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2-2), 세 번째 교회, 버가모 교회, 타협과 혼합의 시대
기간: AD 313~538년, 타협과 혼합의 시대
<버가모 교회의 신학이 된 나골라당>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제1세기의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태양신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시킨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는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귀에 그런 철학적 주장은 매우 고상하게 들렸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골라당 교리는 크게 환영 받는 교리로 자리 잡았다.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태양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들의 입지를 지켜주는 강력한 신학이 되었다.
니골라당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고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라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사탄은 이런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까지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니골라당의 또 하나의 의미는 무자격한 성직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로마의 국교로 채택된 정치적으로 혼합한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로마 국민 다수에게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와 관련이 없는 학교 졸업장에 의한 성직자제도의 설립이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거짓 구원론과 졸업장에 의한 무자격하고 부패한 사제와 목사 안수의 그 원조를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혼합된 교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수요가 급증한 성직자의 수를 채우기 위해 소정의 과목을 이수했다는 졸업장만으로 성직자로 임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통제 불능의 수많은 무자격의 이름뿐인 가짜 신학교의 원조가 바로 니골라당이다. 시설도 교수도 학생도 없는 곳에서 자기들끼리 졸업장과 하물며 박사학위까지 사고파는 부실한 신학교와 가짜 목사와 가짜박사가 수없이 독버섯처럼 펴져나갔다.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도 모를 정도로 교회는 원천적으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뜻한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 22).
버가모 교회에서 발람의 죄에 빠진 지도자들은 돈과 세속과 권력을 탐하였고, 그런 모습을 본 사탄은 버가모 교회 속으로 니골라당의 교리를 깊숙이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버가모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두려운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 물결과 안일함과 부패가 현대 기독교회에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제2의 종교개혁이 없이는 그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특히 성직자들의 질과 수준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의 의미를 곡해시키는 니골라당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포장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교인들이 불순종과 세속적인 삶 속에서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굴절된 확신 속에 살아간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예수님) 네게(버가모 교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예수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셨다.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칼-말씀)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하셨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이 보살피고 인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싸우는 교회가 되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가 얼마나 악한 것이면, 예수님께서 직접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하셨을까?
소수의 충성된 안디바는 목숨을 걸고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를 전했다. 버가모 시대에는 안디바가 예수님께서 직접 붙잡으시고 사용하신 종들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발람의 죄에 빠진 교회 지도층을 따라갔다.
<예수님의 약속>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the hidden manna)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약속을 허락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는데, 하나는 “감추어진 만나”이고, 다른 하나는 “흰 돌”과 그 위에 새겨진 “새 이름”이다. 감추어진 만나는 무엇이고, 흰 돌과 새 이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만나>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놀라운 양식을 준비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라”. 이른 아침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 밖에 나가면, 지면에 내린 만나를 볼 수 있었다.
만나라는 단어의 뜻은 영어로 “What’s this?(이게 무엇이지?)”라는 뜻이다.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왔는데, 그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로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수님을 표상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만나)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 만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은 감추어진 만나이다.
버가모 교회에서 만나는 감추어졌다. 왜 만나가 감추어졌을까?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감추어지게 된 것이다.
돈과 권력을 사랑한 발람과 같은 교회지도자들이 이교도의 우상숭배와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니골라당 교리를 받아들여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넓은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에서 만나, 곧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감추어졌던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먹었는데, 버가모 교인들도 날마다 그렇게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이 발람의 교리를 받아들였고, 니골라당의 교리가 버가모 교회 안에 높이 세워졌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만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교회에서 올바른 복음과 가르침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교인들은 말씀의 기근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거절한 사람들은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 그들에게는 감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만나가 사라진 버가모 교회에서 날마다 예수님께로부터 만나를 공급받은 성도들은 이기는 자들이 되었다.
<흰 돌>
서머나 시대에는 법정에서 재판을 할 경우, 흰 돌과 검정돌을 사용해서 재판 결과를 나타내었다. 흰 돌은 무죄 석방을 나타냈고, 검정돌은 유죄를 나타냈다.
또한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도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자유인이 된 사람의 새로운 이름을 흰 돌 위에 새겨주었다.
그리고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검투사에게도 주어졌다. 이처럼 버가모 시대에 흰 돌은 무죄와 자유와 승리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거절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흰 돌, 즉 죄를 사해주시고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승리를 허락해 주셨다.
지금도 흰 돌을 받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받아 먹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애의 주인이 되어 인도해 주신다. 그리하여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세속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말씀이 생애를 인도하여 변화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바로 그것이 흰 돌을 받는 경험이고,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기는 경험인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흰 돌 위에 새겨진 이름은 그 사람 자신밖에는 알 수 없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