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듯이 / 박명숙
아버지와 모자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였다. 중절모는 사계절 필수품이다. 계절에 따라 두께나 색을 다르게 시장에 가서 직접 골랐다. 논밭에 있을 때를 빼고는 양복, 와이셔츠에 넥타이는 기본 옷차림이다. 여름에는 하얀 구두(백구두)를 반짝반짝하게 해서 신고, 검정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나서야 외출 준비가 끝났다. 그 안에 약품, 간식, 안경, 수첩, 볼펜, 통장, 구둣주걱 등 필요한 물건들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많은 것을 넣어야 해서 속에 주머니가 여러 개 있는 가방이 필요했다. 젊어서는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연세가 들면서는 그마저도 힘에 부쳐 어깨에 메는 가방으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사는 지역에서는 농부 멋쟁이로 유명했다. 또, 사교성이 좋아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가 쉽게 됐다. 노인 복지관에 다닐 때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도 한참 어린 사람과 계절마다 관광버스 타고 여행도 하며 즐겁게 살았다. 구십이 넘어 주변에서 동갑내기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니 당신도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거라며, 잠자듯이 편하게 가면 좋겠다는 게 소원이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주무시듯 평안하게 가셨다. 만성폐질환으로 오랜 세월 동안 약으로 버텨 온 아버지가 아흔여섯의 나이까지 우리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때에 우리 5남매는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 드렸다. 산들산들 흔들리는 탐스러운 목련꽃들이 마치 천사들의 날갯짓 같아 위안이 됐다. 세상에서는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슬픈 이별이지만 아버지 이야기하며 웃는다. 목련이 뚝뚝 떨어지고 색이 바래져도 언젠가는 다시 그 나무에서 만난다는 소망이 있듯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모아두었던 부모님의 흔적을 샅샅이 찾아서 가족 단체 카톡방에 부지런히 올린다. 멀리 사는 동생들이 친정에 한번씩 다녀갈 때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을 담아 놓은 사진이나 영상을 모으니 꽤 많았다. 사진 속의 부모님은 한해가 다르게 약해졌고, 조카들은 몰라볼 정도로 튼튼하게 자라가는 게 보였다. 틈틈이 찍어 둔 자료들이 아버지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 날에 우리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 될 줄이야. 생전에 두 분이 나누시던 이야기 영상을 다시 보니 아버지가 마치 이 세상에 계신 듯하여 만나러 달려 가고 싶어진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었다가 잠깐 기력이 돌아왔을 때 있는 힘을 다해서 하신 건 짧은 기도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5남매를 축복해주세요.”라고. 세상에 어떤 욕심도 없이 그저 자식이 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물질의 복보다 더 원했던 건 남매간의 화목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바짝 마른 입술을 간신히 벌려 더 말을 하고 싶어하는데 혀가 말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자녀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웃기도 하면서 반응했다. 아프냐고 물으면 머리를 저으며 괜찮다고 해서 안심이 됐다. 손을 어루만지면 마른 손가락에 힘을 들여 꼭 잡아 주기도 했다. 맥박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아버지는 스르르 깊이 잠이 들기 시작했다. 주무시면서 우리 이야기를 다 들어줬다. "아버지, 제가 좀 더 살갑게 다가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우리 잘 키워주시고 믿음을 남겨 주신 것 고맙습니다. 5남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의 바람대로 화목하게 잘 지내며 살게요.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체온은 따뜻했다. 자식을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첫댓글 마음 추스리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글까지 쓰셨군요.
양복, 넥타이에 백구두가 기본 차림이라니, 얼마나 멋쟁이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토닥토닥"
네, 고맙습니다.
아...
아빠가 보고 싶어요.
울었습니다.
그리워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애 쓰셨네요. 저도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라도 자주 해야겠습니다.
슬픈 일을 겪으셨군요. 그래도 잠자듯이 가셨다니 당신 복인 것 같습니다.
얼른 추스리세요.
네, 고맙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이별입니다.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지요.
아버지가 그리운 밤입니다. 마음 잘 추스리세요.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