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 계곡과 꽃전 / 양선례
추석 연휴 끝 무렵, 지리산 뱀사골 계곡을 찾았다. 남원 산내면에 있는 탐방 지원센터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구례읍을 지나면서 계기판을 보니 남은 거리는 23km, 그런데 도착 시각은 무려 50분 후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맞았다. 눈에 익은 식당을 지나자, 천은사 입구가 나왔다. 그렇다. 해발 1,100m 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남원 달궁 계곡을 지나는 길로 네비가 안내해 준 것이다.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구불구불한 그 길을 1단과 2단 기어를 사용하여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
이른 시간이라 산을 오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입구부터 산 정상에 거의 닿을 때까지 왼쪽에는 웅장한 계곡과 함께였다. 숲길을 따라 나무 덱으로 만들어진 생태 탐방로가 이어졌다. 누구나 걸을 수 있게 만든 무장애 길이란다. 양쪽으로 나무가 터널을 이루었다. 계곡이 크고 넓어서 물소리도 우렁찼다. 군데군데 물가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서 한여름에 왔더라면 최고의 피서지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사골 계곡, 정말 오랜만이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는 청왕봉 정상 표지석 앞에는 몇 번 서 봤지만 이 계곡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 대학 때 친구 둘과 왔다가 산정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실패한 적은 있었다. 2박 3일간 먹을 식량과 숙박에 필요한 텐트까지 덩치가 좋은 숙이가 다 짊어졌다. 배낭이 가득 차자, 위에도 올리고, 옆 주머니에까지 욱여넣었다.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나와 옥이는 기본적인 옷가지 몇 개만 가방에 담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정보도 없이 ‘좋다더라.’는 말만 믿고 감행한 여행이었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뱀사골 입구에서 내렸다. 가도 가도 뱀사골 산장(그때는 산장이 있었다.)은 나오지 않았고, 길은 자주 끊겨 계곡 이쪽과 저쪽을 여러 번 오가야 했다. 자신 있다고 큰소리쳤던 숙이는 곧 지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배낭은 뒤에서 누가 들어 올려 줘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결국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계곡 한쪽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두려움에 떨다가 산을 내려왔다.
40년 가까이가 되어서야 다시 찾은 그곳은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큰 뱀이 목욕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탁용소’, 웅덩이의 모양이 호리병과 같아서 붙여진 ‘병소’, 계곡물에 깎인 모양이 병풍과 같아 이름 지어진 ‘병풍소’ 등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물빛은 예술이었다. 바닥이 훤히 드러나서 옥빛처럼 맑았다. 깊이를 알 수 없게 투명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섬증이 들었다. 군데군데 입수를 금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크고 작은 폭포에 눈 호강 제대로 했다. 그 옛날 돌밭 사이를 헤쳐가던 그 옹색한 길이 계곡 건너편에 간간이 보였다.
올라갈수록 산은 초록에서 연노랑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벌써 가지 끝에 단풍이 든 부지런한 나무도 있었다. 늘 일찍 일어나서 김밥을 싸 오는 지인 언니에게 미안하여 이번에는 근처 식당에서 먹자고 점심도 준비하지 않고 과일과 대추차 등의 간식만 챙겼었다. 그랬는데 한 구비 돌 때마다 나오는 아름다운 숲길에 빠져서 발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 목표로 잡았던 시간을 훌쩍 넘겨 화개재 정상을 2km 남겨 두고서야 겨우 되돌아섰다. 그새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다.
반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구름도 쉬어간다는 와운 마을이 있고, 바로 내려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그런데 처음 출발지까지 가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어 있었다. 숨이 턱까지 오를 정도의 오르막을 올라서 닿은 마을에는 예상대로 식당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한 곳에만 사람이 많았다. 산나물 여덟 가지를 원하는 만큼 담아 와서 비벼 먹는 산채비빔밥이 주 메뉴였다. 거무튀튀해서 맛깔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꿀맛이었다.
무엇이든 없어서 못 먹을 것 같이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나는 음식을 고르는 데 꽤 까다롭다. 낯선 요리는 아예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맛보다는 눈이나 머리가 먼저 먹는다. 그러니 족발이나 닭발은 물론 순대, 곱창, 간, 선지국 등도 사절이다. 그 쫀득쫀득한 식감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며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눈총을 받을 때도 많지만 고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도 내 입맛에 맞는 게 차고 넘치는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길도 아닌 깊은 숲을 헤쳐 나간다. 일행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 튼튼한 나무에 묶은 줄 하나에 의지에 바위를 내려간다. 그의 발아래는 깎아지른 수직 절벽이다. 한 발자국 옮기기도 힘든 데서 버섯을 딴다. 생김새만으로는 바위인지, 버섯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해발 700m 이상의 높은 산, 그것도 수분이 거의 없는 메마른 바위 표면에서 자라기에 ‘절벽 위의 꽃’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이 버섯은 무엇일까?
바로 석이버섯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전을 만들었더라. 옆자리 손님 상에 놓인 음식을 곁눈질하여 시켰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다. 이미 비빔밥으로 배를 채웠건만 자꾸 손이 간다. 급기야 막걸리도 한 병 시켰다. 옆에 놓인 도토리묵 무침에도 댈 게 아니다. 주인장이 직접 채취해서 내놓는 이 전은 이곳의 별미란다. 비 오는 날이라서 그런가 전이 더 고소하게 느껴진다. 아무런 정보 없이 찾은 식당인데, 뜻밖의 횡재다.
하루에 2만 6천 보를 걸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평지도 아닌 산길이라 더 오지다. 잘 견뎌준 두 다리가 고맙다. 성삼재 대신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원을 거쳐 집에 오니 벌써 어두워졌더라. 온몸이 뻐근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풍경에 취하고, 음식 맛에 반한 알찬 하루였다.
첫댓글 추석 연휴기간에 좋은 여행하셨네요. 뱀사골 가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하네요.
다시 갈 수 있을런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점점 자신감이 엷어지고 있어서요
저도 운봉에서 하룻밤 자고 지리산 둘레길 걸었는데, 같은 날이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여행기를 이렇게 자세히 재밌게 쓰는 게 부럽습니다. 저는 피곤하다고 미루다가 며칠 지나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뱀사골,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궁금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멋모르고 지리산에 올랐다가 후퇴한 적 있어요. 이 글을 읽으니 다시 가보고 싶네요.
오래전에 한번 갔던 뱀사골이네요. 글을 읽는 내내 마치 제가 다녀온듯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꽃전도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평지도 아닌 산길을 2만 6천보나 걸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걸음입니다. 젊은이들 못지않은 체력이네요. 그곳에 가면 산나물 비빔밥 먹어봐야겠이요.
제가 산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지인이 지리산도 못 가본 여인이라고 자꾸 놀립니다.
뱀사골, 35년 전에 가보고는 여태 재회를 못 했네요... 전라도로 온 지 17년이 됐는데 말이지요.
덕분에 마음 다집니다. 무릎이 더 시원찮아지기 전에 한 번 다녀오리라... 하하
연휴기간 동안 좋은 여행을 하셨네요.
뱀사골, 사계절 언제가도 시원하고 아름다운 곳이지요.
그 맛난 것들을 싫어하다니요? 아니되옵니다. 하하!
얼마전에 다녀 온 그곳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여러 번 갔어도 한번도 와운마을에는 들린 적이 없는데 가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