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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차수현<2023경남도민일보 신춘문예>(감상 홍정식)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출처 : 경남도민신문(http://www.gn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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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여유롭고 즐겁습니다. 좋은 풍경을 보고 하루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나온 것들에 대해 혹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줍니다. 이 시는 인간의 산책이 아닌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산책입니다. 종일 집에 있다가 원래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온 개의 입장에서 보는 산책이죠.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이 글의 화자가 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혀 내밀고 달리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르는 반려견. 집 안에 갇혀 있다가 나오니 겨우 웃음이 나오는가 봐요.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급기야 이제 주객이 전도되는군요. 자신이 무슨 저승사자라도 된듯한 말을 합니다. 죽은 사람 목줄을 채운다네요. 이런 부분이 시인의 사색부분입니다. 시 창작의 노력이 보이는 부분이고요.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산책을 하면서 생생함을 느낍니다. 삶과 죽음이 한곳에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것, 죽어 있는 것, 그리고 영을 찾는 것들까지 모두 한곳에 있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아이들은 천사와 다름없습니다. 천사들이 노파가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나팔을 불어 영접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주인 여자를 놓칠까 줄을 당기죠. '마지막 의자'는 레테의 강과 같은 장소로 여겨집니다. 노인은 입춘이 지나서 봄눈의 생사가 움찔댄다고 합니다. 봄눈은 봄에 온 눈일까요? 아니면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봄꽃의 눈일까요? 둘 다가 아닐까요? 중의적 의미로 말이죠.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망자가 보입니다. 검은 것들 중 유일한 흰 새 말이죠. 그런데 흰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정상이죠. 그 비정상은 무엇일까요?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아, 너무 무서운 표현입니다. 다소 순화시키기 위해서 자음과 모음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해 놓으니까 더 섬찟합니다.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비가 오는 표현을 뚝뚝이라고 해 놓았네요. 사실은 비가 아니고 피가. 제 감상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강렬해서 말이죠. 아, 좀 더 서둘러야 했어요. 내가 좀 더 서둘러 그 흰 새를 킁킁 냄새로 찾았어야 했는데, 늦은 것 같습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어떤 반려견 같이 살았나 봐요. 주인을 살리려고 얼굴을 계속 핥았나 봐요. 사람들은 몰라도 반려견들은 알 수가 있죠. 노파도 이제 가려나 봐요. 다만 하나의 당부를 우리에게 남기고 갑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주위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이 보이지 않으면 문을 두드려주세요, 그들은 외롭기도 하지만, 항상 나처럼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마디 말이라도 건네주세요, 라고 말이죠.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이제 산책할 시간입니다,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를 바랍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도 자주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결국 이 시는 주변을 둘러보라는 당부의 시입니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는 기형의 인구구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둘러볼 때입니다. 사람의 온기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반려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