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 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
박 정 순
<목차>
I. 서론: 서양윤리학사 편취-이성과 감정: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
II. 이모우티비즘(emotivism) 유감
III. 이모우티비즘 이후: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감정의 위치
IV. 감정의 도덕적 중요성과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
V. 결론: 이성과 감정의 윤리학적 통합과 그 과제
♧ 요약 ♧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이해 방식이다. 윤리학을 포함한 서양철학사에서 그러한 이분법은 단적으로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위한 위계적 이분법이다.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는 그 양자의 관계에 대한 가장 고전적이고 지속적인 비유가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였음을 통해서 잘 입증된다. 따라서 감정은 미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할 "내부의 적" 혹은 "영혼의 혼란"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이성 중시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지,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들도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선언하면서 여전히 전통적인 이분법과 메타포를 고수했다. 또한 감정 중시의 철학자들도 이성 중시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정이 서로 섞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에게 감정은 육체적 반응을 수반하는 "감각적 느낌"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양윤리학자들은 감정을 말살하거나, 육성하거나, 혹은 그 양자를 결합하거나 간에 보다 나은 개인적 사회적 삶을 위해서 감정을 알고 통제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서양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는 감정이 말살의 대상인가, 육성의 대상인가, 아니면 선별적 취급의 대상인가에 따라서 상응하게 변화해왔다. 서양윤리학사에서 감정의 위치에 관한 가장 괄목한 만한 사건은 20세기 전반부에 번성했던 "이모우티비즘"이다. 이모우티비즘은 윤리적 언명이 감정의 표현과 유발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이비 명제임과 동시에 무의미한 명제임을 선언한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즘은 윤리학도 감정도 모두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심각한 손상도 가했다. 20세기 후반부의 윤리학은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정당근거적 접근방식"을 거쳐 오늘날 현대 윤리학을 풍미하고 있는 합리적 선택이론에 이르게 된다. 합리적 선택이론은 주어진 정보와 신념 아래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합리적 선택자들의 의사결정이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에 의거한 대표적인 윤리학설은 사회계약론적 정의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의론에서 감정의 역할은 합리적 계약의 결과에 대한 정서적 수용 혹은 배경적 도덕상황의 설정을 위한 최소한의 정의감 제공이라는 부차적인 위치로 전락한다.
그러나 감정의 인지주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구체적인 행동 및 삶의 양식을 꾸려 나가는 주요 원천이 합리적 이성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감정은 이제 중심적인 연구대상이 되었다. 감정의 인지주의는 감정이 인간 정신의 사소한 파생물이 아니고 기억과 판단, 평가와 학습, 관심과 구성 등 고도의 이성적 사고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감정의 인지주의의 대두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감정의 윤리학을 정립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감정적 배려가 모든 윤리학의 배경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전통적으로 감정이 윤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온 근거에 대해서도 반박을 가한다. 그러한 근거는 감정의 변덕성, 불합리성, 공정한 상황파악을 위한 감정의 배제, 감정의 수동성과 도덕적 책임 추궁의 불가능성, 그리고 윤리학적 보편화가 불가능한 감정의 특수성이다. 감정의 윤리학자들은 감정이 지속적인 헌신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성향이라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감정도 개인의 신념, 정보, 판단, 그리고 배경적인 상황에서 적합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으므로 합리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또한 감정적 배려와 이입은 오히려 도덕적 상황을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다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감정의 윤리학자들은 "감정의 수동성과 도덕적 책임 추궁의 불가능성", 윤리학적 보편화가 불가능한 "감정의 특수성", 그리고 감정이 윤리학의 기초가 될 때, 감정 자체가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선재적인 도덕적 기준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순환성"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의 윤리학은 감정의 도구적 합리성과 본질적 합리성의 구분, 죄책감과 분노를 통한 감정의 규범표현적 분석, 그리고 인격과 미덕과 감정의 통합 가능성에의 타진을 통해서 감정이 윤리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윤리학의 대두는 아직 일천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론적 실천적 관점에서 많은 보강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또한 많은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과연 윤리학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성과 감정의 도덕적 통합은 이루어질 것인가?
I. 서론: 서양윤리학사 편취-이성과 감정;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
이성과 감성의 싸움은 인간의 정신 내면 혹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싸움으로서 신화적 인류사로 볼 때 다섯번째로 등장하는 큰 싸움이다. 신들의 전쟁과 그 황혼; 신들과 타이탄들의 싸움; 신들과 타이탄들에 대한 영웅적 인간들의 싸움; 인간들끼리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인간 내면의 싸움.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그 싸움을 서양윤리학의 관점에서 관전해보고, 어느 편을 들 것인가를 아니면 그 싸움을 이제는 종결--종결이 아니라면 최소한 휴전이라도--시킬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트겐슈타인式으로 문제 자체를 해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한 목적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성에 대한 인식론적 윤리학적 이해가 우리의 보다 가치 있고 참된 삶에 공헌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가진) 능력은 통상 이분법적으로는 이성과 감성, 삼분법적으로는 지정의(知情意)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과 다원론은 당연히 이원적 다원적 구성요소 혹은 측면들의 관계 방식에 관한 미묘한 철학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한 문제의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마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자를 옹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속견처럼, 지배적 요소(a dominant factor)를 확정하는 것이다. 윤리학을 포함한 서양철학사에서 당연히 그러한 지배적인 요소는 인류를 지칭하는 현명하고도 이성적인 인간(Homo Sapiens)의 개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성과 감정(reason and emotion)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고도 지속적인 비유는 주인과 노예(the metaphor of master and slave)의 메타포였다는 것이 그 사실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준다. 이성이 플라톤적 흑백 쌍두마차의 마부로, 데카르트적 선장으로 비유되었을 때도,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는 언제나 그 배경에 있었다. 따라서 감정(感情)의 애로(隘路)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그 애로를 감정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우리는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Chorus of the Hebrew Slaves: Nabucco, Act III)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다.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가 절정에 다다른 것은 스토아 학파의 무감동(apatheia)--스토아 학파 철학자들도, 요절복통은 안되겠지만, 여전히 농담을 즐겼다고 한다--과 에피쿠로스 학파의 평정심(ataraxia)--비록 쾌락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쾌락의 역설"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서 갖는 마음의 평화이므로--이다.
감정(emotion)은 고전적으로 마음에 닥쳐오는 강렬한 느낌(feeling)으로 육체적 생리적 반응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정념(passion)이라는 말도 쓰여 왔는데, 정념은 그 수동성과 비자발성이 특징으로 이성을 잃은 강렬한 감정, 즉 격노와 성적 충동 등을 지칭한다. 정념이라는 말 자체에 "노예가 된다" 혹은 "지배를 당한다"는 주인과 노예의 구조가 담겨져 있다. 따라서 감정과 정념은 미천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내부의 적(inside enemy) 혹은 내부의 괴물(inside dragon)로서 내적 동요(inner commotion, turbulence, perturbation)와 영혼의 혼란(disorder of the soul)을 야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들은 영혼이 통제하고 정화해야 할 "동물적 정기"(animal spirit) 혹은 닦아내어야 할 "마음의 땀"(the sweat of the activity of the mind), 그리고 종국에는 철학에 의해서 치유되어야 할 병리적 현상(pathological phenomena)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념론(pathologia: study of the passions)은 바로 병리학(pathology)이며, 이것이 바로 파토스(pathos)에 대한 에토스(ethos)의 우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서양윤리학에서 정념론은 진단술이고, 윤리학은 치유술이다.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가 주는 의미는 이성의 통제 아래 우리는 감정의 위험한 충동을 안전하게 억제하거나, 혹은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혹은 (이상적으로) 이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주인(our own master)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 중시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지,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들도 감정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것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감정과 육성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고--전자가 적절히 통제되고 후자도 과도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양자를 모두 도덕철학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감정을 윤리학의 기초로 삼으려는 철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윤리학사를 전체적으로 볼 때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감정은--상반되는 감정이 교차될 수 있는 것(ambivalence)이 감정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듯이--고정되지 않은 양면적인 역할을 해왔다. 감정은 서양윤리학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혹은 울면서 웃어야 할 위치에 있다.
즉 감정은 도덕의 적으로도, 도덕의 기초로도, 혹은 그 양자의 결합으로도, 혹은 도덕과 무관한 것으로도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감정에 관한 언어가 미덕과 악덕에 관한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반영한다: 시기심, 적의, 원한, 질투심, 자만, 탐욕, 관능적 욕구, 격노 등의 감정은 동시에 악덕도 지칭하고; 사랑, 공감, 감사, 동정심, 자비, 자선 등의 미덕은 동시에 감정도 지칭한다. 그러나 어떤 미덕들--사원덕 중 정의를 제외한 나머지인 사려, 기개, 절제--은 어떤 특정한 행위의 수행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대체로 감정의 동기적 힘을 억제하는 능력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본질적이고 고정된 의미에서 도덕적 감정과 부도덕한 감정, 그리고 미덕과 악덕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설을 통해서 갈파했듯이 그러한 구분들은 정도의 문제임과 아울러 구체적인 배경 상황에도 달려 있다. 격노의 감정도 도덕적 분노가 되면 사회적 개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하듯이 자선이라는 감정적 덕목도 혁명의 열기를 식힘으로써 분배적으로 부정의한 사회를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서양윤리학자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그러나 한 가지 목적을 위해--감정을 육성하거나 말살시키거나 혹은 그 양자를 결합하거나간에, 보다 나은 개인적 사회적 삶을 위해서--나름대로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서양윤리학사에 있어서 감정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견해는 인간이 지닌 감성의 역할과 위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특히 감정이 이성, 육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의 불확실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인식론의 문제가 윤리학의 문제를 완전히 혼란시키거나 혹은 완전히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다면, 윤리학에서 감정과 의지를 중시한 철학자들도 여전히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아이러니이다. 데이비드 흄이 "이성(reason)은 정념의 노예(the slave of the passions)"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감정의 구조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아울러 이성과 정념의 투쟁은 사이비 문제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인과 노예의 유구한 메타포로 귀환했던 것이다. 니체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요소로 양분한 것도, 그리고 기독교적 도덕을 노예의 도덕(Sklavenmoral)이라고 비난하고 초인의 도덕을 자기가 주인이 되는 군주의 도덕(Herrenmoral)이라고 찬양한 것도 역시 유구한 메타포에로의 귀환이다. 이성과 감정에 관한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는 철학 일반에서의 이성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파장은 일파만파식으로 퍼져 나간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우위, 차이성에 대한 동일성의 우위, 이상하거나 미친 놈에 대한 정상인의 우위, 일상인에 대한 철학자의 우위, 자연적 감정의 발현에 대한 감정의 교육적 순화의 우위, 존재에 대한 당위의 우위, 감성적 여성에 대한 이성적 남성의 우위, 노예에 대한 자유민의 우위, 민주제에 대한 귀족제의 우위, 자유민에 대한 위정자의 우위, 즉각적 소비의 무산자에 대한 절제의 덕목을 가진 자본가의 우위, 낭만적 삶에 대한 계산적 이성의 우위, 감정유입적 판단에 대한 냉철한 논리적 판단의 우위, 그리고 (도덕적 감정과 정서적 고려를 중시하는) 도덕감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원리와 법칙에 의거한 행위와 의무를 중시하는) 법칙주의적 의무론적 도덕철학의 우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걸쳐있다.
흔히 칸트와 흄이 이성과 감정의 관계에 대해서 반대의 의견을 말한 철학자들로 잘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둘 모두가 이성과 감정의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이분법을 고수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이 서로 섞일 수 있는(commingled) 가능성, 즉 인지적 감정(cognitive emotions)의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지적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적 정조로부터의 일갈, 즉 "탈이분법!"의 외침에 또 하나의 사례를 더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서양철학사에서 이성과 감정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을 융합해서 어느 하나로 환원하려는--특히 감정을 이성의 저급한 종류(inferior genus of reason)인 "혼돈된 지각"(confused perception) 혹은 "왜곡된 판단"(distorted judgment)으로 환원하려고 노력한--철학자들도 여전히 그 이분법을 유지하면서, 결국에는 이성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요즈음 득세를 하고 있는 감정의 인지주의적 모델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묘한 딜레마가 잠복해있다. 감정을 인지적으로 해석하면 전통적인 이분법을 해소할 수 있으나 여전히 이성주의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을 인지적인 요소를 갖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분법을 고수하는 것이고, 결국 감정의 열등성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양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잡을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이성주의의 폐해를 이성주의를 통해서 해소하는 결자해지의 원칙을 주장하고 그 결과로 감정을 이성과 대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다. 후자의 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감정을 감정 자체에 의해서 이해하거나 찬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정 자체의 자연적 발로에 따라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그것이 풍류지도이든지, 낭만적 삶에의 침잠이든지, 사드적인 성적 충동의 무제약적 발현이든지, 돈 후안이든지, 카사노바이든지간에. 그러나 후자의 길도 "쾌락의 역설"을 통해서 배우게 되듯이 어느 정도의 금욕주의와 연계되지 않는다면 곧 발기 능력의 멸절로 이어질 뿐이다 (무절제를 위한 절제!). 이성이 처벌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 처벌하는 셈이라고나 할까. 어떤 길을 택한다고 해도, 신이나 동물, 혹은 바보가 아니라면, 어차피 우리 인생은 모순을 안고 살아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감정에 대한 오늘날의 이론과 논쟁은 철학사의 풍부하고도 착종된 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포착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감정에 관련된 철학사, 특히 서양윤리학사 읽기는 하나의 편취(騙取)--그것이 단편적 취함이든지, 편파적 취함이든지, 간편한 취함이든지, 속여서 취함이든지간에--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의 과도한 일반화와 왜곡, 그리고 생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사를 세세하게 전부 다 읽는 것은 어느 한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한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만 하겠다.
II. 이모우티비즘 유감(遺憾)
서양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를 논하면서, 빠뜨리면 내가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화를 낼 것은 이모우티비즘(emotivism)일 것이다. 이모우티비즘은 흔히 정의론(情意論)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은 이모우티비즘이 인간의 성정 중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측면(affective-conative side)이 도덕의 전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이모우티비즘이 감정적 의미(emotive meaning)를 기조로 하는 윤리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 다 약간의 문제는 있기 때문에 차리리 감정주의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정교한 합리적 선택이론이 압도하고 있는 오늘날의 서양윤리학계에서 이모우티비즘을 갑자기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은 "죽은 말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flogging a dead horse)처럼 미친 짓일 것이다. 우리의 논의는 이미 죽어버린 이모우티비즘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거나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엇인가 훔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기웃거려 보는 정도일 것이다.
이모우티비즘은 논리실증주의의 충견이었다. 이모우티비즘은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를 제외한 모든 명제들, 즉 형이상학적, 윤리적, 종교적, 미학적 명제들은 사이비 명제들로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원리"라는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했다. 그러한 이빨에는 무자비한 과학주의적인 "의미론적 사디즘"(semantic sadism)의 침이 질질 흐른다. 메타윤리학의 관점에서 이모우티비즘은 그러한 이빨을 방어할 아무런 수단이 없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이모우티비즘은 윤리적 언명이 감정 혹은 태도의 표현(expression of emotion or attitude)이나 상대방의 감정 혹은 태도를 변화시키는 수사학적 설득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술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무의미한 언명이라고 선언한다. 결국 이모우티비즘은 그 침이 흐르는 이빨을 겸허하게 윤리학적 살에 깊숙이 박히게 하는 "메타윤리학적 마조히즘"(metaethical masochism)이 된다. 한마디로 이모우티비즘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처절한 감정의 양면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모우티비즘의 주장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도덕적 언명은 시인과 불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감정을 타인에게 유발하는 것이 된다. 이모우티비즘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학의 기초에 대한 한 이론으로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어찌됐든 윤리학적 언명은 감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모우티비즘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윤리학도 감정도 모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모우티비즘의 주요한 두 가지 잘못이다. 이모우티비즘이 윤리학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윤리학적 문제를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윤리학은 기호나 선호의 시인이나 불인(approval or disapproval)의 문제가 된다: "기호에 관한 것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그러나 현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적인 병리적 파괴상을 절감하면서, 공동체주의적 덕의 윤리를 구축하려는 맥킨타이어(MacIntyre)의 주장을 들어보면 또 다른 평가도 가능하다. 그는 이모우티비즘이 주요한 도덕적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합리적 합의도 불가능한 현대 서구사회의 도덕적 병리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은 규정적 윤리(prescriptive ethics)의 관점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서술적 윤리(descriptive ethics)의 관점에서는 윤리학에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규정적 윤리의 관점에서는 이모우티비즘에게 면죄부가 발부되기 힘들다. 이것은 이모우티비즘이 감정의 표현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관계에서 규범적 오류가능성(normative fallibility)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규범적 오류가능성의 문제는 가령 이모우티비스트가 어떤 도덕 판단 S를 내릴 때 S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스스로 물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도덕 판단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판단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판단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판단을 갖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모우티비즘이 감정을 심각하게 다루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손상을 가한 이유도 아울러 밝혀준다고 소우사(Sousa)는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모우티비스트들에게서 감정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문제도 결국 쉽지 않은 문제로 나타났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의 표현과 감정의 유발도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것들이 감각적 느낌(sensational feeling)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논의되지 않고 있다. 또한 감정의 표현과 유발도 정액을 사출하듯이(ejaculation) 어떤 환호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hurrah!)--어떤 야유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boo!), 아니면 비교적 지속적인 감정의 표현과 유발도 있는지; 시인과 불인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이 쾌락과 고통과 비슷한 심리적 상태인지 또한 타인의 감정을 유발하는 속내용이 소망인지 명령인지 권고인지 설득인지 탄원인지 부탁인지도 그리고 그 속내용이 그것들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흔히 흄의 도덕감 이론이 그 역사적 기원의 하나가 된다고 간주되고 있는 이모우티비즘에서 흄이 분석한 것과 같은 감정 자체가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으로도 잘 입증된다. 소우사는 규범적 오류가능성의 문제를 결국은 마찬가지인 규범적 교정가능성(normative correctability)의 문제로 탈바꿈시킨다. 만약 이모우티비즘이 객관적인 윤리적 기준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모우티비즘은 감정 자체의 교정가능성에 대한 그러한 기준도 역시 없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모우티비즘은 감정이 객관적 도덕의 기준이 될 것이 두려워서 감정의 합리성이나 교정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스트들은 자기들의 입지를 상실할까봐 감정 자체를 단순히 순수한 사실(raw facts), 즉 평가(evaluation)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스티븐슨(Stevenson)이 도덕적 견해의 차이를 소견(belief)의 차이와 태도(attitude)의 차이로 구분한 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스티븐슨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인정됨으로써 우리가 소견의 차이에 대한 해소에 이르게 된다면, 태도의 차이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소견과 태도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인과적인 것이며, 또한 그러한 인과성도 우연적이고 심리적인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이모우티비즘이 도덕과 감정 모두에 저지른 두 가지 잘못이 결합되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도덕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믿는 부도덕한 감정에 관한 것이다. 플라톤도 언급했던 사악한 조소자(phthonic laughter)--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고 속으로 혹은 밖으로 박장대소하는 사람--의 드러난 혹은 드러나지 않은 감정의 표현과 태도를 어떻게 부도덕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모우티비즘은 어떤 사람의 행위나 선택이 그의 진정한 도덕적 신념이나 소견(moral belief)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지시자(excellent indicator)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는 점에서 윤리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모우티비즘에 따르면, 감정과 태도가 윤리적 소견이나 확신의 필수 구성요건이며 그러한 감정과 태도는 행위와 선택에서 현시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설명은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행동이 잘못이라고 느끼고 또한 잘못이라는 것을 시인하지만 그것을 행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고려에 넣을 수 없다. 고대와 중세에서 이미 널리 회자되었던 그 유명한 경구--"(주여!) 나는 그것이 더 좋다는 것을 느끼고 시인하고 있지만 왜 더 나쁜 것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까!"--를 이모우티비스트들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전통적으로 철학과 신학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지 박약"(weakness of will/akrasia)의 문제로 알려진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 심리학이 밝혀낸 사실, 즉 표현된 감정과 그 감정의 무의식적 실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의식적으로는 싫어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하고 있음을 모르는 경우처럼--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우사는 이모우티비즘이 저지른 두 가지 잘못이 결합된 것의 또 다른 예로서 "조건적인 도덕적 진술"(conditional ethical statements)의 문제를 든다. 문제의 출발점은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언적으로(hypothetically)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태도나 감정을 가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도덕적 진술을 조건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을 조건화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소우사가 든 예를 그대로 사용해보기로 하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절의 전건에 나타난 도덕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조건절을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다: "만약 남아연방에 투자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르다면, 그러한 투자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한다."("If it is morally wrong to invest in South Africa, then it should be forbidden by law.") 그러나 감정의 표현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도덕적 전건을 감정의 표현으로 대치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절이 될 것이다: "만약 제기랄, 남아연방의 투자!, 그러한 투자는 법으로 금지되어야 한다."("If Damn South African investments! then they should be forbidden by law.") 도대체 이러한 대치를 통해서 이모우티비즘이 해준 것은 무엇인가?. 감정은 조건절의 전건에 표시되거나 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감정이 전건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면, 추정적인 도덕적인 판단은 감정의 표현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만약 감정이 전건에 표시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건을 실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므로, 후건은 자동적으로 딸려 나온다. 소우사는 감정이 표현된 전건을 지닌 조건절에는 사실상 어떠한 조건적인 것도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즘은 조건적인 "도덕적 진술을 말이 안되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makes nonsense of the conditionalization of ethical statements)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모우티비즘에서 훔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 언명은 감정의 표현과 유발인데, 감정의 표현과 유발은 비인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언명은 그 진위를 판명할 수 없는 비인지적인 것이 된다는 주장이 이모우티비즘의 요체이다. 따라서 이모우티비즘은 윤리학에서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의 한 전형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각(sense 혹은 sense perception) 자체도 인지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면, 감정도 당연히 인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은 인지적 감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지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감정의 윤리학이 인지주의적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모우티비즘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나마 그 기본적인 출발점을 마련한 셈이다. 이모우티비즘이 윤리학설로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많은 철학자들도 인정하는 공헌이 있다. 그것은 이모우티비즘이 우리가 어떤 사태에 우호적인 도덕적 용어를 진지하게 사용할 때면 언제나 (혹은 대부분) 그 사태에 관한 상응하는 우호적인 도덕적 감정과 태도의 표현이 부수된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또한 (비록 논리적이고 인식적인 관점이 아니라 수사적이고 심리적인 관점에서였지만) 감정의 유발과 상호주관적 관련성을 통해서 감정의 전이성 혹은 전염성을 밝혀 놓았다는 점도 공헌으로 인정된다. 또한 이모우티비즘이 도덕적 언명에는 감정적 의미(emotive meaning)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 것도 공헌이다. 그러나 감정의 윤리학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은 이모우티비즘은 감정에 대한 "무한한 추구"의 한 출발에 불과하다고 본다. 자! 훔칠 것을 훔쳤다면 이제 미련없이 다음 장으로 옮겨가도록 하자.
III. 이모우티비즘 이후: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감정의 위치
현대 영미윤리학은 흔히 다음과 같은 여섯 단계를 거쳐서 발전해온 것으로 간주된다. 즉 직관주의(Intuitionism), 이모우티비즘, 규정주의(prescriptivism), 기술주의(descriptivism), 정당근거적 접근방식(the good reasons approach), 합리적 선택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의 여섯 단계이다. 물론 직관주의 이전에는 공리주의적 자연주의가 있었고 미국의 실용주의적 자연주의는 처음 두 단계와 중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현대 윤리학의 발전 단계를 전부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반동의 마지막 끝, 즉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감정의 위치를 간략히 찾아보려고 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은 주어진 정보(informations)와 신념(belief) 아래 자기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desire)을 가진 선택자들의 합의를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시도이다. 그러한 시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현재 영미윤리학을 풍미하고 있는 롤즈(Rawls)의 {사회정의론}과 고티에(Gauthier)의 {합의도덕론}이다. 여기는 롤즈와 고티에의 입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상황이 아니므로, 독자들이 그들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롤즈를 중심으로 하여 고티에의 입장은 언급하는 정도로, 논의하겠다.
롤즈의 정의론은 합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계약당사자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사회계층적 위치와 가치관을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 분배적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기본적인 구도를 설정한다. 따라서 롤즈가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사회계약론적 분배정의론은 합리적 선택이론의 한 부분이 된다. 무지의 장막 속에서는 각개인들의 구체적인 상황이 전부 가려져 있으므로, 롤즈의 계약당사자들은 (자신의 비관적 혹은 낙관적 경향과 같은 어떠한 심리적 태도뿐만 아니라 이타적 감정도 가지지 않는) 냉철한 합리적 선택자로 나타난다. 롤즈는 자신이 설정한 선택 모형과 가장 대비되는 것으로 흄과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 이론(moral sentiment theory)을 연원으로 하고 있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impartial sympathetic spectator)의 모형을 든다. 그리고 그러한 모형은 분배적 정의의 문제가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모형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간의 차이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한다고 일축한 바 있다.
그러나 롤즈의 정의론은 그 이면에 감정에 관한 중대한 가정을 깔고 있다. 롤즈는 우선 계약당사자들이 "정의감"(the sense of justice)과 자신의 "가치관"(the concept of the good)을 가진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이 우리의 도덕적 능력, 특히 정의감을 규제해 줄 원칙들을 제시할 "도덕감에 관한 이론"(a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또한 롤즈는 무지의 장막에서 합리적 선택자들에게 선택의 동기(motive)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분배적 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대상인 "사회적 기본가치들"(the primary social goods)의 목록 가운데에 "자존감의 기초"(the bases of self-respect)를 포함시키고 있다. 롤즈가 자존감의 기반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본가치로 보고 있는 것은 결국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 strain)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재화와 자원이 나누어지는 방식은 각자의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롤즈는 결국 "분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의 분배적 입지에 관한 우리의 감정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힌 셈이다. 목적론적 전통의 윤리학은 어떤 쾌락적 상태와 선호를 본질적 선과 정당성의 규정, 그리고 개인의 행위와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왔다. 즉 행복, 복지, 후생, 공리, 효용, 욕구의 만족 혹은 충족 등이 그것이다. 비록 롤즈는 의무론적 관점에서 자기의 정의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선이 합리적 욕구의 만족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는 목적론과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롤즈는 구체적으로 합리적 욕구의 만족 상태가 어떠한 감정 상태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기본가치들에 대한 지수(index)로서 충분히 파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이것은 롤즈만의 문제는 아니고 동시에 공리주의자들과 복지경제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롤즈는 또한 분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질투심(jealousy)과 시기심(envy)을 박멸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만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롤즈의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의 복통은 거의 완전히 치유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롤즈는 피아제(J. Piaget)와 콜버그(L. Kohlberg)의 도덕 발달심리학에도 주목함으로써 도덕적 추론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감의 형성 과정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또한 롤즈는 정의원칙을 위반했을 때 가지게 되는 죄책감(guilt)과 자존감이 상처를 받을 때 생기게 되는 수치심(shame) 등 많은 개별적인 감정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롤즈는 {사회정의론}의 제3부에서 정의감 자체가 선이 된다는--플라톤 시대부터 윤리학의 중대한 과제가 되어온--정합성을 입증하려는 원대한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롤즈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원초적 입장의 칸트적 해석을 들고 나옴으로써 그의 정의론은 두 배경적 이론들, 즉 도덕감 이론과 칸트적 의무론 사이의 정합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인의 모든 구체적이고도 경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원초적 입장에 대한 칸트적 해석은 결국 도덕론에 있어서 감정의 위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롤즈가 칸트적인 입장을 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도덕감 이론은 (칸트적 의무론을 기본적 배경으로 해서 도출된 정의의 두 원칙을 준수하려는 의무에 대한) 감정적 보충이라는 도구적인 위치만을 차지하게 된다. 최근에 여성해방론적 윤리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들어보면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롤즈의 정의론은 여성들의 고유한 도덕적 감정인 "배려"(caring)와 가족적 "연고"(connecting)를 무시하고 추상적인 권리와 정의 혹은 법칙과 의무만을 강조하는 남근숭배적 편협성에 경도되어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반면에 롤즈의 정의론에서 칸트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공리주의적인 계산적 요소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흄이나 루소의 도덕감 이론을 부각하려는 사람들은 차례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최소극대화 규칙을 기반으로 해서 최소수혜자의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증진하려는 롤즈의 "차등의 원칙"은 계약당사자들의 극도의 비관적이고 보수적인 심리적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롤즈의 정의론--특히 차등원칙--은 개인의 재능을 "공동의 자산"(collective assets)으로 간주하는 타인에 대한 공감(compassion) 혹은 동정심(sympathy or commiseration)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롤즈 정의론의 윤리학사적 배경은 칸트인가 아니면 흄인가? 합리적 선택이론이 정교하게 전개되고 있는 롤즈의 정의론의 배경에 감정에 관해서 상반된 견해를 말한 두 철학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포스트이모우티비스들에게 어찌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하리!
고티에는 합리적 선택이론 중 게임이론을 탁월하게 구사함으로써 사회계약론적인 "협상적 정의론"의 모형을 구축한다. 그러한 모형을 통해서 고티에는 복지국가의 옹호자인 롤즈와 최소국가의 옹호자인 노직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합의도덕론}에서 전개한다. 감정에 관련해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고티에가 정서성(affectivity)이 합리성(rationality)에 수반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합리성은 정서적인 것을 함축하지만 정서적인 것은 꼭 합리성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지성과 감정 모두가 그[자유주의적 개인]를 도덕적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천명한다. 그러나 고티에에게 있어서 감정은 부차적인 것이며 합리적 선택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되지 못하고 있다.
롤즈와 고티에를 종합적으로 볼 때, 합리적 선택이론과 감정을 본격적으로 접합시키려는 문제는 현대 윤리학과 합리적 선택이론, 그리고 의사결정론에서 하나의 공통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소우사(Sousa)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기바드(Gibbard)는 이러한 과제를 위한 중대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이러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다만 엘스터(Elster)는 합리적 선택이론의 기본적 구도에다 감정을 포섭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후일의 과제로 하고, 다만 그의 기본적 입장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그는 합리적 선택이론의 전형적 구도인 신념과 욕구의 모형(belief-desire model)에다 다음과 같이 감정을 포섭시키려고 한다.
행위(Action)
욕구(Desires) 신념(Beliefs)
감정(Emotions) 정보(Information)
그러나 감정의 위치 설정과 감정과 관련된 화살표들의 향방이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것을 합리적 선택이론과 감정의 만족할 만한 결합이라고 하기는 아직도 시기상조이다. 또한 감정 자체를 신념과 욕구의 일부분이거나 혹은 감정 자체가 그것들을 포함한다고 보는 이론들도 있으므로 많은 논의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엘스터의 이러한 모형은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이 인지적 신념(cognitive belief), 욕구(desires), 그리고 정서성(affectivity)의 복합체(complex)로 이루어진다는 성분 이론(component theory)을 지지하며, 그리고 소위 비의도적인 현상(non-intentional phenomena)도 성분을 구성하는(constitutive)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만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독사를 보았을 때 (그것을 독사라고 인식하고, 독사는 해롭다고 믿기 때문에, 독사에게 해를 입지 않으려는 욕구를 통해) 우리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지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보다 구체적인 논증은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그러면, 이제 감정을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와 그러한 감정의 윤리학에서는 감정의 도덕적 중요성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IV. 감정의 도덕적 중요성과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
감정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도덕철학의 영역에 유입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러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감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적 정의와 분석에 관한 인식론(epistemology)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러나 감정의 인식론 자체가 감정의 윤리학의 향방과 내용을 완전히 결정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감정의 인식론이 감정이 인지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론적으로 완전히 밝혀냈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윤리학적 위치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즉 감정의 인식론은 감정이 윤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감정의 심리적 실재론을 통해 윤리학을 재구성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감정은 합리적 선택이론에 따른 선호와 결정의 강렬도 혹은 긴박성을 나타내는 단순한 지시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객관적인 도덕적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표현 양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도덕적 객관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능력인지; 아니면 감정은 인간을 도덕적 의무와 행동으로 이끌게 하는 도구적인 역할을 가진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다른 사람을 도덕적 의무와 법칙에 따라서 경직되게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감정적으로 수용하여 시행하는 사람이 더 인간적이라는 정도의 것인지; 아니면 감정은 이성적인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 변명, 책임의 면제, 혹은 정당화를 제공하는 부차적이고 부정적인 위치만을 차지하는지를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감정의 인식론은 감정이 인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또한 이성과 비견할 만큼 인간생활의 전반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줌으로써 도덕적 영역에서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감정은 동물이나 식물의 종처럼 자연적 집합(natural class)은 아니다. 따라서 감정에 대한 이론의 종류는 철학 이외의 다른 학문을 포함해서 세세하게 나누면 수백종에 이르며, 감정이 인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수십종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전부 열거해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감정은 감각적 느낌 혹은 기분(feeling)으로서 흔히 생리적 반응을 수반하거나, 혹은 감각적 느낌 자체가 생리적 자극과 반응에 의해서 촉발 혹은 병발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우리가 내성(introspection)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행동주의적 이론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현시된 감정을 중시하고, 프로이트적 감정론은 감정의 무의식적 요소를 강조하며, 융(Jung)은 민족의 집단적인 무의식적 정조까지 가능한 것으로 본다. 반면에 감정의 인지주의적(cognitivistic) 입장은 감정이 단순히 감각적 느낌만이 아니라고 보고, 감정이 가지고 있는 지향성 혹은 의도성(intentionality)을 부각시키면서, 신념, 판단, 평가, 사유, 구성, 관점, 관심과 고려, 합리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의 인지주의적 요소를 말하고 있으며,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거나 그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시키기도 한다. 또한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생물학, 진화론, 문화인류학, 뇌신경생리학 등도 나름대로 감정을 규정하는 독특한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감정 중 어떠한 감정이 기본적이고 원초적인가, 어떠한 감정이 부차적이고 학습적인가에 대해서 많은 이론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하이데거를 통해서 불안과 염려가 삶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정조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감정의 윤리학에서 무엇이 도덕성과 관련해서 기본적인 감정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나타난다. 감정의 윤리학의 구체적인 내용과 향방은 이러한 기본적 감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감정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론적 논의를 배경으로 감정의 윤리학에 관련된 문제들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감정의 윤리학은 우선 다양한 기존의 규범적 윤리학을 배경으로 해서 부분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즉 감정의 윤리학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여성해방론적 윤리학을 배경으로도, 사회생물학적 발견에 힘입거나 아니면 윤리학적 전통에서 이타주의 윤리학을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배경으로도, 맥킨타이어처럼--비록 그가 이모우티비즘을 개인주의 사회의 필연적 귀결로 비난하기는 했지만--애국심과 공동체적 소속감과 같은 지속적이고 사회적인 감정을 존중하는 공동체주의 윤리학과 타인에 대한 감정적 고려와 아울러 자기의 감정을 훌륭히 조절하는 책임을 지닌 인격과 덕에 관한 윤리학을 배경으로도, 혹은 사회적 연대감(social solidarity)을 강조하는 로티(Rorty)식의 자유주의를 통해서도, 그리고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정적(有情的) 존재(sentient beings)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관한 계산 대상으로 하는 공리주의를 통해서도 전개될 수 있다. 공리주의 일각에서는, 불교의 자비심처럼, 유정적 존재의 감정적 수용능력이 도덕적 고려의 기준이 되면, 인간과 동물에 동일한 위상이 부여됨으로써 편협한 인간중심주의(human chauvinism)가 아닌 (적어도 동물중심주의 혹은 더 나아가서 생명중심주의라는) 환경주의가 도출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생명에의 외경"을 주창했던 슈바이처는 일찌기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감정을 윤리학의 기초로 삼으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다.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그러한 시도들이 감정 자체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와 그것들이 감정을 도덕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들을 밝혀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도 윤리학적 전통과 다른 관련 과학들의 전통과 무관하게 갑자기 돌출되어 나온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윤리학과 과학적 전통에 맥을 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감정의 윤리학이 전통적으로 감정을 윤리학에서 배제하려는 주장들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지도 아울러 밝히려고 한다.
칸트를 비롯해서 감정을 윤리학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 감정은 순간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2) 따라서 감정적으로 동기화된 행동은 신뢰할 수 없고, 비일관적이며, 무분별하고, 심지어 불합리한 것이기까지 하다. (3) 어떤 상황의 선악과 정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감정으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한다. (4)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수동적이 되므로 책임을 질 수 없다. (5) 감정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사람에 관련되기 때문에 이성적 도덕에 요구되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감정은 원칙에 근거하지 않는 "편파성"(partiality)을 드러낼 뿐이다.
많은 저작들이 있기는 하지만,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에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저작은 다음 3가지이다. 즉 소우사(Sousa)의 {감정의 합리성}(1987), 기바드(Gibbard)의 {현명한 선택과 적절한 감정}(1990), 오우클리(Oakley)의 {도덕성과 감정}이 그것들이다. 본격적인 감정의 윤리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기바드와 오우클리의 저작 둘이나, 소우사는 감정의 인지주의설 중 윤리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의 합리성과 평가적 신념(evaluative belief)을 기본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을 언급하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이 세 저작들을 세세히 논한다거나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려는 과욕을 부릴 수는 없다. 우리의 논의는 다만 전통적으로 감정이 윤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러한 저작들이 어떻게 답변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제한적 입장을 가질 뿐이다.
감정의 인지적 기초에 대한 인정은 감정의 합리성에 대한 관심을 당연히 불러 일으킨다. 전통적으로 감정은 불합리할(irrational)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것과 무관한(non-rational) 것으로도 간주되어왔다. 그 이유는 감정을 단순한 느낌이나 생리적인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감정은 두통과 같이 합리적인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분노와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는 데는 어떠한 이유(reasons)가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정당한 이유인가 아닌가(good reasons or not)는 또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감정을 비합리적인 것 혹은 불합리한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전혀 혹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감정 자체는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적절하거나 부적절하거나, 분별이 있거나 무분별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한 구분은 감정의 발현이 배경적 상황에서 볼 때 수용될 만한 것인가의 여부 뿐만 아니라 (여기서 사회적 상황은 중요한 것으로 작용한다), 개인의 지각과 신념과 욕구에 관련해서도 내려질 수 있다. 감정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지적인 요소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념과 의도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인식적 윤리적 기준을 통해서 감정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 감정은 상황에 맞는 것인가? 그 감정은 사실을 고려에 넣고 생긴 것인가? 그 감정의 배경이 되는 인식과 평가는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라는 일련의 질문을 유의미하게 제기할 수 있다. 소우사에 의하면, 우리는 감정의 근거들을 포착하지 않고서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러한 근거들은 나아가서 우리들에게 평가의 토대를 제공해준다. 여기에 관련된 최근의 논쟁들은 그러한 근거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며, 또한 감정의 합리성이 보다 충분히 숙고적이고, 명료한 행위들의 합리성과 비교될 만한 것인지의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 감정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논의를 배경으로 해서 소우사의 입장을 알아보자. 소우사는 "감정은 철학의 중추를 형성한다. 그것은 인식론, 존재론, 철학적 심리학, 그리고 윤리학의 문제들로 우리를 인도한다" 고 서두를 연다. 그의 {감정의 합리성}은 합리적 삶에 있어서의 감정의 위치를 정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는 합리적 삶에서의 감정의 도구적 역할을 탐구함으로써, 감정이 어떻게 그러한 삶의 한 구성요소가 되는지를 밝힌다.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환경에 대한 많은 정보들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과다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특정한 신념과 욕구를 형성하고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대부분의 것들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우사에 의하면, 감정은 정보의 "현저성"(salience)을 조건화함으로써 과도한 정보로부터 우리들이 마비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이 바로 감정이 합리적 삶에 공헌하는 주요한 기능이다. 이러한 공헌은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감정은 생물학적으로 유용한 것인데, 왜냐하면 감정은 많은 정보에 노출된 유기체가 정보를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이 세상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정의 다윈적인 선택(Darwinian selection)을 설명해준다.
소우사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또는 비도구적으로 합리적인 감정들도 존재한다. 감정은 대략적으로 언어가 학습되는 방식으로 학습된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죽음 등의 범형적 사례(paradigm cases or scenarios)에 친숙해짐으로써, 어떤 특정한 감정 형태들의 독특한 대상들(objects)과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반응(response)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감정이 본질적으로 합리적이 되는 경우는, 그 감정의 대상이 세계의 어떤 실재적인 대상일 때, 그 대상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적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감정은 암묵적으로 가치론적 속성(axiological properties)을 지향적 목표가 되는 대상에 부여한다.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감정들은 그러한 목표들에 관련된 대상의 속성들에 대한 일종의 지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어떤 감정들은 단순한 주관의 투영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실재적 속성에 대한 "객관성의 포착"이 된다. 이것은 소우사가 플라톤의 대화편 {유티프로}(Euthyphro)에 의거해서 "유티프로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뢰감(trust)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신뢰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신뢰감을 단순히 투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의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천인공노할 사건은 분명히 모든 사람을 노하게 하는 어떤 공통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우사가 주장하는 감정의 객관성은 윤리학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이모우티비즘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일종의 도덕적 실재론(moral realism)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합리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실재론적인 가치적 속성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감정의 기초에 놓여 있는 범형적 사례는 감정이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소우사는 특정한 시간과 환경에서 결국 개인이 감정의 담지자가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일종의 도덕적 개인주의로 환원한다. 소우사는 우리의 감정은 최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계의 가치론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본다: "모든 개인성이 함축하고 있는 죽음, 상대성, 그리고 고독은 ... 우리의 감정적 삶의 본질적 요소이다." 우리가 그러한 비극적 세계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결단도 내린다. 그러한 계획과 결단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합리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소우사는 그러한 합리성의 기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감정적 삶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우사의 이러한 결론은 불안과 부조리 등 감정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던 실존주의자들을 연상시킨다. 물론 실존주의의 전형적인 비합리주의(irrationalism)를 소우사는 배척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정의 합리성은 철학사에 중요한 문제로 항상 간주되어 왔던 감정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철학의 중심무대로 옮겨 놓는다. 윤리학적으로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도덕성과 감정이 가지고 있는 상호 관련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기바드의 {현명한 선택과 적절한 감정}은 출발한다. 기바드는 이모우티비즘에서 유전된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물론 이모우티비스트들과 달리 기바드에게서 도덕을 훼손하려거나 감정 자체에 손상을 가하려는 의도는 전무하다. 그의 입장은 소위 "규범표현적 분석"(norm-expressivistic analysis)으로서 도덕성뿐만 아니라 합리성 전반에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규범을 우리가 수용한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표현적 분석은 합리성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즉 어떤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에 하나의 독특한 속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는 소우사式의 인지주의--을 거부한다. 그런데 기바드는 전통적인 이모우티비즘적 비인지주의와도 약간 입장을 달리한다: 즉 "도덕판단은 감정이 아니라 어떤 도덕적 감정을 갖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기바드는 규범표현적 분석을 진화론적 생물학의 배경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인간의 문화적 삶에 있어서 규범의 위치를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규범은 인간의 상호협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삶의 전략이다.
그런데 규범은 행동뿐만 아니라 감정에 동시에 관련됨으로써 도덕적 판단의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 기바드는 규범의 기초적 감정으로서 죄책감(guilt)과 분노(resentment)를 든다: "어떤 한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이고, 또한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분노를 느끼는 것이 합리적일 때 오직 그때뿐이다(...if and only if...)."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생각은 죄책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도덕적 판단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아무런 잘못도 안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바드는 이러한 경우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makes no sense) 그러한 감정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도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 있으며, 도덕적 판단은 어느 때 죄책감과 분노가 적절한지에 관한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분노의 느낌이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반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고, 과도하게 분노할 수도 있다. 또한 도덕적으로 사악한 의도를 가진 분노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반론은 순환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비난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은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신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념이 규범적 판단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바드는 도덕적 판단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책감과 분노에 호소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그러한 죄책감과 분노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도덕적 신념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순환성의 문제는 그의 비인지주의적인 규범표현적 분석 전체에 심각한 손상을 가한다. 그렇다면 이모우티비즘을 합리성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단정을 내리기 전에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양심, 양심의 가책, 죄책감, 그리고 분노가 도덕성(혹은 도덕성의 학습, 형성, 표현)에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의 다양한 심리학적 이론들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는 폭넓은 학제적인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바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감정이 문화제한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문화권에서는 감정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의 합리성과 그것에 의거한 도덕적 판단은 결국 지방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문화권에 통용되는 도덕적 판단은 없다는 지방주의(parochialism)를 주장하고 있다.
오우클리의 {도덕성과 감정}은 감정의 합리성과 도덕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속에서 감정의 윤리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그러면 오우클리는 감정의 합리성과 도덕성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는 부당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의 입장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첫번째의 분노는 합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타당하지만, 두번째의 분노는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또한 우리는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만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감정,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 대한 형제애(brotherly love)를 품을 수도 있다. 오우클리는 두번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도덕성과 합리성은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에 감정의 합리성이 감정의 윤리학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우클리의 생각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우리의 주요 관심은 합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타당하지 않거나 무관한 감정의 문제이다. "우는 아이 떡 한 개 더 준다"라는 말과 "눈물은 여자의 무기이다"라는 말을 잘 음미해보자. 의도적으로 운다는 전제 아래, 그것들은 (물질적 자원이나 타인의 관심과 위로와 같은 정신적 고려를 막론하고 감정을 통해서 자기의 분배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위협적 이득의 전략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배적 정의론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소위 "타인으로부터의 이중적 고려"(double counting)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적 고려를 위한 전략적 울음은, 마치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하는 소년의 말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지만 한번 속고 난 다음부터는 믿지 않듯이, 지속적으로 효과적이 아니다. 계속해서 우는 아이는 떡이 아니라 볼기를 맞을 수도 있으며, 계속 우는 여자는 볼쌍 사납고 어찌 해볼 수 없는 막무가내로 사람들의 눈에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아이와 여자는 울음을 그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에 있어서 도덕성과 합리성은 궁극적으로 상호수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고티에와 기바드가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선택이론이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현대 윤리학의 중차대한 문제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오우클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의 관점에서 윤리학에서 감정의 위치를 정립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 덕목은 우리에게 올바른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대상을 향한 적절한 정도의 올바른 감정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오우클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윤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행복(eudaimonia)에 있어서도 감정의 위치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감정을 "인식, 욕구, 정서성"이라는 세 요소가 역동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복합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논의를 전개한다. 첫째, 동정심과 공감과 같은 이타주의적 감정은 다른 사람의 처지와 경험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필요에 대해서 보다 감수성 있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뿌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둘째, 감정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보다 강하고 심원하게 결속시킬 수 있다. 그러한 감정적 결속은 안정감과 환희, 즉 삶의 맛을 준다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감정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연고적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과 같은 감정은 타인을 하나의 인격체와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감정은 다른 사람과의 결속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에 강한 헌신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상에 감정적으로 결속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에도 그것을 포기하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서 순수성과 고결성을 상실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넷째, 타인과 우리의 이상에 관한 헌신적 감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긍감(self-esteem)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우클리의 이러한 네 가지 주장을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해보자. 기본적으로 오우클리의 주장들은 우리의 상식적 신념, 즉 고통은 나누면 감소하고 환희는 나누면 증가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흔히 비도덕적 혹은 도덕과 무관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분노, 슬픔, 그리고 좌절도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과 타인과 우리의 이상과 자긍감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데에서 온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불행한 감정들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 때 우리 인생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감정들을 단절하려고 노력했던 많은 신비주의적, 종교적 시도들의 최종적 목표((ecstasy; nirvana)도 결국 어떤 감정 상태가 아닌가?
더 나아가서, 오우클리는 어떤 사람의 인격이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감정은 행운과 불운처럼 단순히 닥쳐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엄밀한 구별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감정은 확실히 "우리의 상황적 특징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닌 감정을 통해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혹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와 같은 엄격한 기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타인에 대한 존경과 경멸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을 평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후자의 기준이 아니라 전자의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감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오우클리는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과 관련해서 수동적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감정이 초래할 반응과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고, 비록 성공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우클리는 예견과 통제적 조치의 가능성이라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인격은 그 인격이 가진 감정에 관련해서 평가될 수 있는데, 그러한 평가는 존경과 경멸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혹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기준의 관점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우클리는 감정의 욕구적 측면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의지의 문제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납득할 만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행위뿐만 아니라 감정에 관한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 문제는 유구한 철학적 전통을 가진 복잡한 문제이다.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감정에도 박약(emotional akrasia)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은 그것을 품을 이유와 근거가 사라졌거나 혹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민족은 "한(恨)의 정서"를 통해서 일찌기 이러한 감정 현상을 깨달아 왔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시절이 왔으니 이제 맺힌 한은 풀려야 하지만 "그래도 한은 남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감정과 의지와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이 예견적 지성과 통제적 조치의 선택과 실행에 관련된 실천적 이성과 갖는 복합적인 관계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감정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지정의(知情意)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구분은 몇 세기전 아니 2천년전 과거의 퇴물에 불과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도 유력한 민간 심리학(folk psychology)인가? 윤리학에도 주지주의적, 주정주의적, 주의주의적 전통이 면면히 존재하고 있다. 지에도 정의적 요소가 있고 정에도 지의적 요소가 있고 의에도 지정적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지의 꿈 속에서 정의 꿈을 꾸고, 정의 꿈 속에서 의의 꿈을 꾸고, 의의 꿈 속에서 다시 지의 꿈을 꾸는 영겁회귀의 거대한 삼환 환몽(三環 幻夢)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삼환 환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정(情)은 오직 몽정(夢精)뿐이거늘! 여기서 필자는 도로아미타불, 감정 공부 헛수고했다는 낭패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V. 결론: 이성과 감정의 윤리학적 통합과 그 과제
우리는 서양윤리학에서 이성과 감정의 위치에 대한 탐구를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라는 단초에서 출발하여, 서양윤리학사를 절취해보고, 이모우티비즘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합리적 선택이론에서의 감정의 부차적 위치를 확인하고, 감정을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감정의 윤리학의 최근 면모를 안쓰럽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비록 딜레마는 남아 있고, 감정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회의를 내비추기는 했지만, 이성과 감정의 전통적 이분법을 탈피하고 감정의 예종적 애로에 활로로 터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논의를 진행하려고 했다. 서양윤리학의 주노 이분법은 중국철학에서는 "이성으로 감정을 순화 혹은 통제하는 "이리화정"(以理化情) 혹은 "이성제정"(以性制情)으로 나타난다. 동방이나 서방이나 감정의 애로 사항은 동일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성과 감정의 전통적인 주노 이분법은 너무나 많은 폐해를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그 교육적 폐해를 언급해보기로 하자: "인식과 감정의 적대적 관계는 양자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그것은 과학을 기계화하고, 예술을 감상주의화하는 한편, 윤리학과 종교를 정서와 비이성적인 헌신이라는 두 늪 속으로 빠뜨린다. 교육은 두 개의 기괴한 분야로 분리된다--가슴이 없는 지식과 생각이 없는 감정."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감정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교육적 비극을 영속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예술적, 체육적 정서순화 교육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전인 교육(education for homo totus)을 하자는 것이며, 이성의 우세한 위치만을 강조하는 부분적 인간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homo partialis)은 안된다는 것이다. (심각한 논의 가운데 가볍고도 씁쓸한 농담이지만, 음악 들으면서 수학 풀면서 손으로 연필 돌려가면서 공부(工夫/쿵푸!)하고 있는 신세대 학생들을 볼 때마다, 야! 제들이야말로 선생님들이 교육시켜주지 않는 "지덕체의 동시적 함양"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한 우리는 억제되어야 할 감정과 정념이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감정들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해서 감정 전체가 간단히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윤리학사에서 감정의 위치는 다면성을 띠어 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즉 감정은 도덕의 적으로도, 도덕의 기초로도 간주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양자의 결합으로 간주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윤리학에서 감정 전체의 위치를 일괄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무의미하고; 영국의 도덕감 학파처럼 동정심, 공감, 관용과 같은 도덕적 정조(moral sentiments)를 선별하여 도덕의 기초로 삼거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각기 다른 감정들의 도덕적 위치를 그것들의 중용적 수용 여부(aurea mediocritas)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느낀다. 우리는 감정 전체에 대한 보편론이 아니라, 개별적 감정들에 대한 세세한 결의론(決疑論/casuistry)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감정의 도덕적 위치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점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여성해방론적 윤리학과 공동체주의적 윤리학이 (자기 이익의 추구라는 합리적 선택이론에 의거한) 자유주의 윤리학에 대해서 제기한 비판을 감정의 관점에서 간략히 언급했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과 권리가 여성적 배려와 연고, 그리고 공동체적 소속감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도덕철학에 있어서 이성과 감정 양자의 조화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는 합리적 선택이론과 감정이 완전히 융합되지 않는 한 손쉽지는 않을 것 같다. 감정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관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부도덕한 감정들의 전형인 인종차별, 계층차별, 성차별, 지역차별에 관련된 감정들이다. 우리가 고질적으로 여기는 지역감정도 감정에 대한 그러한 지배현상의 한 전형이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모두 어느 정도 이러한 부도덕한 감정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공동체주의가 유독 애국심과 공동체적 소속감등 우호적인 도덕 감정만을 내세우면서 자유주의는 추상적 권리와 원칙에만 근거하고 있다는 비판을 전개하는 것은 편파적이라고 느낀다. 감정의 인지주의는 어느 정도 감정의 윤리학의 등장에 대한 견인차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구체적인 행동 및 삶의 양식을 꾸려나가는 주요 원천이 합리적 이성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감정은 이제 중심적인 연구대상이 되었다. 감정은 인간 정신의 사소한 파생물이 아니고 기억과 판단, 평가와 학습 등 고도의 이성적 사고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감정의 인지주의가 하고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감정의 인지주의의 배경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서 염려하는 "나르시시즘적 배려"가 자리잡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도덕의 감정적 동기를 무시한다면, 윤리학은 감정적 동기와 형식적인 도덕판단과 의무 사이의 "자아분열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감정의 윤리학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을 논의했을 때, 그것들을 평가하기 위한 대립적 배경으로 칸트를 위시한 의무론적 보편주의자들이 감정이 도덕적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었다. 그 중 감정의 "변덕성"과 "불합리성"은 감정이 습관을 통해서든지 헌신을 통해서든지 지속적 성향으로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감정이 합리적 이유를 가질 수 있고 또 그 이유가 평가될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으로 답변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도덕적 상황의 정확한 판단을 위한 감정의 배제"는 오히려 감정적 배려와 관심이 없이는 "나 몰라라"하는 수수방관적 태도를 취할 수가 있다는 점과 정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처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답변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의 윤리학이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서 감정의 "특수성"과 감정의 "책임에 관련된 자유의지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감정의 윤리학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방법론적 난제를 언급했다: 즉 감정을 도덕적 기초로 할 때, 감정 자체가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선재적인 도덕적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순환성"의 문제이다. 감정의 윤리학에 관련된 이러한 세 가지 문제들, 즉 자유의지의 문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 그리고 방법론적 순환성의 문제는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들이므로 여기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겠다. 다만 감정의 특수성에 관련된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첫째는 기바드가 주장한 것과 같이 보편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감정의 특수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윤리학적 보편주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감정적으로 연계된 특수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유티프로}에서 공자는 {논어}에서 각각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를 처벌하려는 자식에 경악한 바 있다. 동양철학의 전통을 구체적으로 빌려 말하면, 묵자의 무차별적 겸애설(兼愛說)은 맹자의 차등적 인(差等的 仁)으로 충분히 비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특수성이 몰고 오는 폐해도--정실주의, 충과 효의 권위주의적 강조, 연고주의, 지역주의, 친인척등용주의, 가족적 이기주의 등--적지 않은 실정이므로 이러한 문제를 감정의 윤리학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중대한 과제가 된다. 둘째는 감정이 꼭 특수적인 것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정심과 공감에 근거한 흄이나 루소의 도덕감 이론은, 각각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론과 보편의지론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서양윤리학사에서 절대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보편주의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고전적 공리주의의 방법론적 기초로서 흄의 공평한 동정적 관망자론을 비판했던 롤즈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칸트적 보편화가능성의 원리를 규정주의의 중요한 방법론적 정초로 삼고 있는 헤어(Hare)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그는 타인의 위치에 우리 자신을 이입시키는 "동정적 상상력"이 없다면 보편화가능성의 원리는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러한 동정적 상상력은 기독교적 황금률과 공자의 충서지도(忠恕之道)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문제들을 혼란스럽게 열거만 했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엄습해온다. 무지를 더 큰 무지로 율(律)하는 것이라!(Ignotum per ignotius). 이 논문은 기껏해야 감정 공부 좀 더하자는 하나의 감정 표현에 불과할 뿐, 감정에 대한 인식론적 윤리학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명쾌하게 해석하거나 해결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감정적 합리화로 위안을 받아야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 오랫동안 철학에서 배제됨으로써 우리는 이성과 감정에 관한 전통적 주노 이분법에 의거한 치유술로서의 철학적 윤리학의 공헌도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를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세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만, 철학은 리어왕처럼 자신의 영지를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등 다른 인접과학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스스로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알지도 못하고 치유하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만학의 왕"이 되었다. 감정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철학자들의 감정론은 이제 상식에 되어버린 뇌의 양반구 역할분담 이론, 즉 이성은 뇌의 좌반구에, 감성은 뇌의 우반구에 자리잡고 있다는 뇌신경생리학의 정설(가설?)을 말없이 따르고 있는 것일까? 감성의 철학을 위해서 나의 오른쪽 반쪼가리 뇌만을 지긋이 눌러나 볼까부다.
최근에 임상철학과 철학적 상담의 부활을 통해서 철학의 유구한 치유적 전통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어서 주목된다. 임상철학의 가능성은 어떤 면에서 철학이 감정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철학자들은 대개 초연하고 엄숙하고 목석같이 무표정한 얼굴(philosophic poker face)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정신적 위안 특히 감정적인 위안과 카타르시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환락의 도시 서울에서 위안부를 찾아 육체로 파고드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기쁨조가 필요한 이상한 나라의 지도자보다도, 시바스 리갈병만이 덩그러니 남았던 궁정동 파티에서 "그 때 그 사람"이 되었던 우리의 영도자보다도, 그리고 청천벽력처럼 다리가 무너져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보다도 더 심각하게) 어떤(?) 위안을 찾고 또한 그러한 위안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잘못된 시대의 잘못된 환경에서 철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의기소침하고 능력도 없는 "못난이 철학자"(Invita Minerva)로 자조하는 회색빛 무드에 젖어 있는 것이 우리 철학자들의 숨길 수 없는 감정적 실상이 아닌가? 철학한답시고 우왕좌왕해봐야 그것은 "실망에 이르는 첩경"(the highway of despair)에 불과함을 우리들은 익히 깨닫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들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비극을 깊이 절감하고 철학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철학이 주는 무게로 지탱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실존주의적 감정은 단순히 병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는가? 철학의 시작은 "경이감"(Taumazein, Staunen)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 철학자들의 삶에는 아무런 경이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경이감도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무표정한 "젊은 철학자들의 자화상"은 서서히 일그러져 가고, 그 표정 속에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또 다른 얼굴이 숨겨져 있다. 그 숨겨진 성난 얼굴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얼굴 표정은 감정의 진화론적 표징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철학자들이여! 우리들의 자화상에 어떠한 감정의 어떠한 진화론적 표징을 남길 것인가?
역사의 종언을 부르짖고 있는 후쿠야마(Fukuyama)는 헤겔적인 상호인정 투쟁과 플라톤적 기개(thymos)가 세계사의 원동력이 되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의 종언 시대에는 아마도 권태감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권태감, 그렇다! 기나긴 철학 논문을 읽은 뒤에는 언제나 권태감이 바늘의 실처럼 따라온다. 노래방에라도 가야겠다. 그리고 감수성 풍부하고 혈기방장한 몇몇 철학자들과 어울려 감정의 위대한 해방자인 술의 신을 찬양하는 바커스의 오르지(Bacchanalian Orgy/Revel/Der Bacchantische Taumel)라도 벌려야겠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소크라테스여, 노래하라!(practice music!)"고 강권한다. 공자는, 니체의 권고도 없이, 이미 2천5백년전에 노나라 노래판에 출입할 줄 알았던 이성과 감성의 조화자가 아니었던가!(論語, 述而篇: 공자께서 남과 같이 노래하다가 상대가 잘 부르면 반드시 되풀이하도록 부탁하고 이에 합창하셨다/子 與人歌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고 而後和之러시다). 또한 {논어}는 학문과 친구와 자존감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또한 왕양명이 좋아했던 {대학} 傳6章의 그 유명한 구절--성의(誠意)는 "악취를 싫어하듯 호색을 좋아하듯"(如惡惡臭 如好好色) 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도 공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성리학자들은 공자가 과연 도덕의 선정주의(煽情主義)를 옹호했겠느냐고 화를 내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하겠지만. 그러나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서양철학사에서 죽어버린 이모우티비즘을 옳게 부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헤겔, 니체, 심지어 칸트를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이 "열정 없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된 적이 없다"(Nothing Great has been done without passions)는 금언을 애용한 바 있다. 우리는 그 말이 도덕철학과 일상적인 도덕적 삶에서도 역시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구절을 끝으로 인용하면서, 감정과 감정의 몸을 밝히려는 그 욕망 자체로(furor scribendi) 말미암아 괴로웠던 이 기나긴 논의를 레테강 건너의 망각의 피안이나, 생사 고해 건너의 열락의 세계로 소멸시켜 버리는 방도나--아! 나의 Ewig-Weibliche는 어디에?--찾아 보아야겠다:
"도덕에 관한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도덕에 열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고 도덕에 정신적 온기가 결부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경직되고 형식적인 정직성에 불과하다. 진정한 도덕성은, 아름다움처럼, 지성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도덕은 안으로부터 타오르는 따스한 불길로서 고양된 타인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