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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05회 :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2001.3.10.)
방송일: 20010310 조회수 : 449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105회 / 단재 신채호 - 역사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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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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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영상 37"
(3-4초 보다가)
역사란 무엇인가?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는 나를 말하고,
비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 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쉬었다가)
단재 신채호,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했던 시절,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그때,
역사만이 희망임을 이야기했다.
그는 왜 역사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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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단재 신채호 - 역사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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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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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신채호 사진, 옆-화면의 좌측으로 걸어가 서면서 멘트)
단재 신채호,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며, 문학가, 역사가였던 단재, 그러나 그를 깊이있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보통 세수를 하게 되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단재는 달랐습니다. 그는 세수를 할 때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했다고 합니다.
옷 한 벌을 다 적셔가면서도 오히려 '옷 버리는게 뭐 그리 대숩니까?' 라고 얘기했던 단재.
그것은 일제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평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호, '단재'도 바로 일편단심을 의미합니다.
한번 옳다고 판단되면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는 법이 없었던 단재, 안타깝게도 그가 처했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나라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만 가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때로는 폭력을 선동했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단재는 독립이란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는 역사를 선택했습니다.
독립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역사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역사속에서 희망을 발겼한 시기는 고대사였고, 그 무대는 만주땅이었습니다.
만주, 그는 왜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주목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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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① 신채호의 신역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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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항공 14" (그림 보다가)
신채호의 새로운 역사 찾기의 무대가 되었던 광활한 땅! 만주.
도시 항공 12"
한국과 만주 인용글 그는 신문 논설에서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곳이 만주라고
했다. 그리고 만주를 지배한 부여족은 우리 민족이고 따라서 만주는 우리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다.
길TR 19"
만주문제에 취하여 재론함 인용 (보다가)
만주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고구려와 부여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는데서 출발한다.
이만열교수 34" 우리 역사의 체계상으로 볼 때 상고사로 올라가서 단군조선으로 부터 그다음에 부여 고구려 발해
를 중시하는 이런 역사인식체계상으로 볼 때 만주를 중시하는 것이 나올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군과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심지역으로 있었던 것이 바로 만주였기 때문에 만주를 중시
했다 이렇게 할 수 있죠.
그래픽 지도 16" 북만주의 흑룡강에서부터 양자강에 이르기까지 단재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던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까지 넓혀 놓았던 것이다.
그는 왜 만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신용하교수 당시의 역사는 고대역사가 압록강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왜곡된 것중에 하나가
고대사라고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 시대나 부여 고구려 시대를 보며는 우리 한국의 선조들은 동북아시아
에서 아주 막강한 민족이었고 찬란한 독자적 민족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검문소 4" 중국 집안시
차 달리고 6" 1914년, 이곳에서 신채호는 일년간 머물렀다.
춤추는 사람들 8" 집안은 1300여년 전만해도 고구려의 주요활동무대였다.
고분군 항공 21" 그는 이때 이곳에 흩어져있는 고구려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 TR 13"
- 인용구 셀 수 없이 많은 왕릉으로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 집안시.
신채호는 당시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본 느낌을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장군총 23" 집안은 도시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지로 불릴만큼 발길 닿는 곳, 시선 닿는 곳, 어디하나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닌 곳이 없는데...
- 인용/ 조선상고사 총론 신채호는 눈앞에 유적을 두고도 깊이 연구해 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
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T.U 22" 그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 전성기의 웅장했던 힘을 느끼기도 한다.
책내용 좁혀지고 21" 신채호는 고대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고증해 정리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 현장을 직접 발로뛰어 다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신용하 교수 43" 김부식등 중세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압록강 이남으로 무대를 축소 시키고 또 일본 식민주의자
들은 또 그걸 중국의 지배에서 시작이 됐다고 왜곡을 하고 그러니까 또 남쪽은 일본의 지배로 시작됐다고 왜곡을
하니까 아주 근본적으로 종래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 역사를 개척하시면서 사실과 일치하는 역사 사실대로 역사를
쓸려니까 만주가 큰 무대로 떠오른 거예요
만주 항공그림 21"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신채호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고 나선다.
그래픽 지도 12" 그의 주장은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이 만주에 발해를 세우고 약 300년간 만주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책 좁혀지고 인용구 29" 그리고 발해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임을 그의 논설 독사신론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손인 대조영이 세웠고, 우리 민족의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우리 땅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와같은 주장은 당시로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만열교수 50" 중국에 가서는 고적답사를 했구요 그리고 북경에 가서는 사경전서를 비롯해서 선진문헌을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선진문헌은 진나라 이전 진나라 진씨왕이 분서갱유를 했는데 분서갱유에서 없어지지않는 그런
책들 그런 문헌들까지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나라의 책만가지고 역사연구를 한 사람들과는 그러니까 우선 독서량 자체가
다르고 그가 해석하는 범위도 비유가사학 유학사학을 아울렀다고 했으니까 해석도 이렇게 훨씬 확장된 아주 열린
그런 해석을 할 수가 있었다
유적지 고분 항공 9" 철저한 답사와 수많은 책을 통해 얻어진 그의 새로운 역사인식은 종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분군 z.i 항공 23"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누구보다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신채호, 그는 우리의 고대사와 만주에서,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찾아냈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옛 땅에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신용하교수 당시의 만주가 한국 독립운동과 이민들의 생활무대였는데 이것이 남의 나라가 아니라 옛날에는 고대
에는 우리 선조가 역사를 만들고 생활했던 우리의 땅이였다고 하는 것이 훨씬 독립운동을 하는 데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도움이 되는 고무적인 일이였기 때문에 만주를 아주 깊이 연구를 하고 부여 고구려 올라가면 고조선
에 대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역사를 바꿔놓는 새로운 견해와 새로운 연구를 진행시켰었습니다.
조선상고사 6" 현장을 뛰면서 그는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책들 pan 20" 역사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려는 신채호의 노력은 그의 저술 조선상고사로 결실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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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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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중국 지도 위에 서서)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문화도 매우 찬란했다.
신채호의 이런 고대사 인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끊임없이 지배를 받은 못난 민족, 하찮은 국가라는 오명도 싹 씻어 낼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잃었던 나라를 찾기위해 찾아간 만주 땅, 신채호는 그곳에서 역사 뒤편에 가려져있던 강대한 우리의 역사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대사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가? 잃었던 우리 민족의 긍지를 되찾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신채호가 선택한 이런 역사 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우리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역사속에서 암울했던 현실의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했던 단재, 그는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누구
보다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역사에 몰두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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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②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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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 사진 8" 1871년 4월 강화 앞바다에 침입했던 미국의 포격을 시작으로
서양인 사진 12" 조선을 역강들의 계속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생가 전경 11" 바로 이때,
1880년 12월, 단재는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18대 손으로 태어난다.
부억들어가고 12" 시골 양반 집안의 살림은 가난했다.
단재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 신광식마저 세상을 떠나고, 단재는 할아버지 신성우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란다.
집외경 3"
책+ 인형 9"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단재는 아홉 살에 중국역사서 "자치통감"을 완전히 익혔고,
열세살때는 사서삼경을 독파해, '천재'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방문 F.S PAN 7"
나무 PAN 성균관 9" 1898년, 단재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나이 열아홉에 성균관에 입교한다.
성균관 내부 12" 당시 성균관 관장 이종원은
'너는 곧 나를 능가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채호를 뛰어난 인물로 보았다.
스물여섯살에 성균관 박사가 된 단재는
자료펼치고 12" 당대 제일의 논객, 위암 장지연의 권유를 받고,
황성신문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첫 사회 활동을 시작한다.
박교수 54" 국내 언론활동에서는 황성신문의 주필생활을 하셨고 다음에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을 하셨던거로 가정
잡지라는 여성잡지에 편집인이 됐었던 거죠 그래서 한동안 순한글로 된 잡지였습니다
이제 그 대한협회 회보나 또는 여러 잡지들에 기고를 함으로해서 논설을 많이 쓰고 언론활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황성신문 z.i 7" 그가 처음 몸담았던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사전검열없이 배포했다는
양기탁 사진 7" 이유로 무기한 발행이 정지된다.
단재는 양기탁이 있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긴지 시일에우방성대곡 11" 한달만에 '시일야방성대곡'을 그의 붓끝으로
되살려낸다.
신문 날아들어오고 20"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을 통해 일제의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논설의 강도를 높혀간다.
-논설 제목들 이무렵 단재는 국권을 회복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에 대한 많은 논설을 쓴다.
책내용 T.D 21"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許 多古人之罪惡番判 그는 논설에서 밝혔듯이, 애국심을 키우는 힘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했다.
따라서 민족의 앞날도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가 이렇게 역사를 중요하게 봤던 계기는 무엇일까?
신용하 교수 1'43" 임태보 하야시라고 하는 일본 학자가 있었는데 이분의 전공사예요 이분이 조선사라고 하는
책을 다섯권으로 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논지는 조선역사는 기자와 단 한사군에서 시작이 되고 또 삼국시대에는
가라가 큰 나라였는데 경상북도부터 시작해서 경상남도 서부 경남에 걸친 큰 나라였는데 일본이 직할식민지로서
임나일본부로 만들어 가지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임나일본부에 조공을 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썼습니다
그래서 조선역사는 단초 부터 북으로는 중구부지배를 받고 남쪽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 자주성이 없는 역사
로서 타율적인 역사가 시작이 됐고 타율적인 민족이였다고 하는 초기 식민주의 사관을 전개했어요
이 책이 한국에 들어와가지고 읽혔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구한말 교과서에도 반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활쏘는 그림 z.o 13" 단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해 논설에서뿐 아니라 시와 소설 등 다양한 글들을 통해 역사를
강조한다.
표지사진t.u 9" 그무렵 이태리을 위기에서 구해낸 세명의 영웅에 대한
책 '이태리 삼걸전'을 번역하면서 단재는 역사속의 영웅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신채호사진 10" 그리고 우리나라의 위대한 영웅으로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한 3대 영웅전을
발표한다.
책장 넘기고 7" 역사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단재, 그가 역사속의 영웅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만열교수 1'06" 그때 나라를 다시 완전 자주 독립으로 이끄는 방안이 무어냐 하는걸 생각하면서 나라가 이렇게
된 원인 자체를 규명하는데 이게 문치다. 글에 의해서 관력에 의해서 행동이 없는 그런 선비내지는 지식인들의 행태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다 공리공론의 빠진 사람들의 그런 주장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고 일단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문치와 함께 무치, 그러니까 무력 이런걸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 교육을 주장을 했더랬습니다.
그런 일련의 선상에서 이렇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가 나와야 되느냐 이때는 영웅이 나와야
된다. 영웅이 나와서 나라를 구하는데 이렇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살수대첩 그림 11"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30만대군을 무찌른 삼국시대의 대장군으로, 최영은 왜구를
물리치고 요동정벌을 시도했던 고려의 명장으로,
무량대전 그림 15"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를 물리치고 바다를 평정했던 조선시대의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책내용 T.D 15"
인용글/을지문덕 단재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 찾아야 할 때, 오직 칼과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권리수록?의 방법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용하 교수 56"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게된 근본적인 힘은 그들의 군국주의와 군사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침략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려면은 일제 군사력에 대항하는 실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핵심이 되는 것은 무력 무장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거예요 그러니까 침략의 형태가 일제의 무력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투쟁과 국권회복의 방략도 궁국적으로는 무장단투
무장투쟁이 핵심에 놓여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단재 신채호선생의 지론이였습니다.
하늘 + 자막 23" 그는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독립을 위해서는 강한 힘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역사속에서 찾아낸 세 영웅,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장군에게서도 이런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열교수 27" 그리고 이분들의 공통성이 뭐냐하면은 대외경쟁력에서 대외침략에서 나라를 수호하고 그다음에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하고 그런 영웅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일제의 침략이 농후화되는
이시기에 이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영웅의 표본으로서 이 세사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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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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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가 역사를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는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속의 영웅들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강한 나라, 힘있는 민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 그러기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곧 무력으로만 이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습니다.
(자리 이동 - 독사신론 글자 나오고)
독사신론, 신채호가 쓴 논문입니다.
그 첫 구절을 한번 보면은?
"國家의 歷史는 民族 消長盛衰의 상태를 閱 할 者라.
民族을 捨하면 歷史가 無할지며, 歷史를 捨하면 民族의 其
國家에 대한 觀念이 不大할지니 嗚呼라, 歷史家의 責任이 其亦 重矣哉인저"
한 국가의 역사는 그 민족의 번영과 멸망을 담고 있어서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고, 그 역사를 버리면 국가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니 역사가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렇게 신채호는 그의 글에서 역사와 국가, 민족을 공동운명체로 보았을만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역사가의 책임 또한 그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인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꼽았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건데 최대의 사건, 적어도 단재에게는 그렇게 보였던 사건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려사에는 반역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과연 무슨 사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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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③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 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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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는 그림 15"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묘청에 대한 당대 기록부터 살펴보자.
그래픽 책 6" [고려사절요] 인종 10년의 기록이다.
자막 나오고 14" "묘청을 저자에 내가 목을 베라고 쓰고 있다"
책장 넘어가고 17" [고려사 절요] 인종 12년의 기록은 어떠한가?
"묘청을 베어 하늘의 경계에 응답하시고 민심을 위로"하라고까지 적고 있다.
승려 걸어오고 16" 묘청, 고려중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그에 대한 당대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그를 반역자요,
허황된 술수를 부리는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신채호는 왜 그런 묘청에 대해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그래픽 지도 16" 12세기, 고려 중기로 오면서
12세기 고려 상황 거란의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의 안정된 삼각구도는 여진족이 세운 금의 등장
으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정신 교수 52" 이렇게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 불과 8년후가 되면 인종 3년이 되는데 그 시기에 가면은 금나라는
세력이 강해져서 고려에 대해서 형제관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고려는 동생의 나라고 금나라는 형의 나라다
이렇게까지 세력을 강하게 키워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옛날의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이 이제는 세력이 강해져서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인종대 가면은 그래서 고려는 신하의 나라요 여진은 임금의 나라 이렇게 격하시키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고려
조정이 대단히 분개를 하게됩니다
촛불 17" 이때 묘청이 등장하여 금나라를 아예 정복해버리자고 주장하며 칭제건원까지도 내세우게 된다.
이만열교수 54" 칭제건원이라고 하는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황제라 칭하고 그 다음에 연호를 정하자.
황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왕과 황제를 구분하지 않는데 중국과 맞설수 있는 중국의 중심에 황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라고 할적에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다라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원이라고는 연호를 정한다. 연호라고 하는 것은 독립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성을 강하게 부르지을 적에는 연호가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고려때나 조선조때보면 연호가 없습니다. 연호가 없는데 이때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만들자.
이건 그러니까 독립심의 상징으로써 대단히 중요한거고
그래픽 지도 8" 묘청은 이어서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고려사절요 표지 16" 서경에 궁궐을 지어서 수도를 옮기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 인용 금나라도 항복을 할 것이며 주변의 36개국이 신하가 되어서 고려를 따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정신교수 1' 일단 서경에 천도를 한다는 것은 수도를 옮기면은 그 당시에지지 기반이 새로운 지지기반이 생기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개경 세력이라고 불리는 문벌귀족들의 거대한 개경에 존재하고 있던 세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경에 가서 새로운 지지기반, 기존 지지기반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정국구상을 할수 있다
하는게 서경으로 천도하는 가장 큰 의미가 되리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서경이라는 것은 원래 고구려의 수도였고 북진정책의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부식 영정 12" 당시 상황이 서경천도로 기울어지자, 개경을 중심으로한 김부식등 문벌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
고려사 절요 표지 15" 김부식은 강력하게 급부상하는 금나라와
- 인용구 전쟁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문벌귀족의 강한 반발에 인종은 결국 서경천도를 포기하고 만다
군사 창들고 뛰고 13" 개경중심세력에 의해 서경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은 난을 일으킨다.
고려 인종 13년의 일이다.
깃발 9"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주장했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무너지고 8" 결국 묘청의 난은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신채호 사진 8" 이것이 단재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꼽았던 묘청의 난이다.
책 4" 이 사건이 그에게는 왜 그렇게 크게 보였던 것일까?
신용하 교수 1'08" 단재 선생은 묘청을 자주적인 정치가, 자주적인 승려이고 문인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김부식은
사대주의적이고 중국 의존적인 정치가이고 역사가라고 봅니다.
그래서 묘청이 자주적인 힘을 길러서 궁극적으로는 만주도 회복하고 우선 요동을 회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군사를 데리고 묘청을 쳐서 묘청을 패배시킨것 그리고 삼국사기로 압록강 이남에 만족하도록 정신교육
을 시킨것 이것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힘이 없는 나라 작은 나라로 만든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고 보고 있어요.
김부식 영정 9" 묘청의 난을 정벌하고 돌아온 김부식은 '문하시중 판이부사 감수국사'라는 벼슬을 얻게되고,
삼국사기 편찬 총책임을 맡는다.
삼국사기 z.i 13"
그러나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했던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내용도 거세게 비난한다.
이만열교수 49" 삼국사기에 보면은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중국적인 관점
에서 유교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것을 비판하는 것이 더러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가 중국과 전쟁을 해가면서 자주권을 수호하려고 했다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중국을 어떻게
거역해서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라는 그런 비판이라던지 하는 것이 더러더러 보입니다.
그리고 거리를 측정하는 그런것도 우리 자치내에서 가령 지역이나 거리를 얘기하지 아니하고 북경에서 몇리가
된다든지 이런 가치관 문제에서도 중국중심의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신채호 그래픽 영상 27" 신채호는 김부식의 사대주의 때문에 중국의 눈높이로 쓰여진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또, 신라중심의 역사관으로 인해 가장 강대했던 우리의 고대 역사가 빠져버렸고 결국 대국이 소국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삼국사기 14"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역사서로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왜 이렇게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정신 교수 50" 제일 중요한 이유는 역시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지금 현존하는 사서중에서 삼국사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이 삼국사기를 통해서 우리는 삼국시대나
신라시대 그 이전 시대에 대해서 편린이라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 것인가 하고 난감할 정도로 삼국사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책이 제대로 쓰여졌더라면 우리의 민족정신을 좀더 밝혀주고 자주
의식이 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촛불 16"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북벌과 개혁을 내세웠던 묘청, 따라서 '묘청의 난'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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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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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시대에 따라 새로이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채호의 바람처럼 만약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채호는 "우리 역사가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면서,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단재는 붓끝으로 일제에 맞섰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만큼 그의 글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데요,
(矣자 발생)
독립운동시절 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단재는 생계를 위해서 중국의 중화보에 논설을 집필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채호의 논설이 실리면서 신문의 발행부수가 점점 늘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사에서 단재가 쓴 논설가운데 조사에 불과한 의(矣)자를 마음대로 고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 상황은 어땠겠습니까?
신채호는 논설을 중단해버립니다.
독자들이 줄어들고 신문사 사장은 매일같이 단재를 찾아와 사과를 하려 했지만, 단재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생계가 끊길지경에 이르렀어도, 단재는 그보다 한국인을 무시하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참을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그리곤 생계를 위해서 글을 썼던 자신을 질책했다는 겁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단재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느낄 수 있는 단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혁명선언 글자 나오고)
독립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신채호의 글, 그 대표적인 글이 '조선혁명선언'입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신채호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는데요,
'조선혁명선언'!
그것은 독립투사들의 바이블이자 행동지침서로 통했습니다.
투쟁목표와 대상을 결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조선혁명
선언, 왜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에게 '조선혁명선언'을 써 주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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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④ 신채호의 투쟁방법을 제시한 '조선혁명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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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 T.D 10" 6천 4백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완성된 조선혁명선언!
최남선의 '3.1 독립선언서'와 함께 최고의 명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극기 4"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했던 조선혁명선언!
상자 뚜껑열고 6" 그 글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조선혁명선언 Z.I 8" 조선혁명선언,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언문 내용 글자 16" 강도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일제에 대한 고발로 시작되는 이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김영범 교수 38" 그 내용의 요지를 말씀드리면 문서 제목 그대로 조선에서 조선민족을 주체로한 혁명이 필요
하다는 거였습니다 왜 혁명이 필요한가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단재 선생은 그것을 강도통치라고 강도정치
라고 표현하셨는데 식민지통체에 의해서 조선민족의 생존조건이 압박받고 또 모든 조건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을 해야만 조선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였죠
그랬을 때 그 혁명의 진로내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단재 선생은 선언속에서 다섯가지로 간추려 제시하셨습니다.
모니터 화면들 29"
첫째,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고유의 것을 찾는다.
둘째, 특권계급을 없애고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찾는다
셋째, 경제약탈제도를 없애고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든다
넷째,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다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다섯째, 문화적 차원에서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선언 넘기고 5" 조선혁명선언은 혁명을 하기위해 제거할 대상까지 밝히고 있다.
이만열 교수 38" 그리고 이 혁명을 위해서는 일곱까지 제거해야 될 대상이 있다
이것을 칠과살 일곱가지 가히 죽여버려야 할 그런 대상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조선총독과 고관이라던가
일본군 수뇌라던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부, 밀정들 그리고 반민족적 토호 이런 존재는 다 죽여버려야
된다 없애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선언 내용 T.D 23"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 인용 신채호는 투쟁의 방법으로 무력을 선택한다.
식민지 지배아래서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길밖에는 없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조선혁명선언은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여진 것일까?
북경 전경 Z.I 20" 1920년 북경은 당시 외교활동에 치중하던 임시정부와 독립의 방법을 달리했던 항일세력의
활동무대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신채호는 이곳에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가까워진다.
단재 + 김원봉 사진 8" 김원봉과 신채호는 무력투쟁 노선을 같이 했던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자료 넘기고 9"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결성됐다
일본 기사내용 7" 그들은 암살과 폭력, 파괴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았던 항일 비밀 결사 단체였다.
폭탄 사진 PAN 14"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의열단이 선택한 폭력투쟁방법은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영범 교수 52" 그동안 의열단이 취해온 독립운동노선에 대해서 그것이 단순한 테러리즘이다 내지는 과격
주의다 또는 공포주의다 식의 비판이 상당히 가해져 왔었습니다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유력인사들까지도 그런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1922년 3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이 시도했던 폭탄의거라고 하는 일본육군대장 다나까기지
를 저격한 의거에서 그해 아쉽게도 실패하면서 불행히도 미국인 영국인 중국인 사상자가 생겨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직후에 여러 군데서 비판이 들어오고 해서 의열단이 어떤 면에서 궁지에 몰려있었죠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의열단이 자기 노선의 정당화를 기하면서 이념적인 재무장을 기하기 위해서 어떤 그런 뒷받침을 해줄수 있는
선언이 하나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한시준 교수 그래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신채호선생한테 와서 우리 의열단이 이러 이러한 활동을 한 단체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 활동에 어떤 정당성, 이념적 지표가 될 만한 그런 문구를 작성해주십시오. 라고 요청하게 되죠.
그 요청을 받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이 폭탄을 만드는 폭탄제조서를 직접 방문합니다.
그때 의열단에서는 단재 신채호 앞에서 실제로 폭탄을 터뜨려보이죠
그걸 보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감흥을 해서 소위 분격해서 조선혁명선언을 지필하게 됩니다.
벽+ 모니터 z.i 40" 1923년 1월, 신채호는 한달간의 심혈을 기울인 끝에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의식을 한껏 고양시켰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바로 그때,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을 비롯하여
1924년 김지섭의 동경 2중교 폭탄투척 사건등 의열단의 활동은 한층 치열하게 전개됐고, 일본을 공포에 떨게한다.
한시준 교수 43" 의열단으로서는 아 이제 우리는 혁명가다 우리 의열단은 혁명단체다 우리는 혁명운동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취지에서 굉장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혁명선언을 중국관내라던지
만주 러시아 미주 곳곳으로 국내로 우편으로 보냈고 일본 도쿄에는 관원들을 시켜서 일부러 살포하기도 했고 거사
때는 항상 이걸 가지고 휴대하면서 뿌렸구요 그래서 이 조선혁명선언과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으로서는 하나의
정신적 지주처럼 그렇게 여겨졌고 굉장한 자부심과 긍지를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 됐었죠
동상 주먹 Z.O 40" 단재는 이 선언문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民衆은 우리 革命의 大本營이다.
暴力은 우리 革命의 唯一武器이다.
강도 일본의 統治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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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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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Z.O되면 옆에선 MC 멘트)
앞이 한치도 안보이는 암담한 상황
신채호는 한때 절망에 빠진 현실을 구출해 내줄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장군에 전기를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수많은
일반 민중의 자각과 투쟁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아와 비아의 투쟁 글자)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즉 나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쟁취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채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고 있던 역사관입니다.
수많은 논설과 역사서, 선언문으로 독립심을 부추겼던 그는 드디어 1928년 실천적인 행동가로 독립운동 전반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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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⑤ 신채호의 실천, 그리고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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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TR 16" 조선혁명선언에서 이미 밝혔듯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신채호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실천하게 된다.
그는 왜 무정부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이만열 교수 40" 나약한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독립운동이라고 판단했을적에 그는 더 강한 행동으로 나가야된다.
그래서 조선혁명선언을 쓰고, 그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을 강조한 민중해방을 강조한 그러한 이념을 실천적
으로 내세우기위해서 소위 무정부운동에 나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무정부운동은 초기에는 독립운동과 물론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또 끝에도 연관이 되어있지만은 무정부운동
자체로서의 가치도 굉장히 있습니다.
사진 7" 신채호가 지향했던 무정부주의 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배들 지나가고 6" 1928년 신채호는 천진항으로 향했다.
멀리 배 보이고 z.o 15"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 필리핀등 7개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천진
대회에 참석한 신채호,
그는 여기에서 비밀결사조직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하고, 그 운동 방향을 모색한다.
선언문 내용 8" 당시 발표했던 선언문의 내용이다.
내용 T.D 24" 짐승같은 자본주의 강도 제국들이 식민지 국민들의 온갖 물건들을 다 빼앗아서 그들은 배가 터지려
한다 그런 고로 식민지 국민들은 싸워서 그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호룡 교수 43" 이 천진대회에서는 보면은 북경교회에다가 폭탄공장을 만들어가지고 체러활동을 하잔 얘깁니다.
각국으로 테러단을 보내서 고관을 암살한다든지 각 기관들을 파괴를 한다든지 그런 활동도 하기로하고 그래서
독일인과 러시아인 폭탄 기술자를 초빙을 해서 기술도 전수받기로 하고 그리고 또 기관잡지도 발행해서
아나키즘을 선전하기도 하고 그렇게 결정하고 그런 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야되지 않습니까
돈뭉치 29"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재는 직접 행동에 나선다.
당시 뜻을 같이했던 북경우체국에 근무하는 대만사람 임병문과 함께, 각국의 위조 어음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만들기로 한다.
계획은 액면 6만4천원의 외국어음 2백매를 위조해 일본. 대만. 조선 등의 우체국에 발송하고, 현지에서 다시 찾는
것이었다.
바닷길 20" 신채호는 당시
'유맹원'이란 가명을 쓰며 중국인으로 변장했다.
1928년 5월 8일, 신채호는 돈을 찾기위해 일본 고오베를 거쳐 대만행 배에 올랐다.
깃발 Z.O 13" 대만 基隆항,
안타깝게도 신채호의 정보는 유출되고 말았다
그가 상륙직전 미리 연락을 받은 일본 水上경찰들은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항구 PAN 12" 그는 기륭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체포되었고 중국 대련으로 이송되었다.
신문 12"
감옥 창살 PAN 14" 신채호는 여순감옥에 투옥됐다.
이곳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살이를 한 역사의 현장이다
천장 15" 1930년 5월.
신채호는 '유가증권위조, 동행사 및 사기죄'와'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신채호 사진 4"
신채호사진 커지고 16" 수감 당시 신채호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당했다
죄수번호 411번.
나이 49세 신채호
창살 햇살 11" 수감생활중 병을 얻었던 신채호에게 일제는 병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여사 32" 일본사람들 생각에는 그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그러면은 세계 여론이 않좋고 당신을 보호할 사람만
있으면 병보석으로 내보내주겠다
그런데 실제로 보호할 사람도 나왔어요 나왔는데 우리 아버님이 내가 그 민족을 반역을 하고 그런 사람의 보호에
내목숨을 굴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문고리 잡는 손 +독방내부 18" 그를 도와줄 사람은 일제의 앞잡이,
대의와 지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단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자료찾는 피디 15" 단재가 수감된 뒤, 그가 전에 썼던 글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국내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조선사 기사 6" 기자를 통해 자신의 글이 연재되고 있음을 전해들은 신채호는 그가 쓴 역사서들은 수정할 곳이
많아서 아직 빛을 볼 때가 아니라고 했다.
출옥후 손을 봐서 발표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책 5" 미완성의 역사서,
그것이 지금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다.
창 z.o 13" 역사만이 희망이었던 신채호
그는 수감생활동안 노역에 동원되면서도 틈틈이 한 10분씩 쉬는 시간도 아끼며 책을 읽었다.
면회기 기사 18" 면회온 조선일보 기자에게 책을 들여보내 줄 것을 부탁했던 그가 읽기 원했던 책은 대부분
역사서들이었다.
책 16" 신채호는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대가야국천국고>, <정인홍공약전> 두가지 역사책의 구상을 이미 끝냈다고
적고 있다.
신채호 사진 9" 죽는 그 순간까지 역사에 몰두했던 신채호. 역사는 그에게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용하교수 1'07"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은 조국과 민족을 다시 찾을려면은 가장 필요한 것은 단재선생에 의하면
애국심이라고 봤어요. 이 애국심을 배양하는데는 역사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봤습니다.
국민들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사를 가르쳐놓으면 그것도 조국의 정신이 있는
얼이 스며들어 있는 역사를 가르쳐 놓으면 그 사람들이 또 특히 청소년들이 역사를 배우고 자라서 애국심이 배양
되어가지고 반드시 미래에는 역사의 힘으로 통하는 애국심의 힘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궁극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할 것으로 봤습니다.
새떼 15"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단재는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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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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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 그림 흘리고)
지난 2월 21일
단재 서거 65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완전독립, 절대독립만을 원했던 단재 신채호, 그는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단재 신채호에게 역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위한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대사 연구를 통해, 좌절에 빠져있는 일반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독립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신채호의 생각이었습니다
(단재 사진 나오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위해서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하고 그러기위해서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는 역사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역사만이 희망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실천적으로 독립운동 전면에 나섰던 단재 신채호,
그는 갔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