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많고
땅 좋은 곳
만주 봉천은 못 살 곳
왜 왔느냐
왜 왔느냐
자곡자곡이 피땀이라
고향산천이 어디메냐
황해도
신재령
나무리벌
두 몸이 김매며 살았지요
올벼 논에 닿은 물은
츠렁츠렁
벼 자란다
신재령에도 나무리벌
나무리벌은 황해도에 있는 재령평야를 말한다. 재령평야는 재령, 봉산, 신천, 안악, 서흥, 평산, 황주, 해주 등 8개 군을 거쳐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재령강의 하류 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한자로는 여물평(餘勿坪)이라고도 하는데, 전라도 김제의 만경평야 다음 가는 곡창지대로 알려졌을 만큼 물자가 풍족해서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소월의 시 「나무리벌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무리벌 농민들이 일제의 수탈정책에 시달린 설움과 그로 인해 촉발된 농민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도 많고 / 땅 좋은 곳’인 나무리벌의 비극은 일본이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시작된다. 이곳에 동척농장을 세운 일본인들은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농사짓게 한 다음 쌀 생산량의 70%를 반출해 감으로써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러한 횡포를 참지 못한 농민들이 두 차례에 걸쳐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격렬하게 저항하자 잠시 일본인들의 이주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많은 농민들이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김소월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24년 11월 24일 자 동아일보였다. 나무리벌 소작쟁의가 일어난 게 1924년이고, 그해 9월 26일부터 10월 3일까지 동아일보는 이 문제를 다룬 사설을 연재했다. 그러므로 이 시가 나무리벌 소작쟁의로 인해 쫓겨난 농민들을 생각하며 쓴 시라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억울하게 만주 봉천으로 추방당한 농민들이 눈물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절절이 담아낸 수작(秀作)이다.
그런데 내용뿐만 아니라 운율이며 행 나눔 등 형식 면에서도 나무랄 바 없는 이 작품을 소월은 자신의 시집에 싣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월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은 1925년 12월에 발간되었다. 소월은 시집을 묶으면서 어떤 시를 넣고 어떤 시를 뺄지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그 고심의 범주에는 작품 수준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들도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소월은 1923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해 가을에 일어난 관동대진재로 인해 귀국한 다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인 평안도 정주 곽산에서 지냈다. 그 무렵 주재소와 면사무소에서 소월을 자주 호출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많이 배운 만큼 나라와 고장을 위한 일에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 요청이지 회유와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과정에서 소월의 시에 대한 이야기들도 오갔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행히 동아일보에는 실렸지만 그 후 이 시의 불온성에 대해 일본 관헌들이 물고 늘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작품 말고도 대표작 중 하나인 「옷과 밥과 자유」 역시 시집에 빠져 있는데,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출처] 김소월 시 재미있게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