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山 문 화 기 행함양 안의 정자와 누각을 찾아서
함양 안의 정자와 누각을 찾아서 - 심원정
<심원정>
안의를 들른 후 곧장 용추계곡으로 차를 몰아 심연정을 찾는다. 황석산과 기백산의 입구이기도한 용추계곡엔 많은 보물들이 묻혀 있는데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화림천 계곡 못지않게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흉물스런 매표소 건물 바로 옆 송림에 숨겨진 심원정(尋源亭)은 1558년 돈암 정지영이 현 위치보다 조금 상류인 덕추폭포 부근에 초가로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1770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였으나 풍수해로 훼철되었다.
1845년 7세손 정복운 등이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으며 1948년에 중수가 있었다. 심원정은 용추계곡 입구의 매표소 바로 우측을 흐르는 지우천 계곡의 제 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위에 건립되었으며 심진동 초입에 세운 정자이다.
옛 안의에서는 삼가승경(三佳勝景)인 심진동 심원정, 원학동 수승대, 화림동 농월정을 삼가승경(三佳勝景)으로 불렀다.
심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단동으로 세워진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는 모두 틔워 경관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배면 쪽의 모퉁이를 틔워 누상으로 오르게 하였는데 현재 계단은 배면 쪽의 자연 암반위에 시멘트로 3단의 계단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다.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8cm 정도를 연장하여 평난간을 둘렀고 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였으나 암반이 크지 못하여 암반위에는 초석을 쓰지 않았으나 암반이 아닌 부분에는 큰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였으며 기둥위에는 익공 없이 보아지로 처리하였고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대들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도록 하였고 종보위는 반자를 설치하여 격을 높였다. 좌, 우측면에서는 충량을 대들보위에 얹었는데 충량의 머리 부분에는 용두를 초각하였고 가구재에는 모두 단청을 올렸다. 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
<심원정>
<심원정 현판과 액자>
정자 맞은 편 바위에는 심원정이라는 각자가 보이는데 글씨체가 대담하고 아름답다.
심원정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기단이 거친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다.
동서양 건축물들이 대부분 바위를 깎아 평평하게 터를 고른 후 집을 짓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거친 바위를 그대로 두고 집을 지었다. 그래서 기둥의 길이가 각기 다르다.
둘째, 기둥을 다듬은 것을 보면 가지만 툭툭 쳐내고 가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인공미를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이와 같은 기둥을 도량주라고 한다.)
셋째, 바위의 빗면에 맞추어 기둥을 잘랐다. 이러한 기법을 '그랭이법'이라하며 전통건축 양식에서의 찾아볼 수 있다.
* 기둥의 그랭이 기법 : 거친 주춧돌의 표면에 맞추어 기둥을 다듬어 밀착 시켜 세우는 방법
* 박명부의 오언절구 시
하얀 돌에 흐르는 구름은 천 가지 모습(白石雲千面)
푸른 댕댕이 넝쿨은 수많은 베틀에 베를 짜네.(靑蘿織萬機)
다 묘사하지 말도록 하라.(莫敎摸寫盡)
다음 해에 고사리 캐러 돌아올지라.(來歲採薇歸)
다시 돌아와서 은자적 삶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한 스승의 절창에 임훈은 느낀 바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쳤다. 스승의 시를 차운한 「화림동월연암차남명운(花林洞月淵岩次南冥韻)」에 이 같은 사정은 잘 드러나 있다.
흐르는 물 천 구비 돌아드는 곳(流水回千曲),
형체를 잊고 앉아 기미마저 놓았다네(忘形坐息機).
참된 근원 모두 궁리하지 못했는데(眞源窮未了),
날 저물어 쓸쓸히 돌아간다네(日暮弧歸冬).
<심원정>
<심원담 건너 바위 각자>
<심원담>
<바위에 자연스레 건축된 심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