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충은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로 귀화를 했다.
처음에 경상감영 자리에 터를 잡고 살다가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계산동으로 이사하여 세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의 열악한 의복문제와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뽕나무를 심고 식솔들에게 김쌈을 권장하여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 아낙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후 두사충은 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날마다 뽕나무를 타고 올라가 상사병으로 애를 태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 아들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아낙네를 만났다.
그 아낙네는 청상과부로 수절하고 있던 중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중이라서
중매가 쉽게 이루어져 두사충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수성못을 사이에 두고 상화동산과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일본 기후현 출신으로 1915년 개척농민 자격으로 대구로 건너왔다.
그는 대구 수성들에서 미즈사키농원이라는 대규모 화훼농장을 운영하고 만주까지 꽃을 수출하는 등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당시 수성들엔 관개시설이 없어 농사에 애로가 많았다고 한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서는 저수지 축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진희규 등 조선인 4명과 함께 수리조합을 만들어 수성못 축조에 나섰다.
자신의 사재와 총독부의 지원금으로 고생 끝에 착공 10년만인 1927년 현대적 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완공했다.
척박한 수성들에 현대식 관개시설을 완공하여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한 그는 1939년 세상을 떠났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생전 그의 유언에 따라 수성못이 내려다보이는 현재의 장소에 안장됐다.
그의 묘는 현재 한일친선교류회가 관리하고 매년 4월 13일 기일(忌日)에 맞춰 추도식도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