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야마 현립근대미술관>
전시 그림도 볼 만하고 미술관 입지도 좋다. 관람 후 와카야마성이 한눈에 보이는 그림같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사진 촬영도 허용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과 촬영을 할 수 있다.
1. 미술관대강
명칭 : 和歌山県立近代美術館
주소 : 〒640-8137 和歌山県和歌山市吹上1丁目4−14
방문일 : 2023.4.26.
2. 둘러보기
오늘 전시는 사진전을 빼고 촬영이 가능하였다. 노no의 나라 일본과 다른 모습이다. 항상 NO만 하다가 오늘 어쩐 일인지 Yes라 이런 곳도 있어? 의아할 정도다. 다른 미술관으로도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아무리 좋아도 머리 속에 다 담아 올 수는 없다. 내 기억속에 담아가지 못하면 나중 관련 있는 것들끼리 연관 사고를 하기도 어렵다. 오늘은 다행이다. 이런 염려 안 할 수 있어서.
석판화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며칠 전 다녀온 오사카 도톤부리의 그림이 대표그림이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이외에도 눈에 띄는 좋은 그림이 몇 있었다. 근대 오사카 동경, 근대 동경, 생활 풍광 등을 담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석판화전은 소재 자체가 전시회를 보기 쉽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오늘 어려운 기회를 얻어 좋은 그림을 보아 좋다.
근처 풍광도 동상도 좋다. 오카야마 성이 미술관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길 건너 바로 마주보인다. 미술관 내 커피숍도 그만이다. 입구에 도꾸가와 요시무네 동상이 있다.
와카야마 유카리의 작가들
석판화 전시회
오사카 사천왕사
3 관람후
1) 미술관 내 커피숍
2층에 있다. 실내도 실외도 분위기가 일품이다. 실내에는 너른 공간에 관련서적을 인테리어 삼아 비치해 놓았다. 실속 있는 책도 많이 있어 미술 관련 책을 폭넓게 살펴보며 통찰력을 키울 수 있다.
2) 미술관에서 바라본 와카야마성
천수각이 아름답다. 너무 위압적이지도 않고. 히메지성이나 오사카성만큼 아름답지도 거대하지도 않지만 그 둘이 가지지 못하는 편안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버스 타고 가다가 찍은 와카야마성. 천수각을 옆으로 잡았다. 시가지 가장 중심,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다이묘는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 봐야 되고, 성안 백성들에게 가장 높이 멀리 있는 분이어야 한다. 모든 다이묘 성의 공통점이고, 그렇게 시가지를 이룬 것도 대다수 성곽도시의 공통점이다. 군림하는 다이묘, 아무리 편안해보여도 그 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의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격이 다른 차별성이다. 그런 제압적인 태도가 지금도 일본인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창덕궁의 낮은 담장은 백성들의 눈높이로 내려와 어디서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사는 한국인들을 만들어냈을 것이고.
3) 도꾸가와 요시무네 徳川吉宗 동상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 도꾸가와 요시무네. 여러번 드라마로 만들어진 그는 조선의 숙종같은 인물이다. 막부를 경제적 어려움에서 구하고 중흥시킨 공적이 있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과감하게 도입한 개혁 성향의 지도력을 발휘한 쇼군, 그도 역시 그는 칼을 차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 (徳川吉宗, 1684년~ 1751년)
《해체신서(解體新書)》저자.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막부를 안정시킨 인물로 숭앙받는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에도 막부의 8대 쇼군으로, 막부 중흥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 요리노부의 후손으로, 7대 쇼군 이에쓰구가 후사 없이 죽어 도쿠가와 종가의 후손이 끊어지자 고산케(御三家)의 한 축으로서 쇼군에 올랐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1716년 고산케인 기슈 번에서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슈 가문에서 일하던 하인 출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 한동안 다른 가신의 집에서 자라다 훗날 미쓰사다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서 성에 들어갔다. 요시무네는 1695년 12세의 나이로 종5위하의 직책을 받았고, 2년 후에는 종4위하 직책에 임명된 뒤 에치젠국 뉴우 군의 영지를 받았다.
1705년 기슈 번주인 큰형 쓰나요리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둘째 형 요리토모도 연이어 죽으면서 그가 번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악화된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먼저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무명옷을 입고 간소하게 식사했으며, 형들과 아버지의 장례 비용을 축소하는 등 자신부터 검약을 실천하고 낭비를 줄여 나갔다. 또한 무사들의 기강을 바로잡아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했으며, 와카야마 성 앞에 소원상자를 두어 백성이 직접 탄원할 수 있게 하는 등 선정을 폈다.
(중략)
쇼군에 오른 요시무네는 초기에는 자신을 밀어 준 원로대신들을 우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파면하고 직접 친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먼저 막부의 재정 확충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다. 막부 재정을 갉아먹는 큰 축 중 한 가지였던 참근교대를 축소하고, 대신 다이묘들이 막부에 일정량의 쌀을 상납하는 아게마이(上米)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막부의 직속 무사에게 주던 녹봉을 일종의 직책수당 형식으로 지급하는 다시다카(足高) 제도를 도입했다. 나아가 1년 동안 생산된 작물량에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만큼만 세금을 거둬들이는 연공 제도를 실시하고,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경작지를 개발하고 상품 작물의 재배를 장려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검약과 검소를 실천하면서 풍속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일환으로 쇼군의 부인들이 거처하는 오오쿠의 지출까지 대폭 축소하기도 했다. 요시무네는 민생 안정에도 노력했다. 기슈 번주 시절 성 앞에 설치했던 소원상자와 같은 직소 상자를 설치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했고, 요양소를 설치하고 화재 대책을 마련하는 등 여러 부분을 돌보았다. 그의 노력은 '교호개혁(享保改革)'이라고 불리며, 막부의 악화된 재정을 급속도로 회복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 개혁이 아니었다면 에도 막부는 재정 악화로 이때부터 붕괴되었으리라고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요시무네의 정책들은 매우 실용적인데, 이는 그의 성향과도 관계가 깊다. 그는 다른 쇼군과 달리 귀족적인 학문에는 큰 흥미가 없었다. 대신 그는 천문, 역학, 법학 등 실용적인 서양 학문에 큰 관심을 가졌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스스로 강우량을 조사하여 홍수를 예측하는 법을 세우기도 하고, 서양식 승마를 직접 배웠으며, 관료들에게 네덜란드 어를 배우게까지 했다.
요시무네의 시대에 일본에서는 서구 문물의 수용과 발전이 엄청난 수준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큰 진보를 이룩했다. 막부는 그때까지 서양과의 교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나가사키 항을 통해서만 네덜란드의 문물을 일부 수용했는데, 요시무네는 이를 완화하여 서양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이후 스기타 겐파쿠 등이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하여 《해체신서(解體新書)》 등을 내는 등 난학(蘭學)이 발전하면서 일본에서 서구의 기술과 의학이 발달했다. 1800년대 무렵에는 난학이 완전히 정착되어 전문가가 1천여 명에 달했고, 난학 전문가인 다이묘가 등장할 정도였다.
흔히 에도 막부 시대에 쇄국 정책이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중국, 조선, 유구(琉球) 등과 관계를 유지하며, 사무역과 그리스도교 금지 및 막부의 대외 무역 장악을 위해 외국과의 관계를 통제한 시스템이었을 뿐이다. 요시무네는 근세 일본의 농업과 과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훗날 서구 열강 틈에서 일본이 살아남게 한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요시무네는 약재로 사용되면서 값이 폭등한 조선 인삼을 일본에서 재배할 수 있게 개량하고, 흉년에 대비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했다. 또한 조선과 네덜란드에서 말을 들여와 품종을 개량해 대대적으로 사육하는 목장을 만드는 등 정력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요시무네의 이런 급격한 개혁은 농민과 상인 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정량으로 세금을 내게 된 농민들은 흉작기에 부담이 한층 커지면서 요시무네의 말년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결과를 불러왔다.
요시무네는 1745년 장남 도쿠가와 이에시게에게 쇼군의 자리를 물려주고 오고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에시게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어리석고 병약하여 제대로 정무를 돌보지 못했다. 신료들은 총명한 둘째 아들 무네타케를 후계자로 추천했으나 요시무네는 후계 다툼을 염려하여 결국 장자에게 물려주었다. 때문에 막부의 실권은 여전히 요시무네에게 있었고, 이에시게는 오오쿠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요시무네가 죽은 후 정권은 이에시게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었던 원로대신 오오카 다다미츠가 장악한다.
한편 요시무네는 자신의 혈통으로 쇼군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해 아들과 손자들을 독립시켜 가문을 세우게 했다. 이에 차남 무네타케가 다야스 가문을, 사남 무네타다가 히토쓰바시 가문을, 손자인 시게다카가 시미즈 가문을 창설했다. 이 세 가문을 '고산쿄(御三卿)'라고 부른다.
요시무네는 1751년 6월 20일 68세의 나이로 죽었고, 시신은 우에노의 간에이지에 안장되었다.
(다음백과,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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