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격시조만 정형시이다.
이 봉 수 (시조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조를 쓰는 시인이나 평론가, 학자 할 것 없이 시조가 정형시라고 하는 데는 異論이 없지만 막상 시조 정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을 못하고 대답하더라도 답이 각각 다르다. 시조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시조의 범위가 일정하지 않아 통일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시조는 육당 최남선에 의해서 3.4조 음보를 바탕으로 한 3장 6구 12음보를 정형으로 출발했으나 이병기 이은상 김상옥 이호우 박재삼 등 거봉들을 거치면서 당초의 정형을 벗어나 각양각색으로 왜곡된 시조들이 출현하였다.
이병기, 이은상으로부터 3.4조는 파형으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시조의 형태는 단장시조, 양장시조, 변질 사설시조, 변질 엇시조는 물론 최근에는 평시조와 엇시조 또는 사설시조를 멋대로 혼합시켜놓은 시조까지, 그리고 자유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변형까지, 이론의 뒷받침도 없고 문학성도 없는 잡탕시조가 명멸하여 시조의 정의와 정형은 쉽게 몇 마디로는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크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난무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학계의 정형론도 고시조만 메주알고주알 파고 이를 소개하는데 그치는가 하면 창작계의 눈치를 보며 헝클어진 시조현장에서 결과론적으로 정형을 찾으려고 한다. 시조형식의 문학적 가치나 운율을 연구하고 이론적 정형을 확립하여 제시하지는 못하고 창작계를 뒤 따라 가며 해설하고 추겨 올리고 청소하기에 급급하다. 종장 3543이 왜 3534보다 좋은지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인지, 종장 둘째마디 5는 몇 자까지 늘여도 되는지 등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없이 단지 ‘고시조에도 그런 것이 있다, 현재에도 그런 정도의 파형까지 쓰고 있다’는 설명으로 끝이다.
고시조를 무조건 시조형식의 모델인 양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의 3635 도 고시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여과 없이 ‘전범’이라고 주장한다(홍성란, 월간문학 09.7월호 P321). ‘고시조의 實在’와 ‘현대시조의 정형’을 혼동하고 있다. 현대시조의 정형이 고시조에서 유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시조전체가 그대로 현대시조의 정형인 것은 아니다. 言文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고시조는 정형에 대한 개념이 없이 짓고 읊기(唱)만 하면 되었지만 唱이 탈락된 현대문학으로서의 시조는 정형시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형이 확립되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고시조의 답습이 아니라 현대시조의 창조라야 한다.
한마디로 시조는 창작계나 학계를 막론하고 正格이 아닌 破格으로 가고 있다. 3.4조步法을 무시하거나, 종장 첫마디 3, 둘째마디 5도 안 지키며 句. 章. 首까지 해체하고 자유시화 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시조현장에는 정형이 없다.
그러면 正格時調는 무엇인가?
육당 최남선에서 시작되고 도남 조윤제에 이어 대한민국최초의 정부가 인정한 3434 344(3)4 3543이 현대시조의 원형이며, 시조의 嫡子이며, 正格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주: 趙潤濟-정부수립당시 국문학자로 일제의 경성대학을 서울대로 개편하는 기틀을 닦음).
‘성불사/ 깊은밤에/ 그윽한/ 풍경소리’(3434-A)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3635-B) 중, B는 시조정형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A를 시조정형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 다 정형이라고 하면 정형은 없는 것과 같으므로 A만 현대시조의 정형이며 그 시조가 정격시조임이 명백하다. 모든 사람이 정형이라고 하는 것이 최대공약수이기 때문이다.
정격시조의 최소한의 구비조건은 ‘3.4조를 바탕으로 한 3장 6구 12음보의 구조에 종장 첫 음보는 3, 둘째 음보는 5자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외로 종장 3, 5 이외의 음보는 부득이한 경우 음보율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두 자 가감을 허용한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음보율을 바탕으로 한 정격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더 면도날 같이 정교한 자수정형 3434 3444 3543만이 현대시조의 정형이라고 본다. 이것이 현재의 시조정형이며 이 정형으로 시조를 정의하되 正格時調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파형 또는 변형의 似而非 時調(또는 類似時調)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논조에 터 잡아 2009년 3/4분기 한국시조단을 검토하여 본다.(일부 수정)
1. [월간문학]의 작품들
(1) 09.7월호
시조 13편 중 5편은 정격이고 파격시조 중 3편에 특별히 눈이 간다.
옹기
김제현
아낙들이/ 뒤꼍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저 흑갈색/ 옹기들/
오롯한/ 제 맛 하나 우러나길/
기다리고/ 있다./
감나무/ 한 가지/
길게 뻗은/ 뒤안길/
배부른 독엔/ 술이 익고/
장독엔/ 장이 익는/
장독댄/ 어머님의 제단/
정화수/ 떠 올리는./
3.4조를 벗어난 음보가 많은 파형시조이다. [제 맛/ 하나/ 우러나길]은 3음보 8자의 長身으로 종장 둘째음보5의 자리에 비집고 앉아 있어 보기에 딱하다. [감나무/ 한 가지]도 3.3조로 女.女의 결합 같아 부자연스럽다.
햇볕 잘 드는 뒤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장을 우려내는 옹기들을 아낙들로 변용하고 그 장독대는 정화수 떠 놓고 치성 드리는 노모의 제단으로 그려 내어 고전적인 정취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햇볕을 쬐는 아낙들’과 어머니의 ‘제단’은 어울리지 않고 더욱이 그 제단에서 ‘술이 익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술(막걸리)은 햇볕이 안 들고 온도변화가 적은 실내(섭씨20~30도)에서 숙성시켜야 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장독대에서 익는다고 하였으니 안 될 말이다. 아무리 詩라고 해도 과학적 진실의 바탕위에서 시적 논리가 맞아야 한다. 옹기와 장독대, 아낙들, 정화수, 어머니의 치성 등은 조선시대의 정감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하나 현대의 초고속시대에 이것을 본적이 없는 청소년들이 어느 정도 공감을 할지 물어 보아야겠다. 현대시조는 소재도 구각(舊殼)을 벗고 현대적으로 탈바꿈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할 날이 짧다
박시교
그대/ 사랑할 날/ 얼마나/ 남았을까/
하루가/ 너무 짧다/
이내 저무는/ 하루가/
생각의 매듭은/ 풀어 놓고/
가슴만/ 저민다./
세월 저편/ 언덕으로/
싹이 돋는/ 추억처럼/
우리/ 지난 사랑도/
다시/ 움 돋는다면/
온전히/ 너만을 위한/ 하루살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 3.4와 3.5의 정격 구(句)는 3군데 뿐이고 나머지는 파형이다. 수의 구별도 없고 행갈이도 원칙이 없는 자유형이다. 6연 10행의 자유시라고 해야 마땅하다.
첫째 首(수 라고 할 수도 없지만) 종장 [생각의 매듭은/ 풀어 놓고]를 [생각의/ 매듭은 풀어 놓고]로 읽어도 될까? [생각의 매듭]은 매듭이 지어진 생각을 지칭하지만 [생각의/ 매듭]은 생각인 매듭(매듭=생각)을 지칭함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가슴만/ 저민다] 또한 3.3조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시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보법이다.
이 시는 현대시의 특징인 메타포나 형상화는 찾아 볼 수 없고 현세어로만 짜여 진 산문에 가깝다. 시적화자는 자기감정에 함몰되어 있다.
(이하 생략)
* 졸저 평론집 <현대시조 바로 세우기> (2013년간)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