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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나그네
베드로전서 1:1-2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에 세 번째 불이 밝혀졌습니다. 기다림과 소망, 회개와 평화, 그리고 사랑과 나눔의 기쁨이 빛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불이 밝혀지기를 빕니다. 대설을 지나 동지를 향해 나아가면서 밤이 더욱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더욱 기다리게 됩니다. 삶이 분주하기는 하지만 주님을 모실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계시는지요? 정리 수납의 달인들은 옷가지를 정리하려면 일단 서랍에서 옷가지를 다 끄집어 내놓고 보라고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버리지 못해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자꾸만 자기를 비워 주님이 앉으실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님이 오신다'는 전갈은 이미 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대림절 기간을 통해 우리 마음의 잡다한 것들을 다 비워내고 깨끗하게 만들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함 없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는 주일인 오늘,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미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태백의 검룡소라고 하는 작은 웅덩이에서 출발한 물이 1,300리를 흘러 한강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흐르고 흘러 큰 강을 이루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또한, 맑은 샘인 우리 교회에서 출발한 물이 큰 강을 이루어 온 땅을 적셔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는 그날을 그려봅니다. 교회는 일종의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억압과 착취의 땅인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던 그 백성들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꿈을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여정은 예속에서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까?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홍해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동나기도 하고, 내분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공동체는 그런 모든 난관을 돌파하면서 끝끝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바로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완성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난관들을 돌파해가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간다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역사는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형제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았습니다. 갈등은 사람들을 갈라서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것이 공간적인 거리만 만드는 게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갈등으로 인해 갈라지고 찢긴 우리 마음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때문일 겁니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떤 일치를 향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마음이 통하는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는 그런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일치를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는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말씀이 없을 겁니다. 이런 일치의 바탕은 ‘서로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우리 내면에 있어야 할 것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의 마음’입니다. 존중할 줄 모르고, 존경할 줄 모른다면 교회의 일치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드러내는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심심하면 한 번씩 대형교회 교인들이 싸우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원로목사파와 담임목사파가 싸우고, 목사와 장로가 싸우기도 합니다. 말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싸웁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일치의 상징이어야 하는 교회가 왜 이렇게 싸울까요? 이런저런 원인이 있겠지만, 대개는 이익 때문에 싸웁니다. 대형교회는 재산이 많습니다. 그 재산의 관리권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가장 큰 선물은 가난이다. 가난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치의 상징이어야 할 교회가 이익 앞에서 갈라진 것입니다. 그 모습에 절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신자임에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소위 가나안 성도가 200만 명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다시금 일치의 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경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을 교회 안에서 연습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는데, 정현종 선생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꿈을 버리다니, 요새의 내 꿈은/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부동산 재벌이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거꾸로 걸어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눈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원시주의자들,/말더듬이,/굼벵이,/우두커니,/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을 꿈꿉니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무엇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꿈으로 삼으면 안 될까요? 교회도 정말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교회에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일체의 장벽이 무너져야 하는 곳입니다. 무정부적인 감각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맑은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의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 속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의 존립 근거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회람 서신인 이 편지의 발신인은 베드로이고 수신인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모든 지명은 지금의 터키에 속한 지역들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흩어져 사는’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번역어이고 ‘나그네’는 파레피데모이스(parepidemois)의 번역어입니다. 파레피데모이스의 문자적 의미는 ‘낯선 자‘입니다. 나그네라는 단어는 낯선 자보다 왠지 쓸쓸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고복수 선생이 부른 ‘타향살이’가 떠오릅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어떤 막막함과 상실감이 물씬 묻어나는 가사입니다. 사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나그네는 정착민에 비해 취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살갗이 벗겨진 존재들처럼 작은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한 사회가 어떤 일 때문에 무질서나 혼돈 상황에 빠지면 가장 먼저 공격의 타깃이 되는 것이 나그네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희생양 만들기 문화가 해왔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나그네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기존 질서의 측면에서 보면 낯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류 세계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한 사회의 실상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그 사회에 동화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나그네에게는 보입니다.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에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기 쉽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문제적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때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용어가 신학계에서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자리에 서보아야 세상의 실상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일 겁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서 있을 때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갗 벗겨진 이들처럼 살기 때문에 세상의 아픔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당연의 세계에 도전하고, 가끔은 질서에 균열을 냅니다. 균열을 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틈을 만들고 거기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디아스포라의 번역어인 ‘흩어져서’입니다. ‘흩어지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씨를 뿌린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의미심장합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힘이 없어 이산(離散)된 사람일 수 있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힘이 없어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 살라고 심어주신 새로운 질서의 씨 혹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으신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그러하고, 여러분의 일터도 그러하고, 우리가 모듬살이를 하고 있는 사회, 이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어주신 삶의 자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흩어졌다‘는 말의 적극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으신 뜻은 다른 것 없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영화롭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꽃으로 사람들을 아름다움으로 인도하고, 그 열매로 사람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실존은 저마다 주어진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유익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맑은샘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우리를 부르신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나눔으로 서로를 풍성하게 하고, 공동체 속에서 경험한 기쁨을 세상에 흘려보내라는 것일 겁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택하심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셔야만 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은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기 때문에 모세가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출40:35). 그런데 레위기는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레1:1)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고!‘ 오로지 부르실 때에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주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택하심은 특별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닙니다. 택하심은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2:9).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증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아셨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존재입니다. 성령은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자신에게 절망하고 낙심했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하늘 군대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나만 알고 있던 사람이 자아를 넘어서서 손을 맞잡고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나뉜 이들을 하나로 모으십니다. 진정한 일치는 인간의 동지적 결합이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파고 들어오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신 까닭은 우리와 더불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어느 작가는 우리 시대에 드리운 어두움의 대부분은 ‘부르심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범한 말 같지만, 여기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부름 받은 삶으로 여길 때, 나는 부르신 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부름은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 때, 즉 더 큰 뜻 앞에 우리를 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넘어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타락한 인간이란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의 버릇입니다. 그러나 인간답게 되는 것은 그런 버릇 혹은 욕망의 독재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은 순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기 위해 나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순명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의 피’가 너무 신비화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있다는 말은 예수의 심정이 되어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았다는 말은 그분과 심정을 나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세계에서 늘 상처입고 사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셨습니다. 병 들고 귀신 들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당신의 몸으로 앓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천대받는 이들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 사랑에 접속된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정녕 예수의 피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르고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건물을 다 지은 후 빚을 갚느라 전전긍긍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것은 훌륭한 건물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깊은 일치와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 교회 주보 표지에는 우리 교회의 비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건물보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깊은 일치와 사랑을 경험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존경하고, 그래서 이곳에서 경험한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흩어져 사는 삶의 자리 어디서나 주님의 임재하심을,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삶으로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없는 한 교회는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욕망의 전장으로 변한 이 세상에 파종된 하나님 나라의 씨입니다. 이것이 바로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다 나그네입니다. 정착민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나를 선물로 주는 일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우리 맑은샘교회는 모이는 교회이기도 하지만, 흩어지는 교회이기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로,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세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우리 맑은샘교회는 모이는 교회이기도 하지만, 흩어지는 교회이기도 해야 합니다.
잘 흩어지기 위해서는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뿌리를 잘 내리고 있어야겠습니다.
모진 바람에도 의연히 제 본분을 다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흐르고 흘러 큰 강을 이루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또한, 맑은 샘인 우리 교회에서 출발한 물이 큰 강을 이루어 온 땅을 적셔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는 그날을 그려봅니다...아멘!
영화 '머신건 프리쳐'가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본 영화가 아니라서..
단지,
제 관심을 끈..장면이 있어서 주목하고 봤습니다.
교회가 나오고요,
분명 예배 중인데..뭔가 정리가 덜 돼 어수선해 보이고요
누군가 불만을 토로해요. 소위 부량자??..
좀 더 품위를 갖춰..사회의 소외계층??
아니,
알아듣기 쉽게..헌금을 들고 올만 한 교인이 없어 교회 재정이 힘들다고 걱정해요.
이 때..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요.
교회의 문을 낮추고 싶다..고, 누구나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고요
(실제 영화 장면에서는..감동으로 눈물 찔끔 나오게 대사해요)
화면이 면면을 비추는데..어떤 교회에 가도 저들은 환영을 못 받겠구나...생각이 들만한 직업군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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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시간만큼은,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환기하는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통해 받은 은혜를 가지고, 흩어져 제가 사는 삶의 자리 어디서나 주님의 임재하심을,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명하신 가치대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신 까닭이 저희와 더불어 이런 일을 하시기 위함임을 흩어져 사는 매 순간 어떤 일을 하든 잊지 않도록 저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