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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강 성균(成均)의 이념과 논어
1. 광주 민주항쟁
며칠 전이 스승의 날이었고, 오늘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가슴 아픈 날이자,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날이다. 5.18 민중항쟁의 날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성균관 대학에서 하게 되었지만, 여태까지 대학에서 했던 강의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 강의는 성균관 대학의 총학생회 주최로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국민 여러분과 가져보려고 한다. 우선 총학생 회장이 저에게 꽃다발을 증정하겠다고 하니깐 기쁜 마음으로 받겠다.
오늘이 5.18인데, 저는 생각나는 게 많다. 여러분과 더불어 이 자리에서 한번 지나간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
여러분도 박정희 대통령을 알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실 상당히 어렵다. 박정희 대통령이 훌륭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이야기하기가 사실 참 어렵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항상 어렵다.
좌우지간 유신말기에 가면, 우리 사회는 크게 문제가 있었던 거 같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자기가 아주 믿는 심복이라면 심복인 사람들로부터 안가 같은 곳에서 저격을 당해 생애를 마쳤다고 하는 것은 뭔가 그 분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서 진행되어온 우리 역사의 흐름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 역사는 극도의 혼미로 빠져들어 갔다. 여러분들은 1980년 전후의 상황을 잘 모를 것이다. 그때 대개 어리거나 막 태어난 사람들일 거 같다. 격세지감이 있다.
하여튼 그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군부는 군부 나름대로 12,12사태를 통해서 엄청난 권력투쟁을 하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 궁정동 안가의 만찬회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사살.
1979년 12월 12일 :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10만여 명의 대학생, 서울역 광장을 메우다.
1980년 5월 15일이 오면 서울역 광장에 서울 시내의 10여만명의 학생들이 운집하게 된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을 원용해서 그때를 서울의 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전에는 제주도를 빼놓고 계엄령을 선포했었는데, 군부는 5월 17일 계엄을 확대한다. 전국 계엄령을 내리고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그래서 중요한 대학들을 전부 계엄군이 점령했다.
1980년 5월 17일 : 계엄확대, 계엄군 대학진주. 휴교령. 김대중 체포.
1980년 5월 18일 : 전남대학교 정문 앞 학생 200여 명과 접수 계엄군과의 충돌.
그래서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평상시대로 등교를 한다. 그런데 학교 내에 진주하고 있던 군대와 학생들 간의 마찰이 생기고, 한 200여명과 교문에서 투석전이 시작된다. 이것을 기화로 해서 엄청난 폭력이 가해지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시내로까지 번지게 되면서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건 여러분들이 다 아시고 있죠? 그래서 내가 그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은 없다.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거의 열흘동안 광주 시인들은 그러한 무자비한 폭동에 항거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유래를 보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시민들 자체로 유지되는 해방 자치구를 구성한다. 계엄군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하고, 시민들은 무력항쟁에 나서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이 살상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드디어 광주 금남로 도청을 중심으로 해서 시민군들이 몰려 있었다. 거기에 계엄군들이 마지막 진압을 위해서 진군을 하게 된다.
5월 26일 밤부터 광주는 정적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27일 새벽 3시까지 송원전문대 보육과 2학년 박영순양과 목포전문대 이경희양이 애절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친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까지 박영순양과 이경희양이 토해내는 애절한 호소는 죽음같은 정적이 깔린 심야의 광주시 전역에 메아리쳤다. 73만 광주시민 모두가 이 목소리를 들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애절한 호소를 73만 광주 시민들이 다 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오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도청에 있던 학생들과 여러 시민들이 거기에서 최후까지 싸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국민들에게 호소를 한다.
그때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은 대개 평소에 버림받은 고아, 노동자 와 같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고아로 자라나 구두닦이를 하며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던 사람이 있었다. 광주 금남로에 있는 YMCA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박용준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올시다.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주님,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고아라면 모두 이를 갈겠지요. 사회가 버린 부랑아입니다. 하느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그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 하느님, 도와 주소서…… 모든 것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관용과 사랑을…… - 박용준
항쟁 지도부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은 나중에 헤어지기 전에 손을 잡고 ‘이제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하고 각자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벽 3시 40분, 도청 상황실에서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교생을 향해서 지도부의 한 사람이 외친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0年代 民主化運動 광주 민중항쟁자료집』
그래서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갔고,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남은 사람들은 새벽 먼동이 밝으면서 거의 다 시체로 변해갔다. 약 150구의 시체가 도청에서 실려 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내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정권의 취득을 위해서, 이렇게 무고한 인민들을 살상하는 역사가 이 땅에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그리고 결국 이 강의를 통해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선조 유학을 통해서 우리는 인욕과 천리를 말했다. 주자학의 테제는 거인욕존천리(去人欲存天理)라고 했다. 인욕을 버리고 어떻게 인간이 천리를 존하느냐는 것이다.
去人欲存天理 :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
- 주자학의 제1명제
광주항쟁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집권자로 등장한 세력은 모든 사람들이 ‘제발 우리나라를 통치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자기들의 욕망에 의해서, 이 인욕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던 역사가 연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남로에 진군하면서, 그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80년대 대학가에서 불리어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같이 부르고 간단하게 묵념을 한 다음에 우리 강의를 시작하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 하마비와 탕평비
여기가 성균관대학이다. 명륜동에 있다. 명륜동 캠퍼스의 교문을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하마비(下馬碑)이다.
‘대소인원들은 여기를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라.’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러니깐 성균관 들어올 때는 차를 몰고 들어오지 말기 바란다.
大小人員過此者皆下馬.
옛날에 임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 앞으로 들어올 때 하마를 했다.
옛날에 성균관 앞쪽에 개천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반수교(泮水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와야 했다. 거기 오면 왕의 가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거기에서 하마를 했다.
그 하마비 옆에 조그만 비각이 있고, 그 안에 탕평비가 있다.
탕평비(蕩平碑) : 영주18년(1742), 당파를 초월하는 마음자세를 성균관 유생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영조 자신이 친필로 쓴 비석.
거기에 주이불비(周而不比), 내군자지공심(乃君子之公心)이요, 비이불주(比而弗周)면 식소인지사의(寔小人之私意)라고 쓰여 있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 논어, 위정 14에서 따옴.
두루 사랑하고 무리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무리 짓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뜻이다.
군자는 보편적인 가치만을 추구하고, 두루두루 생각하고 편당을 짓지 말라는 말이다. 소인은 항상 편당만 지으면서 보편적인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위정 14
이것은 영조대왕의 친필인데, 탕평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여러분들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모름지기 항상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성균관대를 다닌다고 하면서 좁은 편당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성균관 대학생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 문을 들어오고 나갈 때, 내가 학문을 왜 하고, 과연 이 학교를 다녀서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를 먼저 생각을 보기를 바란다.
3. 과거제도
그런데 성균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 성균관이 무엇인지 국민들이 잘 모를 거 같아서, 설명해 본다.
성균관을 설명하려면 불가불 춘향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도령이 과거 시험에 합격을 해서 춘향이를 구했다고 한다. 이도령이 전라남도 남원에서 살았는데, 그곳의 기생 딸하고 정을 나누다가 서울에 과거시험을 본다. 그리고 과거에 장원급제를 해서 암행어사가 되어서 다시 남원에 내려와서 춘향이를 괴롭히던 변사또를 작살냈다.
참 재미난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이도령이 서울에 올라가서 시험 한 번을 잘 봐서 암행어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정식적인 조선조 과거제도의 구조는 여러분의 상상보다 엄청나게 복잡하다. 옛날의 과거시험은 식년시(式年試)라고 3년에 한 번씩 열렸다. 자묘오유(子卯年酉)해에 식년시가 열리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식년시(式年試) : 전국적으로 3년마다 (갑자에 子·卯·年·酉글자가 들어가는 해의 3·4월) 열리는 정규적 과거시험.
그리고 문과라는 게 있고, 무과라는 게 있고, 잡과라는 게 있었다는 건 알 거다.
문과(文科) : 문관을 뽑는 시험
무과(武科) : 무관을 뽑는 시험
잡과(雜科) : 기술직을 뽑는 시험
성균관은 문과에 해당된다. 이 문과만 해도 2개로 나뉜다. 소과와 대과로 나누어진다. 소과도 초시(初試)가 있고 복시(覆試)가 있다. 복시는 회사(會試)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대과에도 초시와 복시가 있다.
소과(小科) : 1)초시(初試) -> 2)복시(覆試)
대과(大科) : 3)초시(初試) -> 4)복시(覆試) -> 5)전시(殿試)
시험을 몇 번을 봐야 하냐? 먼저 소과를 본다. 소과는 향시(鄕試)라고 지방에서도 시험을 본다. 그리고 복시라고 해서 다시 봐야 한다. 시험 한 번 보는 것도 초장, 중장, 종장이 되어서 사흘 동안 계속 본다.
대과(大科)의 초시. 동당삼장(東堂三場)
초장(初場) : 경학(經學)
중장(中場) : 시·부·표(詩·賦·表)
종장(終場) : 시무책(時務策)
이도령이 과거시험을 봐서 한 번에 척 장원급제를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소과는 또 과목이 있다. 2개로 나뉘는데 진사과와 생원과라는 게 있다. 생원과라고 하는 것은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한 철학 시험이다. 그리고 진사과는 시(詩), 부(賦)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시험이다.
소과(小科)의 종류 :
1) 생원과(生員科) : 사서의(四書疑)·오경의(五經疑) 철학시험
2) 진사과(進士科) : 시(詩)·부(賦)의 문학시험
여러분 중에도 문학에 능한 사람도 있고, 딱딱한 철학에 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시부에 더 능하다고 하면 진사로 갈 수가 있고, 나는 사서오경을 모두 외우고 그쪽에 자신이 있다고 하면 생원과로 간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다른 날 보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두 시험에 다 응시할 수도 있었다. 이율곡은 13세에 두 시험 다 합격했다.
4. 성균관
전국적으로 생원과에서 100명, 진사과에서 100명을 뽑는다. 전국 향시에서 뽑은 200명의 생원, 진사가 모두 서울에 와서 경시를 봐야 한다. 이 생원, 진사에 합격해야 비로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는다.
성균관은 그러니깐 기나긴 과거시험 과정중의 한 단계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소과 복시를 거친 생원·진사래야 입학할 자격이 있었다. 정원은 200명. 성균관의 장은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성균관의 정원은 형식적으로 200명이다. 200명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붙은 사람이 몽땅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안 들어오기도 한다. 여러 형태가 있다.
이 사람들이 사는 데가 성균관이다. 성균관에서 어떻게 점수를 매기냐하면, 강의 출석부로 매기는 게 아니라,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으로 점수를 매겼다. 그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성균관 재생들은 물론 매일 명륜당(明倫堂)에서 공부하고 또 주기적으로 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학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루 두끼 진사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아침·저녁을 다 먹고 정간(井間)의 도기(到記, 출석부)에 화압(花押)을 찍으면 원점(圓点) 1점을 얻었다. 조석 중 한번이라도 결석하면 평점으로 하여 계산해 주지 않았다. 원점 300점을 얻어야 비로소 대과 초시 자격을 얻는다.
아침, 저녁으로 정간 도기에 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아침, 저녁을 반드시 출석해야만 1점을 얻는다. 그래서 300점을 얻어야 대과 초시 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소과 초시 -> 소과 복시 --(성균관 원점 300점)--> 대과 초시
성균관 식당에 가서 도장을 찍어서 300점을 따려면 꼬박꼬박 찍으면 1년이면 된다. 그러나 다음 대과가 열리는 것은 또다시 3년 후이기 때문에 여기서 대과 초시를 보고, 또다시 복시를 본다.
성균관 대학에 비천당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그걸 잘못 읽어서 불탄당이라고 읽는다고 한다.
비천당(丕闡堂) :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과거시험을 보던 곳.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는 이곳이 바로 장막 둘러치고 유생들이 시험을 보던 과장이다. 성균관 유적은 더 엄숙하게 잘 보관되어야 마땅하다.
비(丕)자가 불(不)자랑 비슷하게 생겼다. 비천(丕闡)은 정의로운 우리 유학의 정신을 크게 천명한다는 의미다. 그 앞이 유명한 과거 시험장이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거기가 대과의 초시를 자주 열렸던 곳이다.
초시를 보고, 그 다음에 복시를 봐서 마지막으로 33명을 뽑는다. 그 33명이 또다시 임금 앞에서 전시(殿試)라는 것을 본다. 이때 비로소 등급을 매긴다.
전시(殿試) : 대과 복시에서 뽑힌 33人의 등급을 매기기 위하여, 임금이 친림하여 전정(殿庭)에서 보는 시험. 여기에서 뽑힌 갑과 3인을 장원(壯元)·방안(榜眼)·탐화(探花)라 불렀다.
그러니깐 시험을 봐서 어사또가 되려면, 정시 루트로 가면 최소한 5년이 걸려야 되고, 최소한 5번 시험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최후에 장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장원급제가 쉽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의 성균관이라고 하는 곳은 세계 어느 곳에 가서 보아도 가장 대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대학의 자격이 있는 모든 제도와 설비를 가진 세계적으로 가장 유서가 깊은 대학이다.
5. 대학의 역사
내가 대학시절에 유학을 다녔다. 그때는 상당히 외국여행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는 여러분 나이 때 운이 좋아서 유럽을 자유롭게 2달 동안 무전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영국의 캠브리지, 옥스포드를 가보았다. 내가 철학을 했으니깐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가보았다. 그곳은 철학을 한 사람으로서 내가 존경하는 화이트 헤드, 비트겐슈타인, 버트란드 러셀이 나왔기 때문에 보러 갔다.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
13세기부터 발전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 칼리지. 1546년 헨리8세가 세움. 물리학자 뉴톤도 여기서 공부했다.
트리니티 칼리지 학생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니깐, 체제가 우리와 똑같았다. 거기도 4년 동안 밥 먹는 점수로 학점이 결정된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전통적으로 여러분들이 보는 시험 같은 게 없다. 거기서 밥 먹고 생활하면서, 학생들하고 더불어 이야기하고 그러는 게 공부다. 그리고 교수들과 개별적인 면담을 통해서, 자기가 공부하는 것을 체크만 한다. 그러다 제일 마지막에 시험을 한번 보고 나가, 자격을 얻게 되어 있다.
칼리지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당 출입이다. 반드시 넥타이 정장을 해야하며 엄격한 예식이 있다. 칼리지는 우리나라 단과대학의 개념이 아니며, 전통적 서원에 더 가깝다.
옛날 서양의 캠브리지 같은 칼리지는 완벽하게 우리나라 성균관이랑 체제가 동일하다. 우리도 대성전이 있어서 유교를 모시지만, 거긴 채플 같은 게 있다. 건물 배치의 형태도 사각으로 되어 있다. 양쪽에 학생들 기숙사가 있고, 한쪽에 강의실이 있다. 형태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래서 내가 캠브리지 가서 ‘어! 여긴 성균관인데!’라고 생각했다.
서양의 캠브리지나 옥스퍼드 같은 것들은 대개 12세기 초반부터 발전한다. 파리 대학에서 시작해서 옥스퍼드, 캠브리지로 발전해 가는데, 그것이 전부 승려교육이었다. 기독교 신부들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출발을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들보다 훨씬 빠르다.
서양의 대학들은 중세기 승려교육기관으로 12세기부터 발전하였다. 우리의 대학은 사대부관료를 길러내기 위하여 그보다 일찍 10세기부터 발전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개경에 있던 성균관을 현재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조선조가 처음에 한양으로 천도를 하고 이리로 옮긴 것이다. 오늘날 자리에 건물이 들어선 게 1398년이다.
고려 성종11년(992) 國子監 -> 國學(1275) -> 成均監(1298) -> 成均館(1308) -> 國子監(1356) -> 成均館(1362)
그러나 사실은 개경에 고려초기인 고려 성종 11년, 992년에 국자감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물론 고구려의 태학까지 올라가면, 그건 곤란하다. 유학의 정통을 삼는다면 성균관의 역사는 992년부터 보아야 제대로 역사를 잡는다고 생각한다.
오늘 현재의 성균관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398년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이전에 불과하며, 그 역사는 고려 성종 11년, 992년을 출발로 삼아야 마땅하다. 성균관대학의 역사는 올해로 1010주년이 된다.
왜냐하면 개경에 있던 것이 여기로 온 것뿐이다. 그전에 이름도 같고 모두 같다. 이방원도 성균관 출신이다. 이방원도 성균관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공부한 사람이다.
그러니깐 그들의 역사를 뺄 수가 없다. 지금도 개성에 가면, 성균관이 똑같은 게 남아있다. 가서 보면 있다. 그러니깐 성균관의 역사는 10세기로 잡아야 되고, 그렇게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근세교육의 뿌리를 잘 모른다. 우리나라 근세교육이라고 하면, 대개 서양사람들이 와서 시작한 미션스쿨을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등록된 대학으로서의 출발은 1905년 고려대학이 제일 빠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대학은 고려대학교이다.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이 세운 보성전문학교가 어느 미션 스쿨보다도 더 빠르다. 1905년 5월 설립.
지금 연세대학교의 전신은 연희전문학교인데, 그것은 1915년에 세워진 학교이다. 이화대학이 우리보다 매우 오래된 대학인줄 알지만, 사실 1910년 이화학당 대학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전의 이화대학 역사라는 것은 사실 이화여고의 역사다. 이화대학의 역사가 아니다.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4월에 세워졌으며, 이화학당 대학과는 1910년 4월에 세워졌다. 1910년 이전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황화방(皇華坊)의 역사는 이화여고의 역사일 뿐이다.
근세 대학으로서 제일 빠른 것은 고려대학이다. 그리고 근세 교육개념을 떠나서 대학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말한다면, 992년부터 시작한 성균관의 역사를 우리 대학의 역사로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외국 선교사교육 중심의 개념으로부터 탈피되어 다시 새롭게 쓰여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소르본느나 옥스퍼드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체 교육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20세기 교육의 공백은 제도적 단절이기 보다는 우리의식의 단절이다.
근세교육의 요람이 자꾸만 서양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기 쉬운데, 어디까지 우리 민족에게 교육의 뿌리는 우리 민족 역사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세를 통해서도 성균관은 이미 갑오경장 이래로 보재 이상설과 같은 분이 자체적인 개혁운동을 해서 성균관을 개혁하여 근세 학제로 변하려는 노력을 했었다. 일제 시대 때 좌절이 되었지만 그런 노력도 있었다.
이상설(李相卨, 1871 ~ 1917) : 독립운동가. 호는 보재. 고종31년 문과급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으로서 성균관을 신학제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1895).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1907). 러시아에서 활약하다가 니콜리스크에서 죽음.
좌우지간 대학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잘못 인식되고 있다.
6. 국대안 반대운동
해방 이후에 국대안이라는 게 있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나? 이 국대안이라는 게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다.
국대안(國大案) : 1946년 6월 19일 미군정청이 경성대학과 서울에 흩어져 있던 경성의학전문·치과전문·법학전문·경제전문·광산전문·고등공업·고등상업·사범학교·여자사범학교·수원농림전문 등을 무차별하게 통합하여 하나의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국립대학안.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이 누군지 아나? 미군정에 있던 미군 대위다. 웃기는 이야기다.
해리 앤스테드(Harry B. Ansted) : 미군정청의 육군대위로서 경성대학 학장,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냄. 전혀 대학총장의 자격이 없는, 한국사정에 무지한 인물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초대총장이 누군지 아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다.
1922년 이상재(李商在)가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거국적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자, 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1923.5.).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초대총장으로 취임.
서울대학은 창피해서 역사를 못 쓴다. 서울대학 역사를 뒤집어보면, 역사를 못 쓴다.
원래 일제 시대 때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 영역에 9개의 제국대학을 만들었다. 동경제국대학을 위시해서 일본 전역에 7개의 제국대학을 만들고, 그 다음에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일찍 지금의 국립타이완대학인 대북제국대학을 만들었다. 이 9개의 제국대학을 가지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유지했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경성대학이 되었다. 해방이 되어 미군정이 들어왔는데,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경성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법학전문학교, 경제전문학교, 광산전문학교, 고등공업학교, 고등상업학교, 사범학교, 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을 하나로 통합해서 국립서울대학을 만든다는 거였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이에 대해 극히 반발했다. 왜냐하면 가뜩이나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방이후 각각의 대학들을 국립대학으로 발전시켜도 모자라는 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전체로 뭉뚱그려서 하나의 대학으로 만들어서, 사상통제를 하고, 미군 대위가 총장으로 앉아서 우리나라 교육계를 전부 지배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학생들이 국대안 반대운동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좌익들이 좌익운동으로 이용, 확산을 시켰기 때문에 결국 국대안 반대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크게 의미 있는 운동으로 인식이 되지 못하고, 끝난다.
이렇게 국립서울대학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우리 전 국민이 국대안을 반대했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은 비록 좌익에 의하여 악용된 측면이 있으나, 그 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의 반대명분은 매우 정당하며 또 그 정신사적 의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 민족이 제대로 자각했다면, 바로 이 성균관을 서울국립대학으로 만들었어야만 했다.
성균관을 국립대학의 주체로 삼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천여년의 전통을 가진 위대한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뼈저린 무지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길목에서 반드시 반성되어야할 잘못된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무지한 놈들이 들어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무지막지한 제도개혁을 해서, 결국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계의 실정이 이렇게 왜곡되었다. 뿌리가 없다.
세계적으로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성균관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나라 최고학부인 서울대학과 접목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비극이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박수칠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들이 알아야 하고 깊게 깊게 반성해야할 그릇된 교육의 역사다. 지금 이러한 문제가 불행하게도 흘러가버리고 말았지만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역사이다.
7. 심산 김창숙
과거의 성균관 때문에 성균관대학교의 위대한 역사를 자랑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성균관을 모태로 해서 오늘의 근세적인 성균관대학으로 만든 분이 바로 위대한 민족 지도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김창숙(金昌淑, 1879 ~ 1962) : 의성 김씨. 경북 성주출신. 호는 심산(心山). 절개가 곧은 선비로 20세기 조선유림을 리드한 거장. 1946년 유도회 총본부위원장·성균관장으로서 성균관대학을 설립.
심산 선생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산이라는 말을 빼고 김창숙이라고 하면, 영화배우 아니냐고 할 정도로 우리 근대사 속에서 잊혀져간 인물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심산이라는 사람의 역사를 제대로 캐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심산처럼 위대한 인물이 없다.
내가 전통학문을 하는 자로서, 만약 우리나라 20세기에 심산이 없었다면 여러분한테 부끄러워서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만큼 20세기에 우리 유학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조선조의 꼿꼿한 선비의 기개와 지조를 지켜준 사람이 바로 심산 선생이다.
20세기를 통해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산 유일한 분이 바로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여러분들 1926년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고 장렬하게 돌아가신 나석주 열사라는 분을 아는가? 나석주 열사는 사실 상해임시정부의 경무국에서 백범 밑에 있었던 경호원이었다. 심산 선생이 그를 만나 설득시켜서 밀파를 시킨 것이다.
나석주(羅錫疇, 1892 ~ 1926)
황해도 재령출신.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 의열단 입단.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폭파를 시도하고 장렬하게 순국. 이 나석주 거사를 지시한 사람이 바로 중국에서 활약하던 심산 김창숙이었다.
나석주 열사가 거사를 일으키게 되자, 결국 심산도 상해 공동조계의 공제병원(共濟病院)에서 체포가 되어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대구로 와서 재판을 받는다.
심산은 1927년 상해 공동조계의 공제병원(共濟病院)에서 체포되어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 나석주 사건과 관련하여 600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 발발.
그 당시 한국인 변호사들이 와서, 무료자진 변호를 하겠다고 심산한테 애걸을 한다.
그런데 심산은 변호인들에게 변호를 거부하는 명연설을 한다.
나는 대한(大韓)사람으로 침략자 일제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大義)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나는 대한 사람이요, 대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법률을 인정치 아니하는 자다. 내가 어찌 일본 법률에 의해서 공부한 너희들 변호사의 변호를 받겠냐? 나는 절대 너희들의 변호를 받을 수 없고, 나는 지금 포로다. 포로는 영예롭게 죽는 것만이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유일한 길이다. 구차스럽게 너희들의 변호를 얻어서 내가 살지를 않겠노라!’
김용무(金用茂)·손치은(孫致殷)·김완섭(金完燮)의 무료변호 간청을 거부하고 공소마저 포기. 14년형 받음. 대전형무소로 이감 복역.
그래서 결국 14년형을 받으신다.
8. 심산의 정신
심산 선생의 위대한 정신은 무엇이냐? 결국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불굴의 저항정신이다.
심산 선생은 의성 김씨로 태어나서 아주 강인한 기질을 받은 사람이다. 아주 열렬한 반 식민지 투쟁을 했고, 해방 후 혼탁한 시기에도 민족주의 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정치적 좌우익 싸움으로 개판이 되니깐, 꼴 보기 싫다고 하고 성균관을 재건한다.
여기서 성균관 대학을 만들고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초대총장으로 취임하셔서, 끊임없이 반 이승만 독재 투쟁을 계속하신다.
그리고 말년에 군사정부가 들어오자, 반 군사정부 투쟁을 하시다가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발표. 부산형무소에 투옥.
1952년, 국제구락부 사건을 의장으로 주도, 다시 투옥.
1956년, 이승만 대통령 3선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 성대 총장직 사임.
그래서 심산이라고 하면,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빨갱이처럼 인식이 되어 있었다. 심산의 본질이 전혀 들어나질 않았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심산의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열려있는 개방된 민족주의다.
심산은 누구하고도 다 친했다. 만해 한용운하고 친했다. 백범과 친했다. 몽양 여운형과 같은 소셜리스트, 단재 신채호 같은 아나키스트 등 모든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중국에 가서 손문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주 대단히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오로지 종교적 이념과 좌우의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해방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심산 선생의 일생을 보면, 그는 열린 사람이었다. 어떤 고정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분의 유교정신이라고 하는 것도 유교의 좁은 형식주의를 혐오했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인간해방과 인간평등사상을 고취받았다. 그는 유교의 형식주의(formalism)를 시종일관 혐오하였다.
심산이 1949년 성균관 관장으로 취임하고 한 일이 무엇인지 아나?
성균관에 가면 대성전이 있다. 좌우에 동무(東廡), 서무(西廡)라는 곳에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옛날에는 중국 선현들의 위패를 잔뜩 모셨다.
여기에 공자님은 물론 들어가고, 공자 밑으로 4성이 들어간다. 증자나 아성이라는 맹자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과십철이라고 했지만 10명의 뛰어난 제자가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18현이라고 해서 설총정몽주, 이율곡, 최치원, 송시열, 김장생, 김집 등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지저분하게 중국의 성현이라고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놈들을 한 90여명을 모셔놓았었다.
그래서 김창숙 선생은 ‘우리가 미쳤다고 알지도 모르는 중국성현들을 모시냐?’고 하며 90여명의 중국 위패들을 땅에 묻어버렸다.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위패매안(位牌埋安)운동 : 1949년 심산이 주도하여 133位 중 5성, 10철, 송조 6현, 아국 18현을 제외한 중국의 94현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림. 전국유림대회의 결정. 이것은 유교주체운동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러니 당시 김창숙 선생이 얼마나 많은 유림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았겠나? 성균관에서 위패를 묻는다는 것은 전국에 있는 향교가 다 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향교에서 그런 위패를 다 묻었다. 그런데 강릉향교는 안 묻었다고 요새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성균관은 1910년 한일합방 후 1911년부터 경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변한다. 일본놈들은 여기다가 황도유학이라는 것을 만든다.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폐지하고, 단지 문묘제향을 하는 것만 남긴다. 형식적인 것만 남겨놓는다. 황국신민을 위한 것으로 만든다.
경학원(經學院) : 1911년 일제는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없애고, 춘추 2회의 문묘제향만을 담당하는 어용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황국신민의 충효를 강조하는 황도유학(皇道儒學)의 소굴을 만들었다. 명륜학원(1930)·명륜전문학원(1939)·명륜연성소(1944)가 모두 황도유학의 그릇된 전통의 산물이다.
그래서 사실 해방 후 김창숙 선생이 이곳을 찾기 전에 성균관이라는 곳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천황을 받드는 황도유학파 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해방이후를 생각해보라. 성균관 대학을 만들고, 여기 학장으로 계시면서 이승만에게 ‘정신 차려라!’하며 이승만이 나쁜 짓 할 때마다 하야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나?
그러니깐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데, 옛날에 황도유학을 하던 놈들이 들고 일어나서 김창숙을 내쫓았다. 결국 김창숙 선생은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여기 와서 총장까지 하셨지만 집 한칸 없이 사셨다. 여관을 전전하다가 병원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신 분이다.
보수 황도유학자들의 음해에 시달리어 총장직을 사임하고 집 한칸이 없이 여관을 전전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뜨다. 향년 84세.
지금 심산의 아들딸들인 여러분은 심산 선생이 얼마나 처절하게 가셨는지 알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하여튼 나는 심산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사무친다.
이분은 전통유학에 대해서도 모든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현실주의적 명분론을 가지고 민족주의를 외쳤고, 또한 하염없는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사셨다.
나석주 사건으로 제2차 전국유림단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나 600여명이 검거가 된다. 그런데 심산은 거기 대표였다. 그래서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때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같은 사람들은 전부 모범수가 되어서 금방 출감을 했다. 일찍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심산은 섭섭해 했다고 한다.
심산은 전옥(典獄)들한테 고개를 숙여야할 자리에 가서도 절대 고개를 안 숙였다. 그러니깐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 호가 벽옹이다. 그때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해방 후 성균관대 총장을 하시면서도 그때 다리를 다치셔서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 분 호가 벽옹이다. 다리 못쓸 벽(躄) 자를 쓴다.
벽옹(躄翁) : 다리 못쓰는 늙은이라는 뜻. 대전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자신을 부르게 된 별호.
심산 선생은 나중에 몽양 여운형과 건국동맹을 하셨다. 이 양반이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였다. 그래서 1944년 해방직전에 또 붙잡힌다.
그때 몽양 여운형을 만났을 때 ‘섭섭하다. 왜 그렇게 모범수 노릇해서 먼저 나갔냐?’ 그러니깐 몽양 여운형의 대답이 걸작이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투쟁을 하실 수 있지만, 저는 감옥에서 투쟁할 거리가 없습니다. 우린 정치권이기 때문에 나와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심산선생이 털털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꼿꼿한 기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사신 분이다.
심산은 1944년 혁명동지들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었다. 중앙책은 여운형, 북부책은 조만식. 이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왜관(倭館)에서 해방을 맞이함.
9. 심산의 위대함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들을 볼 적에, 학생들이 ‘나는 청년 심산이다! 나는 심산의 아들딸이다!’라고 할 정도로 자기 대학을 세운 사람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심산상이라는 상을 주고,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로 내어놓을 수 있는 대학 설립자가 누가 있을까? 과연 어느 대학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대학에서 20세기를 통해서 대학 설립자로서 그렇게 도덕적인 인간상을 내세울 수 있는 분은 심산뿐이다. 심산 한 분뿐이라고 생각한다.
심산상(心山賞) : 성균관대학교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심산사상연구회에서 학술과 실천을 겸비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 김수환추기경수상. 장회익(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수상.
10. 성균관대학의 미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뜻은 여러분들에게 성균관대학의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심산의 역사는 바로 20세기 우리 유학의 가장 본질적인 역사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산의 생각과 사상, 기개와 지조를 여러분들이 반드시 이 사회에 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성균관대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앞으로 성균관대학을 그러한 정신이 있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는 최소한 유학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는 유학대학이 있고, 동양철학이 있고, 한국철학도 있다. 국학의 본산이다.
여기를 삼성재단이 재단을 맡고 있는데, 삼성만 해도 일개 기업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기업이다. 그러니깐 우리나라 경제의 전체를 맡고 있는 기업답게 성균관 대학을 지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지원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 물론 삼성은 인력관리를 잘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업의 인력관리와 대학의 인력관리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움직여야 한다. 쉬운 작업이 아니다. 건물이나 짓고, 돈이나 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균관 대학을 위대한 대학으로 만들려면, 유교 이념에 의한 성균관 대학다운 그 무엇이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민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성균관 대학의 의과대학이 아무리 세계적인 대학으로 격상한다고 한들, 그것은 하버드 의과대학에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유학의 정신을 여기서 다 연구하고, 여기가 세계 유학의 센터가 된다면, 하버드 대학은 절대로 따라올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반드시 그러한 선후본말(先後本末)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 대학의 꼴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산학협동의 본질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절대로 대학을 기업화하면 안 된다. 모든 기업들이 대학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대학의 정신을 1차적인 기반으로 하고, 나머지 테크니컬한 문제는 거기에 따라가야 한다.
내가 삼성을 야단치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잘하고 있으니깐, 그러한 쪽으로 방향을 세워서 잘해나가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균관이 고리타분한 유학대학이 된다면, 머리에 색을 들인 강남아이들한테 통하겠냐고 하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이 성균관대학의 자랑이고 매력 포인트가 되는 날이 앞으로 올 것이다.
11. 성균(成均)의 의미
마지막으로 성균(成均)이라는 의미를 여러분들에게 조금 설명해 드리겠다.
성균이라는 말은 주례(周禮)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주례 춘관 대사악이라는 장에 성균이라는 말이 나온다.
大司樂, 掌成均之法, 以治建國之學政, 而合國之子第焉.
-周禮, 春官, 大司樂
대사악(大司樂)은 음악을 관장하는 가장 높은 벼슬이다. 음악하고 성균의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주나라에는 나라의 훌륭한 인재들을 데려다 교육시키는 대학이 5개가 있었다. 오학(五學)이 있었는데, 중앙에는 벽옹이 있었고, 남쪽에 성균이 있었고, 북쪽에 상상이 있었고, 동쪽에 동서, 서쪽에 고종이 있었다고 한다.
周制의 大學으로 五學이 있었다.
중앙에 벽옹(辟雍)
남쪽에 성균(成均)
북쪽에 상상(上庠)
동쪽에 동서(東序)
서쪽에 고종(䀇宗)
이러한 이름의 대학이 5개 있었다. 동서남북과 중앙에 있었다. 주나라의 수도가 있으면, 거기에 남대문, 동대문 등이 있는 식으로 가운데 벽옹이 있고 남쪽에 성균이라는 대학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운데 벽옹이라는 대학은 왕실의 자제들이 가는 곳이고, 국자(國子) 즉 나라의 자녀들은 나머지 4학에 나누어져 들어갔다. 그런데 그 4개의 대학 중에서 가장 센터 노릇을 한 것이 남쪽에 있는 성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