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기 / 이훈
고종석의 「아빠와 크레파스」 단상
고종석의 「아빠와 크레파스」(동서문학, 2001년 가을호.)를 읽었습니다. .
아버지와 딸(미원)이 있습니다. 딸은 올해 대학 1학년생입니다. 그런데 그 둘에게는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딸의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되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딸이 “다섯 살 때 아파트 놀이터의 미끄럼틀에서 떨어졌는데, 땅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며 돌부리에 그 눈을 다친 겁니다.” 그래서 딸은 지금까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셈”(107쪽)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딸이 단성 녹내장으로 다른 쪽 눈의 시력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예상한 대로 수술 결과는 안 좋아서 이제 딸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평소에 딸에게 미안해하면서 지냅니다. 아버지로서 제대로 놀아 주지도 못했고, 셋방살이를 하느라 집을 자주 옮겼기 때문에 딸은 사교성이 없는 아이가 됐으며, 또 직장 생활 때문에 하게 된 프랑스 생활도 아이에게는 좋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어색해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의 수술을 겪으면서 자신의 죄책감은 다른 데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미원이를 어색하게 대해 온 이유를요. 그것은 아비로서의, 부모로서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죄책감은 그 아이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한 것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초등학교를 여러 군데 다니게 한 것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그 아이가 원치 않았는데 프랑스로 데려간 것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저는 미원이에게 죄를 지었다면 죄를 지은 셈이지요. 그러나 오래도록 저를 눌러온 죄책감, 미원이를 대할 때마다 느꼈던 어떤 어색함의 밑바탕에 있었던 죄책감은 그 아이가 다섯 살 때 겪은 그 사고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어린 것에게 사고를 당하게 한 아비로서의 죄책감, 그 어린 것을 보호하지 못한 아비로서의 죄책감 말입니다. 저는 미원이가 이번 일을 당하고서야 새삼 그걸 깨달았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저는 그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이는 한 눈마저 잃은 겁니다. 결국 제가 건강한 몸을, 건강한 눈을 돌려주지 못했기 때문인 거지요.(110-1쪽)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딸도 역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딸은 아버지에게 “한쪽 눈마저 간직하지 못”해서 죄송스럽다고 합니다(111쪽). 그러면서 딸은 눈을 잃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철든 뒤부터 한 번도 아빠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112쪽). 이 대목은 직접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 전에는 왜 아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줄 아세요? 죄책감 때문이었어요. 눈을 잃었다는 죄책감. 아빠가 멀쩡하게 낳아준 눈을 제 실수로 잃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은 엄마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빠한테서 훨씬 더 컸어요. 남들이 다 그러잖아요. 제가 아빠 얼굴을 쏙 빼닮았다구요. 특히 눈이 닮았다구요. (중략) 저는 아빠가 준 그 눈을 간직하지 못한 게 죄스럽고 수치스러웠어요. 아빠가 저를 부끄러워할까봐 두려웠어요. 아빠가 남들한테 부끄러울까봐, 불구인 딸을 둔 게 부끄러울까봐 말이에요. (중략) 제가 저지른 그 잘못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빠 눈을 받아낼 수가 없었어요. 저는 늘 아빠의 눈길을 피했죠.(112-3쪽)
이 말을 듣는 아빠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낌을 참아냅”니다(113쪽). 나도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그렇지 않았다면 안타깝게도 내가 그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고백의 밑바탕에는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라고 하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심지어 운명적으로 정해진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들마저도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이 주는 비극적 울림은 등장인물의 이런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상대방이 삶의 주체라는 점을 공유하는 데서 가능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경험으로 보건대 일이 잘못되면 그것이 자기 탓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일의 실상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냉정한 태도가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비극 주인공이 겪는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사건의 핵심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생기는 결과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진실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요! 위에서 인용한 딸의 고백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빠, 정말 죄송해요. 이젠 두 눈이 다 보이지 않네요. 이젠 아빠 얼굴을 쳐다보려 해야 볼 수가 없게 됐네요. 아니, 이제서야 아빠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네요.(113쪽)
저 비극의 주인공 외디푸스왕이 진실을 보지 못했다고 자책하면서 두 눈을 찔러 맹인이 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눈이 없어져서야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리어왕」에도 눈을 잃어 못 보게 돼서야 마음의 눈을 떠 진상을 알게 되는 인물이 나옵니다. 두 눈이 다 보이지 않아야 오히려 진실을 보게 되는 인간의 한계, 무능력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여기서도, 자기의 한계를 스스로 겸손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될 일(외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 사이에 자식을 두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저지른 일입니다. 운명의 장난인 셈이지요.)에 책임을 지는 데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을 카타르시스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 정황으로 보아 홍세화인 것이 분명한, 아버지의 선배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편지를 보내옵니다(작품 전체가 아버지와 선배가 주고받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낙관과 자족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있는 한 삶은 견딜 만합니다. 신이, 누구한테서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몽땅 빼앗아가 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117쪽)
여기서 말하는 낙관과 자족이 헛말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니까요. 이들에게 삶은 마땅히 자기 책임으로 영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첫댓글 20여년 전에 쓴 글인데 내용 가운데 홍세화가 나오는 데다 그 분의 인생관이 잘 나타난다고 생각해서 애도사를 쓰는 마음으로 옮겼습니다.
이 작품은 고종석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2003.)에도 실렸습니다. 이 소설가 읽을 만합니다.
다시 봐도 아버지가 “입술을 깨물며 흐느낌을 참아내”는 대목에 이르자 눈물이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