습니다.
인터뷰어: 그리고 이제 정신의학과 약리학은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사스: 정신의학은 두 가지 의료적-정신의학적 특권 또는 독점권(면허 있는 의사만이 처방할 수 있는 약물)을 보유하고 있는 한 수익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그들만의 환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즉, 사람들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환자로 변형시키는 것은 오직 정신과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약물 사용에 대한 권리>
인터뷰어: 그렇다면, ‘정신분열증’ 혹은 ‘삶의 문제’라고 당신이 지칭하는 사람들, 또는 ‘대인관계 어려움’ 혹은 ‘정신내부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신과 약물치료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당신이 무어라 지칭하든,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있거나, 개인내적 혹은 대인관계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약물 사용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사스: 당신은 이미 나의 견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웃음이 납니다! 나는 약물에 대해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책을 읽을 수 있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책을 원한다면, 그는 서점에 가거나, 인터넷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약물 또한 같은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어떤 약물을 구입해야할지 잘 모른다면, 의사 혹은 약사에게 가서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상점에 가서 약물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뷰어: 그것은 약물 그리고 처방과 관련된 법률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썼습니다.
사스: 맞아요. 처방전이 있어야 약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법률은 약물 금지에 대한 각주입니다. 처방전 법률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약물과 관련된 법률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마약(아편, 마리화나, 담배, 할로페리돌, 발륨 등) 구입을 원한다고 가정한다면 가능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을 ‘정신적’으로 괴롭게 만드는 것과 어떤 것이 그를 더 잘 느끼게 만드는지, 혹은 어떤 것이 기능을 향상시키는지 그것을 정의한 사람이 그 자신인 것처럼, 환자 자신이 유일한 중재자입니다. 우리는 신경증과 정신증에 대한 실험실 테스트를 할 수 없습니다.
불면증에 관한 일반적인 불만은 수면제를 얻기 위한 간접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에게 가서 ‘바비튜레이트(barbiturate)’ 처방전을 써주세요‘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중독자로 진단받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저는 잠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의사는 그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인터뷰어: 당신은 그에게 얼마나 자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저녁에 2시간 밖에 못 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스: 그게 사실인지 의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불면증이라는 용어는 환자가 원하는 처방전을 받기 위해 발언하는 전략적 거짓말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치료 국가와 의료모델>
인터뷰어: 당신은 정신의학의 의료모델보다는 의학의 의료모델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사스: 네. 전적으로 맞습니다. 우리는 의학에서 의학의 의료 모델이나 폐렴의 의료 모델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다른 모델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구가 빛을 내는 이유에 대해 전기 모델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신질환의 의료모델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하면 정신질환이 존재하고 거기에는 또 다른 모델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모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심하게 비난받는 용어인 ‘의료모델’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소아 모델(pediatric model)’, ‘무책임 모델’입니다. 정신질환으로 딱지 붙여진 사람들을 마치 어린 아이처럼 대하며, 정신과의사는 마치 환자의 부모가 된 것처럼 치료합니다. 정신의학의 기둥은 의료적 합리화, 법적으로 합법화된 강제성 그리고 변명으로 구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터뷰어: 만약 당신이 정신질환을 은유나 가명으로 표현한다면... 질환은 ‘불편함(dis-ease)’를 의미할 것이고, 사람들의 개인적인 고통은 정신질환의 심리사회적 모델로 표현될 것입니다. 이는 ‘정서적인 문제’를 대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스: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것이 정서적인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흑인이거나 혹은 가난하거나 혹은 부자이거나, 이런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고통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치료해야할까요? 어떤 것을 치료하지 말아야할까요? (의료화의 대상여부를 강조하는 듯-역자주)
우리는 피임, 동성애, 자위, 노예에서 도망가려는 흑인 (drapetomania를 의미하는 듯. 1851년에 사무엘 카트라이트(Samuel A. Cartwright)라는 미국 의사가 주장한 이 병은 흑인노예가 탈주하려 하는 경향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규정함-역자주)을 의료적으로 정신의학적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대신 우리는 멜랑콜리아, 나태, 자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으로 불리는 것을 의료적으로 연구합니다.
인터뷰어: 다른 화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스: 아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았을 때 점점 더 많은 사람의 문제를 ‘질병’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다음 그것들을 마치 질병인 것처럼 치료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덧붙이고 싶어 합니다. 나는 그것을 ‘치료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인터뷰어: 확실히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는 너무나 의료적으로 보여집니다. 그 전환은 거의 완전히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사스: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 전환은 사람들이 바뀌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체계적인 교육과 정치적인 저속화(dumbing down)를 필요로 합니다. 300년 전 모든 인간의 곤경(질병, 빈곤, 자살, 전쟁 등)은 종교적 문제로 보였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모두 의료적 문제로 간주됩니다. 정신과적 문제는 유전자에 의해 유발되고, ‘치료법’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형법이 신학에 고취되었습니다. 이제, 형법은 정신의학에 고취되었습니다.
인터뷰어: 빌 클린턴 대통령은 동일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모델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의 아내는 빌 클린턴의 문제가 어린 시절의 ‘정서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동생은 빌 클린턴이 마약 중독자였기 때문에 섹스중독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 클린턴은 종교모델에 의해 이건 죄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목사에게 갔습니다.
사스: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진짜 성직자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정치인인 제시 잭슨(정치인이자 목사)에게 갔습니다. 잭슨의 역할은 클린턴을 다시 멋져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해냈습니다. 중세 황제가 자신을 좋게 보일 수 있도록 주교를 직접 뽑듯이, 클린턴 또한 마찬가지로 제시 잭슨을 직접 고른 것입니다.
인터뷰어: 이제 화제를 바꾸어도 될까요?
사스: 물론이죠.
<자유와 정신치료의 실천>
인터뷰어: 당신은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스: 네. 저는 자유의지론자입니다.
인터뷰어: 자유의지론은 철학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입니다. 정신치료의 실천적 측면에서 자유의지론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신중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정신의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유의지론자 정신과의사’라는 용어는 아주 단순한, 모순어법입니다.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정신건강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확실히 정신과의사가 당신을 당신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가두어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정신의학은 치료감호와 함께 강제적으로 세우거나 넘어뜨립니다. 비-강제적 정신의학 또한 모순어법입니다. 이것이 저 자신을 결코 정신과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항상 강제적 정신의학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 정치철학 용어로 자유지상주의는 19세기에 자유주의(liberalism)로 불렸습니다. 요즘은 그것은 때때로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국가를 합법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진 기구로서 간주하고, 따라서 개인 자유의 위험을 초래합니다. 반대로, 현대의 ‘자유민주적(Liberal)’ 관점은 국가를 보호자, 시민(유사-아동과 같은)을 위한 안전을 제공하는 자애로운 부모로 간주됩니다. 나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론자란, 사람들을 성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는 대신, 그들 스스로 지원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들이 필요한 것을 의사나 국가를 통해 얻는 것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지불해서 구입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며, 이것은 가장 최소로 국민을 통치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통치라는 오래된 제퍼슨주의(Jeffersonian)의 생각입니다. 법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 자유, 재산(이것을 빼앗으려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에 대한 권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법은 사람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가능한 한 의료서비스가 분배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경제적으로 말하면, 자유시장에서 개인적 서비스로서 제공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격언에는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평가한 것에 지불하고, 그들이 지불한 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인터뷰어: 왜 돈이 필연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할까요? 만약 사람들이 돈을 적게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만큼 지불할 여유가 없습니다. 빈곤층도 치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스: 물론입니다. 당신이 제기하는 문제는 평등주의에 대한 추구를 건강 혹은 정신치료의 개념, 또한 건강에 대한 추구와 함께 혼동하고 있습니다. 정신치료를 그 어떤 다른 것들보다 더 평등하게 분배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사람들은 종종 모험, 위험, 흥분, 흡연 등과 같이 건강을 중시하는 것보다, 건강 외의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경제학자와 역학자(epidemiologist)는 좋은 건강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두 가지 변수는 재산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즉, 자유시장)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건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일본의 시민들입니다. 가장 취약한 건강을 가진 사람들은 80년간 가부장적 국가통제자인 공산주의의 축복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소련에서는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복지가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반을 약화시켰는데(그들이 ‘전체를 위한 공평한 궁핍’을 즐겼던 곳에서), 평균 수명은 70세 이상에서 약 55세까지 떨어졌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선진국에서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평균수명은 거의 80세에 이릅니다. 러시아는 의료과학 및 의료기술에 접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는 이것과 관련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주로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입니다. 좋은 습관 대 나쁜 습관이라고 불리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좋은 공중보건은 안전한 물리적 환경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치료와 사스>
인터뷰어: 당신은 1965년에 ‘정신분석의 윤리’를 썼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정신치료, 정신분석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정신치료에 유용한 것에 대해 당신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한 어떤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정신치료의 자유로운 관계에 있을 때, 간단히 말해, 한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이론들을 사용했나요?
사스: 당신은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유용하거나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는지, 그리고 어떤 이론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 생각에, 치료법 중 어떤 것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치료자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각자마다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기질은 다릅니다. 치료적 관계는 사람과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치료자에게 의미가 있는 어떤 종류의 정신치료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반영합니다. 이런 면에서 정신치료는 의학에서의 물리적 치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당뇨병의 적절한 치료는 의사의 인격에 달려있지도 않고, 의존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의학의 문제입니다. 반면에 정신적 고통 속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 대한 적절한 치료는 치료자와 환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가치와 개인 스타일의 문제입니다.
정신치료에 대한 적절한 비유는 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결혼 혹은 자녀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어떻게 그의 아내와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반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각자마다 그들의 아내, 남편, 아이와 각자 다르게 관계를 맺습니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들을 위해 작동하는 한,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소위 ‘치료’라 불리는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정의된 모든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믿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인 어떤 사람이든, 들어오든, 퇴장하든 참여자 모두에게 이해가 되어야하고, 전적으로 합의되어야하며, 자발적이어야 되고, 여기에는 강제와 사기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클라이언트는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입니다. 클라이언트가 치료자로부터 얻은 것을 반환하고, 보수를 지불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신을 위한 일종의 증거입니다.
나는 이것을 다시 한 번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이 종교와 비교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독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와 그들의 믿음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전 세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계속 교회에 갑니다. 그들이 순수한 사회적 이유만으로만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 만약 교회를 가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교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엄격한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도 여전히 교회가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어: 정신과의사가 될 때 당신의 초기 관심은 무엇이었나요?
사스: 나는 정신과의사가 되는 것에 결코 관심이 없었으며, 나 자신을 정신과의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신의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감안하여 작용해야하는 범주였습니다. 저는 프로이트 이론 전제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정신치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전문적인 코드로서 실현되지는 못한 약속입니다. 프로이드와 융, 아들러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즉, 두 사람, 전문가와 클라이언트 구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기밀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삶을 더 잘 살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개척자들은 이 사업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방법에 대한 각각 다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삶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융은 미래에, 아들러는 현재에 머물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환자에게 의미가 있는지 여부는 목적에 따라 조정되어야 합니다.
인터뷰어: 치료적 관계의 관점에서 어떻게 작용합니까?
사스: 그 관계는 완전한 협력이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오직 몇 번 만날 수도 있고, 수 년 동안 여러 번 만날 수도 있습니다. 치료자는 환자의 대리인입니다. 이것은 환자가 믿고 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자가 자신의 관심사를 정의함에 있어, 치료자가 환자의 관심에 반하는 행동(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환자와의 계약에 대한 제 생각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제 책의 제목을 ‘정신분석학의 윤리’라고 했습니다. 치료는 테크닉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환자들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오고 싶을 때 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저를 보러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를 끝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이 거래(business)에는 없었습니다. 환자가 치료를 시작할 때 혹은 시작할 것인지 결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언제 끝낼지, 끝내는 시기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치료자가 환자를 변화시키거나, 그를 더 나아지게 만들거나,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환자 자신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거나 등은 이 거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환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치료자의 임무는, 치료자가 받아들인다는 가정하에 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환자와 논의하여 관계를 종결하는 것이 치료자의 임무입니다.
인터뷰어: 그러면 환자에게 기대하는 바는 어떤 것입니까?
사스: 환자에게 지불하는 것 외에 기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이기적인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환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이 상황은 학교, 특히 대학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유사합니다. 만약 당신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돈을 내야한다면, 거기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내는 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이 거래가 끝난 후 만약 당신이 어떤 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당신은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인터뷰어: 당신은 변화가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원합니다.
사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면서, 또한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환자가 변화하길 원하는 특정 행동은 어떤 면에서(이것은 매우 프로이드적입니다) 환자를 위해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정식 치료가 없어도 그는 이미 변화되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적응(Adaptive)을 말하는건가요?
사스: 네 적응. 정확히 말하면, 소위 정신증상은 의학적 증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말하자만, 기침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폐렴이 있으면 적응이 발생합니다. 기침은 점액과 감염물질 및 조직 파편들을 가래로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다른 유사한 병리학적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포증, 불안, 우울 등에서의 적응은 경제적 혹은 대인관계 전략과 같은 일종의 삶에서의 전략입니다.
인터뷰어: 정신치료에 대한 당신의 목표는 완전한 기능을 하는 사람으로, 그들의 자율성을 증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스: 그것이 저의 근본적인 목표였고, 윤리적인 원칙으로 (저의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했습니다. 나의 전제는 도덕적으로 말하자만, 자유에 앞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두려움, 아내, 일 등과 관련하여) 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그것들과 관련하여 더 많은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이 목표는 더 많은 책임을 떠맡는 것이고, 그로인해 더 많은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얻는 것입니다. 환자의 문제 혹은 의문은 그의 책임 회피를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증상’으로 표현됩니다.
인터뷰어: 그건 대화입니다.
사스: 맞아요. 그것은 치료적 대화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금연을 하거나 더 나은 부모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흡연의 즐거움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거나 부양가족을 돌보는 일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치료자를 만나 자살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그가 원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또한 정신치료를 원합니다. 즉, 사람들은 종종 기본적인 선택에 대해 양가감정이 병존합니다. 양가감정은 병리적인 증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적절한 정신상태입니다.
인터뷰어: 다시 본래의 치료로 돌아오죠. 당신은 더 이상 활동하지는 않습니까?
사스: 네. 저는 이미 45년 동안 했습니다.
인터뷰어: 사람들과 일대일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사스: 저는 치료적 실천들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시라큐스로 떠났을 때 치료를 통해 나 자신이 지원받던 것에서 벗어났어야 했는데, 이는 환자를 치료에 의존하게 만드는 재정적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치료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그러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대화’를 함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어: 당신의 모든 정치적, 철학적 작업들과 더불어, 당신의 정신치료도 간과되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당신은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대화했습니다.
사스: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에 의해 매우 아픈 사람이라고 진단받은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정신질환으로 진단받았고, 정신과약물을 복용 받았었습니다.
인터뷰어: 당신은 처방하지 않으셨나요?
사스: 네. 정신치료를 할 때 저는 절대 약물을 처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 인슐린 쇼크나 전기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 아무도 강제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코 저를 만나기 원치 않는 환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눈을 부릅뜨고 정신과에 갔습니다. 저는 결코 정신의학이나 정신치료를 의학의 한 부분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제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환자가 마약을 하거나 혹은 그가 원하는 어떤 것에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진찰실 외부의 일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환자가 마약을 원하면, 그가 그는 의사에게 가서 그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이혼을 원하면, 변호사를 찾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터뷰어: 오늘날 법적으로, 치료자 혹은 정신과의사가 정신치료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당신은 강제입원, 지자체 명령, 보험 요구로부터 피할 수 있지만, 막상 밀고 나갈 때, 압박에 의해 당신의 확신이 깨지거나,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사스: 그건 너무 곱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체주의의 특징은 국가 내 개인적인 비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치료적 국가’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국가는 당신의 친구, 당신의 후원자, 당신의 의사입니다. 왜 당신은 치료적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숨기려 하지 않나요? 소비에트 러시아 혹은 나치 독일에서 정신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나치 독일 체제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나는 지하실에 유대인을 숨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보고하지 않으면, 당신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가스를 마실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날 만약 당신의 환자가 자살충동 혹은 살인충돌을 느끼거나 아동학대를 할 때 보고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의 정신치료는 이제 망가졌고, 끝났습니다.
당신은 뭘 할 수 있나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자유로운 정신치료실천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심리치료사는 환자를 배신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의 요원으로 변모했습니다. 아동학대, 약물남용, 폭력, 자살. 이러한 모든 것을 치료자는 막아야하고 예방해야 합니다. 치료자는 치료자인 척하는 경찰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밀의 문제’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만, 그들은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정신의학과 정신치료가 국가와의 동맹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교회와 국가의 동맹, 이 모든 함축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인터뷰어: 더군다나 사람들이 관리의료(managed care) 하에 있는 치료자를 만나서 상담하거나, 약물을 얻기 위해서는 충분한 문제가 있어야하지만, 문제가 너무 많아서도 안 됩니다. 만약 문제가 너무 많으면 ‘만성’으로 보여서, 그들은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관리의료 하의 치료자가 자유롭게 정신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클라이언트는 정신치료에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습니까?
사스: 관리의료 체계 내 정신치료는 나쁜 농담입니다. 이것은 관리의료 내 종교가 있는 것, 관리의료 내 교육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일반 의료도 의사와 환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제3자의 입력에 의해 중단되면 복잡해지고 오염됩니다. 만약 환자가 돈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합니다.
현대의 정신치료는 정신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적 관계는 고해자와 성직자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고해소의 요점은 부분적으로 고해자의 자기 비난이며, 성직자에 의한 안전한 약속입니다. 성직자가 듣는 고백은 이 세계의 고해성사자에게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직자가 고백을 듣고 국가의 스파이로 일하는 것은 도덕적 외설이 될 것입니다. 전체주의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비밀유지에 기반하고 있는 정신치료에도 마찬가지이며, 환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고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자의 도움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정신치료의 추악한 점은 많은 환자들이 치료자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 비밀유지가 될 것이라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치료자는 그것에 대해 환자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환자가 특정한 생각과 단어를 입 밖에 낸다면, 치료자는 특정 기관에 보고할 것이고, 환자는 자신의 자유, 직업, 훌륭한 이름, 그리고 신념을 박탈당할 것입니다.
이제, 보험회사 혹은 국가의 통제 하에 정신치료를 배치된 것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터무니없는 헛소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정신치료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혼을 치료하는 것’처럼 정신치료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적으로 골절된 뼈를 정형외과에서 수술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신치료는 교회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특정 사람에게 특정 종류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곳에 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터뷰어: 이제 시간이 몇 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한두가지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치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견해를 둘러싸고 있는 비난을 가지고 그것에 관해 말할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스: 감사합니다.
<비평가와 영웅>
인터뷰어: 당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많은 비평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스: 동감합니다!
인터뷰어: 아마도 엄청난 비판일 것이다. 광기에 대한 당신의 책에서 당신은 모든 비평가를 지적합니다.
사스: 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인터뷰어: 그들 모두를 언급할 필요가 있었나요?
사스: 아닙니다. 단지 몇 명뿐이었습니다. (웃음)
인터뷰어: 이걸 어떻게 처리하죠? 당신은 역사상 가장 비판받은 정신과의사 중 한명입니다. 나는 당신만큼 비판을 받은 다른 사람을 모릅니다.
사스: 나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아주 훌륭한 부모를 가졌고, 매우 좋은 형제들, 부다페스트의 다른 아이들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난 아주 좋은 아이들, 좋은 친구, 좋은 건강, 좋은 습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난 항상 축복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또한 내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느꼈지만(내가 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2+2=4와 같이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불필요한 경우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어떠한 과학적 발견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만약 당신이 백인이며, 흑인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뿐 입니다. 이것은 단지 편견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빠져나갈 수 없는 건물에 있다면 그것은 병원이 아니라, 그것은 감옥일 뿐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를 질병이라고 부르든, 비자발적 정신병원 치료를 말하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인터뷰어: 그 비판들이 당신을 실망시켰나요?
사스: 물론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문적으로, 법적으로 상처를 주길 원할 때 특히 그랬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위대한 작가들의 문학 속에서 무한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입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완벽하게 다수인 경우는 항상 틀린 것이다(the compact majority is always wrong).”
인터뷰어: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자유권, 기본권,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 증진을 위해 싸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영웅은 누구입니까?
사스: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네요. 셰익스피어, 괴테, 아담스미스, 제퍼슨, 매디슨, 존 스튜어트 밀, 마크 트웨인, 멘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시키, 체호프, 오웰, C.S 루이스, 루드비히 폰 미제스, 하이에크 등이 있습니다.
인터뷰어: 오늘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들이 당신의 솔직함에 감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사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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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처음엔 꼼꼼히 읽다가 뒷부분은 좀 설렁설렁 읽었네요. 그래도 덕분에 잘 읽었어요. 읽다가 문득 생각 나는 것이 있어서 끄적거려 보기도 했네요. 답글로 달죠. 참 그리고 스크램 해 갑니다. 그래도 되죠... 미리 고맙습니다.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번역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꼼꼼히 천천히 읽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