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냉장고-SF적인 저장고
한 외신 기사에 따르면 영화 쥬라기 공원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이 영화에는 공룡의 피를 빨아먹다가 호박 속에서 화석이 된 모기가 나오는데, 이 모기의 피에서 추
출한 유전자(DNA)로 공룡을 복제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점심 식탁 위의 생선을 보관하던 냉장고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공룡 부활의 단초가 되는 모기의 피는 모기의 신체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호박을 통해 추출된다. 그런데 원리상으로만보면 이런 메커니즘은 냉장고의 냉장 및 냉동 기술과 다른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슈퍼마켓의 냉장 진열장에서 식품을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신선도란 무슨 뜻인가? 인간의 관점에서 먹기 좋은 상태를 뜻하는 신선도란 적정 수준의 냉기를 통해 생물의 물리
부패를 저지한 결과다. 그것은 생물의 유전자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는 기술력을 말한다. 영화에서는 호박 속의 모기가 실험실로 가고, 일상에서는 냉장고 속의 동식물이 인간의 위로
들어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식품 저장고처럼 보이는 냉장고를 좀더 긴 주기로 사용하게 되면, 공상과학영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에이리언 같은 영화를 보면, 엄청난 속도로 몇십 년, 몇백 년의 거리가 떨어진 별로 항해하는 우주비행사 이야기가 나온다. 고작 백 년 이하의 수명을 지닌 인간이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간 아주 긴 잠을 잔다. 이 긴 잠은 죽음 상태와 비슷하지만, 생물학적 부패와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대개 그들의 수면은 적정한 냉동 상태를 유지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발상은 수만년 전에 지구에 왔다가 남극에 잠들어 있던 외계인이 깨어난다는
극장판 영화 「X파일도 마찬가지다. 냉장고를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한 SF적인 사물이자, 완전한 생물학적 죽음을 저지하고 유예시키는 신화적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냉장고가 부활과 '보존'의 타임머신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냉장고라는 저장고가 없었더라도 천문학적인 규모의 동물 도축과 바다생물 포획으로 이루어진 현대의 음식 문명이 가능했을까.
가끔씩 인간의 천국이 동물들의 지옥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있다. 마법학교의 덤블도어 교장도 갖지 못한 해리포터만의 특출한 능력 중에는 동물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리
포터 마냥 동물의 소리를 듣는다면 사람이 만든 이 문명세계에 대그들의 공포와 증오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무섭다. 편혜영의「사육장 쪽으로」라는 소설에는 갑작스럽게 아이에게 덤벼들어 아이를 물어뜯는 개 이야기가 나온다. 개가 미친 것일까? 어쩌면 개의 '광기'는 광기가 아니라 개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증오는 아닐까.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사육되고 도축되는 지구상의 동물들이 가장 끔찍해하고 증오할 만한 사물이 있다면 무엇일까. 내 대답은 냉장고다.
냉동고. *51가지 사물체험
(중략)
이것은 시간, 부패, 죽음에 대한 행복한 승리다. 게다가 치명적인 시간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이 대단한 기계는 식료품만이 아니라 우리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도 보존해준다!
물론 이 기계는 육면체 모양의 수프, 덩어리가 된 소스, 깨뜨려 먹어야 하는 주스, 돌처럼 딱딱한 살코기 같은 괴물들을 낳았다. 액체가 고체가 되고, 말랑말랑한 것이 딱딱한 것으로 변했다. 완두콩은 조약돌이 되었고 생선은 장작이 되었다
(중략)
냉동고에서는 흰 문과 에나멜로 봉인된 정적, 죽음의 변경에 있는 아득한 세상, 중단된 생명, 추위로 얼어붙은 부동의 시간이 펼쳐진다.
여기서 얽히고설킨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열은 생명을 죽이는 것인가? 냉기는 시간을 멈추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생명과 온도, 죽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냉동 배아에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생명의 씨앗인가? 아직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닌, 그 냉동용기 안의 현실은 무엇인가? 이 딱딱하게 굳은 미완의 생명은 존재의
어떤 층위에 머물러 있는 걸까? 냉동고는 왜 죽음과 거래하는 반(反)시계가 되었을까?
냉장고.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중 발췌
이 상자는 바깥의 상온보다 낮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냉기들의 천국이다. 이 상자가 신을 위한 경배와 아무 상관이 없고, 영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되거나 고귀한 이상을 정화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냉기를 내뿜는 이 상자 내부는 사물들, 특히 입안으로 들어오는 음식물들의 부패와 죽음에 대한 차가운 승리를 담보한다. 그 승리를 위해서 냉장고는 자기의 내부 영토에 냉기의 철권통치, 냉기의 전제주의를 펼친다.
냉장고는 식품들의 얼음묘지이다. 여기 낭비하는
사회의 생태계가 고스란히 얼음지옥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이 얼음묘지에 모여 있는 것들은 탐욕과 포만에의 욕망에서 잠시 유예된 것들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냉장고 속에 처넣은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잊힌다. 그것은 다만 망각의 결과일 뿐이지 부패와
죽음에 대한 차가운 승리라는 신화는 과장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냉장고 안에서도 부패는 진행된다. 부패의 진행 속도가 상온에 견줘 늦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