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의 길
차(茶)의 메카인 비봉루(飛鳳樓)의 비사(祕史) 6
오성다도(五性茶道)
아인 선생이 이도다완을 새로 구웠으니 보러 오라는 초청을 받고 아인 선생이 손수 말차를 격불해 권했을 때 잔을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질문했다고 한다. 선생은 말차 한 잔을 더 격불한 뒤 직접 본을 보이셨고 세 번에 나누어 마셨을 때 향이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잊을 수 없어 아인 선생님께 자청해 차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성다도의 첫걸음이었다. 아인 선생은 “김정 부인이라는 사람을 추모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는데 그녀는 구한말 채소를 키워 팔아 번 돈으로 옛 중안초등학교(현 진주초등학교)에 여학생 전용 교실을 두 칸 지어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걸 강조한 사람이라며 진주교육대학교 박물관에 부인의 자료가 다 있다."
이런 김정 부인의 정신은 오성다도에까지 영향을 끼쳐 '김정 차회'를 만들었고 이 다회가 발전하여 현 오성다도회가 되었다고 한다.(오성다도회는 10년간 사천 축동에 있는 김정 부인의 묘소에 가 헌다를 했으나 현재는 아인 선생을 위한 헌다례가 매년 5월 첫째 토요일에 있다.)
가야의 차는 김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로 시작이 되었다. 42년 7월28일 김해에 도착하여 김수로왕을 만나 결혼을 한 허황후는 자신이 가지고 온 차를 심었고 이 차는 후일 백제와 일본에 전해졌다. 당시 이 차는 백성을 치료하는 약제이기도 했으며 성찬식에 사용되었다.
김민석 교수(오성다도명가연 대표)는 태초의 인간은 자연과 모든 사물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것이 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서양이 공히 중세에 이르기까지 절대자로서 신의 존재를 받아들였으며, 인간은 지극히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신의 가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신을 앙망의 대상으로 추앙하고 신에게 제사 드리거나 기도드리는 것을 당연한 인간의 도리로 생각했다.
특히 스키타이계의 유목민들은 이러한 제사에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사장을 두었는데, 제사장은 황금빛 왕관을 쓰고 황금빛의 차를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렇듯 차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아직도 우리 민족은 차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차는 단순한 음료의 기능을 넘어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산사의 학승들과 자기 수양과 수련을 하는 많은 사람이 차를 통해 도를 구하는 이다양성(以茶養性)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한국 근대 차교육의 효시인 아인 박종한(亞人 朴鐘漢) 선생은 이다양성을 위한 다섯가지 원리로 오성다도(五性茶道)를 만드셨다. (우리차의 역사와 세계 차문화] 제3화 以茶養性을 위한 五性茶道 原理 경남미디어 승인 2020.10.22.)
가야의 성찬식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의 다도는 성찬식을 모체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