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함북노회 소속시기
함경노회가 설립되고 6년 사이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노회는 집회와 전도 및 교육활동의 효과와 편리를 위하여 분립의 필요성을 깨닫고 경성 이북과 간도는 함북노회, 명천 이남과 해삼위는 함남노회로 나누기로 결의하여 1917년 9월 1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 6회 총회에서 분리 승인을 허락받았다. 그 후 11월 20일에 함북노회 조직회로 선교사 3인, 목사 2인, 장로 7인이 용정예배당에 모여서 회장 부두일, 부회장 김내범, 서기 채필근, 부서기 강두화, 회계 매도날 (D. A. MacDonald), 부회계 김약연을 선출하였다. 노회 안에 임사, 재정, 총계, 학무, 헌의, 규칙, 신학, 준시. 시찰 등의 각부를 설치하여 사무를 분담하였다. 함북노회 의안에 나오는 교회 중에 설립된 교회 명단에 나오지 않는 교회 이름이 10여 개가 넘는다.26)
1918년, 용정시교회에 박영헌목사가 전임목사로 왔다. 선교회가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최선탁목사가 양무정자교회에 시무를 맡았다.
같은 해에 와룡동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고 남인상, 지병학, 이병익, 함주익, 최희중 등이 장로로서 함께 시무하였다.
1918년,
전석동교회가 세워졌다. 안영환이 믿은 후 전도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이병극, 김기석이 인도자가 되어 교회가 발전하였다.
같은 해에 청산리 백운평교회가 세워졌다. 권두혁, 박홍식이 와서 근처에 사는 신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남녀 전도인들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 후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로 인하여 교회가 소실되고 교인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그 후에 참변을 극복하고 점차 복구하였다.
같은 해에 구호동교회가 세워졌다. 김상설, 이옥현 등이 신도 7,8 가족들과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자 이하영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그 후에 김상목목사가 시무하며 김상설, 채원휘, 김계홍, 한치훈 등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고 남녀전도인을 세웠으며 예배당을 중건하였다.
같은 해에 옹성납자교회27)가 세워졌다. 이윤지, 신학봉이 마을에 내주하면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내범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들렸다.
같은 해에 장낙동교회28)가 세워졌다. 문경풍이 마을에 도착하여 땅을 개척하고 인근의 교회들을 모아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김내범목사가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십리평교회가 세워졌다. 함광실, 홍춘명, 김홍순 3인이 마을에 와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교인이 불어나자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세워 김유목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가 전도하여 진빙, 동작동, 달나자에 각각 예배처소를 세웠다.‘
같은 해에 장동동교회28)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삼도구교회29)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목사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1919년에 조선독립운동이 세차게 일어나서 북간도 교회에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3.1만세운동 이후 3.13만세운동이 용정시를 중심으로 하여 수만 군중이 열광적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는 중에 중국 군경들의 발포로 말미암아 19명30)이 죽었으며 구류 감금된 교인이 허다하였으며 교회가 직면한 고난과 시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기타의 교회에도 일본의 탄압과 핍박이 파급되어 교회활동이 위축되었고 전도활동도 약화되었다.
1919년 양무정자교회에서 당회가 조직되어 한덕일, 강군선이 장로로 함께 섬겼으며 문재린조사가 시무하였다.
1919년에 두도구 간장암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다. 만세운동과 국민회 무력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0년 10월에 일본군의 방화와 대학살의 참변을 겪었다. 교회와 학교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30여 명의 교우들이 교회당 안에서 함께 불에 타죽었다.
1919년,
신흥교회가 세워졌다. 이태현의 전도로 7,8인이 믿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자 최덕준목사가 설립예배를 주관하였다. 후에 김내범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중강자교회가 세워졌다. 김관식목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윤동호, 최동빈, 박동섭 집사가 인도자가 되어 지역에 학교도 세웠다.
1920년에 간도 독립군들의 조선 내 빈번한 침투와 봉오동전투 패배에 경악한 일본은 〈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경신대학살이 일으켰다. 일본의 약탈과 방화로 청산리 백운평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고, 간장암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으며 33명의 교우들이 학살과 불에 타죽었으며 또한 가옥이 불에 탈 때 14명이 즉사하였다. 양정자교회(양무정자)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다. 용정의 권서인 이근식과 의란, 구혼, 춘남, 별리 등 교회 장로 김문순, 이명순과 교인 50명이 참살되었고 옥에 갇힌 자와 징역형을 받은 자와 나그네 되어 유리하는 자와 행방불명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31)
장백현교회는 일본경관에게 소실 당하였으며 교인들은 포박을 당하여 중국경관에게 넘겨졌으며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교회가 불에 탄 관계로 이은향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32)
명동교회 중학교실이 소실되었고. 허익근, 박용훈, 최홍택이 학살당하였으며, 김병영은 중국군에게 총살당하였고 한상수, 장성순은 사형을 당하였고 복역자, 구금자가 90여 인에 이르렀다.
장은평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교회가 소실되었으며 불에 탄자와 옥에 갇힌 자가 십여 인이고 합마당교회는 가옥 3채가 소실되고 3사람이 피살되었으며 구세동교회는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핍박과 고난을 거듭 겪었다. 함북노회에 속해 있는 교회가 겪은 환난은 다 찾아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33)
1920년,
토성보교회가 분립되었다. 용정교회에서 분립되는 중에 교우가 중국인의 땅을 구입하여 가옥 1동은 예배당으로 다른1동은 학교로 기부하였다. 강두송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드렸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도현, 이광수, 김찬성, 이은경, 신찬선 등이 함께 장로로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호천포교회가 서창희, 지송암조사와 김병두영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인이 늘어났다.
같은 해에 용정동산교회가 세워졌으며 리성국이 설립자로 알려졌다.34)
같은 해에 용정에 룡강동교회가 세워졌다.35)
같은 해에 두도구교회 관리가 이성국과 최선택목사에게 맡겨지다.
같은 해에 노두동교회가 세워졌다. 노두동의 신자가 명신교회로 다니다가 분립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하영과 김유목목사기 섬겼다.
같은 해에 남양동교회가 세워졌다. 조성극과 임종묵이 함께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드리면서 최덕준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김내범목사가 시무하였으며 임종묵이 인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합성리교회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의란구에 창신동교회가 세워졌다. 최군왕, 김순효가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김보국 가족이 모여서 예배하므로 흥신동교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김희순, 김재길 양인이 협력하여 태양동에 교회를 세웠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북구교회, 청수동교회, 동강자교회가 세워졌다.36) 배례사 선교사와 리병하목사가 함께 설립하였으며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마가점에 마가점교회가 세워졌고 리용성이 지도하였다.
함북노회 소속시기에 남녀소학교를 설치한 교회 명단에 형납자교회, 은동자교회, 동구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설립교회 명단에 이름이 없으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7부로 계속됨
3)간도노회 (1921년~1923년)소속시기
1921년 10회 총회에서 회령과 성진시찰구역이 함북노회로 조정되고 간도일대는 간도노회로 독립하였다.
1902년 구례선이 홍순국과 함께 함경도를 경유하여 간도와 해삼위에 전도를 시작한 이래로 중국인 싼진선생, 김문삼조사와 업아력(A. F. Robb)선교사, 김계안조사와 부두일, 박걸선교사 등과 김내범 목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부흥하였으므로 총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