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나로 남으려면 / 허숙희
요즘 우리가 다니는 집 앞 파크 골프장이 휴장이다.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라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라고 한다. 평소 매주 화요일 하루만 쉬어도 공을 치지 못해 아쉬워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운동을 못 하게 되자 남편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1년 내내 쉬지 않고 운영하는 근처 사설 구장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전남 구례, 보성, 담양, 그리고 경남 의령까지. 네이버로 검색해 전화번호와 주소는 물론 입장료와 홀 구성까지 꼼꼼히 알아보고 예약해 두었다. 모두 기억하기 어려워 메모장과 달력에 빠짐없이 적어 두고, 가는 날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시로 확인한다. 얼마 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약속을 까맣게 잊거나 엉뚱하게 기억해 실수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남편의 친구 부부와 함께 보성에 있는 파크 골프장에 가기로 했다. 하루 전부터 부산을 떨었다. 티맵으로 위치와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는 물론 허리와 무릎, 팔목 보호대까지 챙겨 가방에 담아 현관 옆에 두었다. 물과 과일, 간식도 미리 준비해 냉장고 한쪽에 넣어 두었다. 가는 날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서둘렀다.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노란 셔츠를 입고 새로 산 모자도 썼다. 남편은 빠진 것 없느냐는 내 물음에 손을 내저으며 먼저 차로 향했다. 그런데 다시 들어와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스마트폰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 봤는데….” 서랍을 열어 보고, 화장대 위도 뒤적인다. 그러다 현관으로 나가더니 “어! 이게 왜 여기 있지?”라며 말했다. 전화기는 신발장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신발을 신으며 잠시 올려 둔 걸 잊은 모양이다. 나는 한참을 웃었고, 남편은 멋쩍은 얼굴로 당신이나 잘 챙기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웃으며 넘겼지만, 이런 일이 부쩍 잦아져 마음이 편치 않다.
나도 준비해 놓은 가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던 남편이 내비게이션을 켜며 묻는다. “어디라고 했지?” “보성이라니까.” “골프장 이름이 뭐였더라?” 말문이 막혔다.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린(green)이란 말이 들어갔는데….” “맞아, 그린… 하우스(house)였나?” 여기까지 생각을 모았지만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메모장을 열어 확인했다. ‘보성 그린 비치 하우스 파크 골프장.’이었다. 이럴 수가. 구장이 바닷가라 비치(beach)란 말이 들어 있다고 남편과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건만. 알고 있던 이름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요즘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하려던 말이 목 끝에서 사라지는 일이 잦다. 거기다 종종 내 기억이 맞다고 우기기까지 한다.
막 출발하려는데, 주방 인덕션 레인지에 연결된 멀티탭에 스위치를 끄지 않은 것 같아 내리겠다고 했다. 남편은 예전에도 괜한 걱정으로 길을 되돌아간 적 있다며 그냥 가자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확인하러 들어갔다. 멀티탭은 꺼져 있었지만, 화장실 불을 켜둔 채 나온 걸 발견했다. 불을 끄며 어이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늘 하던 일도 깜빡 잊고, 방금 전에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시간을 두고 오래 생각하면 떠 오르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아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한참을 달리던 중 남편이 물을 찾았다. 아뿔싸! 냉장고에 넣어 둔 간식 보따리를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몇 번이나 주방을 들락날락하면서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예전에는 신학기가 되면 학급 아이들 이름을 하루 만에 다 외웠고, 회의 내용도 따로 적지 않아도 정확히 기억했다. 때론 필요 없는 것도 기억했다. 버스에서 한 번 본 잡상인의 얼굴과 그가 팔던 물건까지도 또렷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메모하고, 달력에 표시한다. 또 전화로 약속 시간이나 장소를 정하면서 헷갈리지 않으려고 통화하면서 내용을 녹음해 두기도 한다. 변해 가는 내 모습이 낯설고 서운하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것이 좋은 건만은 아니다. 잊고 싶었던 말, 마음을 아프게 했던 순간, 밤잠을 설치게 하던 걱정들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멀리 사라진다.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잊는 것은 어쩌면 나를 위해 내 삶의 짐을 조금씩 덜어 내는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언젠가 남편에게 “아저씨는 누구세요?”라고 묻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문득 두려워질 때도 있다.
그날 우리는 간식도 먹지 못하고 공을 쳤다. 득량 바다를 바라보며 힘껏 공을 날렸다. 오비도 내고, 버디와 이글도 나왔다. 남편은 홀인원까지 해 동행한 이들에게 매생이 아귀찜을 대접했다. 그 자리에서 함께 간 사람도 가지고 오려던 바나나를 식탁 위에 그대로 두고 왔다며 웃었다. 이 나이가 되면 다 그런 건가 보다. 망각은 누구에게나 슬며시 찾아오는 모양이다. 식당을 나서기 전, 우리는 다음에 갈 구장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이 어렵다며 투덜대는 그들에게 나는 또박또박 ‘구례 헤르바 힐 파크 골프장’이라고 한번 더 말해 주었다. 그리고 ‘허브’의 라틴어 어원이 ‘헤르바’이고, ‘힐’은 언덕이란 뜻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은 놀라며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전을 찾아서 기억하려고 여러 번 외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래, 망각은 바라지 않아도 내게 스며든다. 별수 없다. 온전한 나로 남으려면 기억나지 않으면 찾아보고, 중요한 건 자꾸 떠올려 보고, 모르면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를 꼭 붙잡아야겠다.
첫댓글
글을 고쳐 쓰고 다시 올린 후에야 다녀왔던 보성의 파크골프장 이름이 ‘보성 그린 비치 하우스’가 아니라 ‘보성 그린 티 하우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기억을 제멋대로 꾸며 놓고도 그것이 틀림없다고 믿어 메모장에까지 적어 두었던 내 모습이 떠오르자, 그저 쓴웃음이 났다. 망각이라 하기에도 어딘가 부족하고, 괜한 확신까지 더해졌으니 스스로가 더욱 민망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사소한 이름 하나도 온전히 붙들어 두지 못하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