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말고 스텔라>
-마이클 말론의 「붉은 흙」을 읽고
(마이클 말론, 「붉은 흙 Red clay」,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 황금가지, 2006)
195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테르모필레 최고 부자 휴 도일이 죽었다. 그의 시체 옆에 아내 스텔라의 총이 놓여 있었다. 스텔라 도일은 유명한 은막의 스타였다. 사람들은 스텔라가 범인일 거라 확신한다. 오두막집 마당 붉은 진흙이나 밝고 자란, 자기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여자가 할리우드 ‘매춘부’의 인기를 누리는 것을 넘어, 이 지역 ‘왕자’와 결혼해 귀부인 행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교수형감이라 여겼다. 테르모필레 데버루군의 유일한 대저택 레드 힐스에서 시부모를 내쫓았을 뿐 아니라 술에 절어 살기나 하는 못된 여자라는 소문도 돌았다.
스텔라는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배심원들은 휴 도일이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낙담한 나머지 자살했을 거라 결론 내렸다. 학교 동창 클래이턴 헤이스의 믿음도 한몫했다. “네가 그렇지 않았다는 걸 믿어. 난 알아. 하느님의 가호가 있을 거야.” 적의에 찬 구경꾼들 사이를 뚫고 클래이턴 헤이스가 법원 앞에서 스텔라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이렇게 외쳤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가구점뿐 아니라 정육점도 있었고, 다락방 속 장부에는 7만 5천달러가 넘는 채권 액수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강요하지 못해 소리 없이 그 돈을 묵히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설득한 것은 스텔라의 무죄만이 아니었다.
“그래요. 아버지는 당신을 보고 (사랑을) 느끼지 않는 남자는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나도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버디는 아버지의 첫사랑, 스텔라 도라 히블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법정 앞 무리를 등지고 아버지가 극적으로 여자를 구하는 장면을 바라보던 열 살짜리 아이는 이제 서른 살 청년이 되었지만 스텔라는 학교 동창 클래이턴 헤이스 뿐 아니라 그의 아들 버디에게도 ‘하느님이 빚으신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다. 이 소설은 버디가 퇴색한 왕년의 스타 스텔라 도일을 20년간 지켜보며 회고한 이야기다.
제목 ‘붉은 흙’은 스텔라 도라 히블의 출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양철지붕 오두막집 마당에 펼쳐진 붉은 진흙.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하루하루 힘겹게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딛고서야 하는 곳. 스텔라의 어머니 도라히블은 이곳에서 농부와 결혼했다. 스텔라가 여덟 살 되던 해, 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 스물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고되게 일하고 난 후에도 저녁이면 영화잡지를 들여다보고, 낭만적인 삶은 다른 데 있다고 믿으며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싶어했던 여자였다. 아버지는 스텔라가 열네 살 되던 해에 도일 방앗간 기계에 몸이 끼는 사고로 죽었다. 스텔라는 고향 동창 클래이턴 헤이스의 아들 버디를 만날 때마다 ‘붉은 진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처럼 붉은 진흙을 밟고 자랐겠군.”
“아, 나도 나이를 많이 먹을 때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어. 그 빌어먹을 시집 식구들은 날 가스실로 밀어 넣지 못해 안달이지. 잘 자고 잘 가렴, 붉은 진흙.”
휴 도일은 열여섯 살 때 동갑내기 동창 스텔라와 사랑에 빠졌다. 휴 도일의 집안은 어려운 시기에 방앗간을 운영해서 데버루 군의 백인 노동자 절반을 먹여 살린 집안이라고 했다. 스텔라의 빼어난 미모에 걸맞는 부자였다. 아버지가 여자를 반대하는 사이, 스텔라는 콜드스팀 미용실을 그만두고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떠나 스타가 되었다. 휴 도일은 중심가 그랜드 극장 스크린을 차지하고 야구선수와 결혼한 대스타 스텔라를 찾아가 이혼하게 하고 결혼한다. 대형 쾌속선을 타고 전 세계를 유람하며 2년간 신혼여행을 다닌다. 마당에서 딴 수선화를 주는 것처럼 스텔라에게 메르세데스 벤츠 열쇠를 건네고, 어느 크리스마스 아침, 엄지발가락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우기도 한다.
미소 짓는 모습이 멋졌다던 휴 도일과 붉은 진흙 오두막집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저택 ‘레드 힐스’를 상상해 보았다. 세계 2차대전과 한국 전쟁 이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던 미국이었다. 남부식 저택이나 교양으로 대표되는 미국 남동부의 부잣집은 최고의 미녀 못지않은 마력을 뿜는 것 같았다.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며 특유의 여유롭고 귀족적인 삶을 영위하던 남부 부자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휴 도일의 집안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편을 죽이셨군요.”
“우린 심하게 다퉜어. 술에 취해 있었고. 그 사람이 내 빌어먹을 하녀와 잠자리를 했거든. 난 미칠 것 같았어. 이유가 아주 많기도 하구 전혀 없기도 했어. 계획한 일은 아니었어.”
“이럴 수가. 당신은 단 하루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셨고요, 그렇죠?”
법원 앞 군중들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스텔라를 보고 나서 20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버디는 마침내 살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붉은 진흙 바닥을 절실하게 떠나고 싶었던 여자, 나아질 길 없는 삶의 파편 속에서도 야망을 꺾지 않는 여자, 물질적 성공과 명성을 추구하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채 쾌락에 빠져 사는 여자, 정신적으로 공허했던 여자, 스텔라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생각났다. 스텔라가 주연해서 흥행한 영화의 제목 「격정」처럼 격정적인 스텔라의 삶이야말로 개츠비적인 것이었다. 서부의 서민적 삶과 도덕적 삶을 대표하던 서술자 닉은 스텔라의 동창 클래이턴 헤이스의 아들 버디가 맡은 것 같았다.
“휴가 날 만나러 오기 6년 전부터 그의 이름을 써 왔던 거야. 왜냐하면 난 그 사람이 올 걸 알고 있었거든. 내가 테르모필레를 떠나던 날 그 사람은 계속 나한테 소리쳤어, ‘둘 다를 가질 순 없어!’ 그 사람은 버스가 떠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외쳤어, ‘나와 그것, 둘 다를 가질 순 없다고!’ 그 사람은 떠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찢어 놓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난 둘 다를 가질 수 있었어. 이 작은 세상에서 오직 두 개밖에 갖지 못했던 거야. 하나는 「격정」이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거고 다른 하나는 바로 휴 도일이야.”
미천한 출신 개츠비가 이룰 수 없는 꿈을 좇아 밀주 사업이든 거짓말이든 거치지 않고 돌진했던 것처럼 스텔라 역시 그러했다. 부조리한 삶 속에서 부와 명성, 그리고 쾌락을 쫓으며 꿈꾸던 무언가를 얻으려고 남자와 무대를 오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세계를 다 갖고 싶겠지. 가서 다 갖도록 해.”
“내일 기차를 놓치면 안 되지. 그리고 내 말 들어, 고향으로 가지 말고 로마로 가도록 해.”
“시간을 내야 해. 시간을 내야 한다고. 겁내지 말고.”
테르모필레를 집어삼켰던 1958년 8월의 햇볕 뜨거운 열기는 스텔라의 욕망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삶 역시 뜨거운 열기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레드 힐스로 불리던 곳은 담뱃불로 새카맣게 탄 폐허가 되었다. 불길을 빠져나오려다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시신이 계단 발치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면이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싸구려 감상 가득한 흑백 영화 「격정」을 통해 은막의 스타 스텔라가 그렇게 회고되고 있었다.
부와 명성을 배경으로 ‘하느님이 빚으신 가장 아름다운’ 팜프파탈의 욕망과 회한을 그린 이야기가 매혹적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환상을 그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줄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녀가 주연한 영화 「격정」 속 매춘부처럼 그녀의 행적이 회고되고 이야기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스텔라의 입장이 개츠비처럼 중심이 되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수도 있겠다. ‘저 여자가 정말 형편없는 배우인지 아니면 진짜 훌륭한 배우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 걸. 좀 묘해.’ 버디의 아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격정」을 보고 나서 한 말이 소설 「붉은 흙」을 읽고 나서도 왱왱 울렸다. 스텔라의 삶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