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식 #14
'형.. 형.. 일어나세요...'
동민이의 목소리에 난 눈을 떴다. 내 방이었다. 언제 내가 방에 들
어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기야 요즘 생활하는 것 자체가.. 현실이
아닌 것 같으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동민이가 테
입 하나를 건낸다. 알고보니 동민이 뿐만 아니라, 친구와 후배 몇몇
이 방에 와 있었다. 그들에게 눈인사를 한 후, 난 테입을 들여다 보
았다,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 길거리에서도 구하기 힘든 싸구려 테입
이었다. 난 테입을 들어 앞 뒤로 돌려보다가, 동민이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 저녁에.. 노래방 갔었어요.. 그리구 성미 노래 부르는거 녹음해 온
거예요. 성미가 부탁해서..'
' 그.. 그래???'
난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위에 있는
워크맨을 집어 테이프를 넣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이어폰을
꼽았는데, 동민이가 내 이어폰을 다시 귀에서 빼며 말했다.
'형.. 할말이 있어요.. '
아참.. 지금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군.. 난 주변에 앉아있는 친구와
후배들의 얼굴을 주욱 돌아봤다. 다들 뭔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난 궁금해 하는 얼굴을 하고 동민이의 입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 형.. 내일이 종업식이예요. 내일 지나면, 형 성미 이대로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몰라요. 형.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 어... 어.. 그게 말이지.. 너희들도 알다시피...'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이랄까, 나는 '깡패가 무서워서 못다가 가겠
다' 라는 말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를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동민
이는 이런 나의 심정을 알겠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형.. 형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수 없다는 거 잘 알구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성미를 떠나 보낼수 만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
늘 2차 노래방 끝나구 나서, 몇몇 애들끼리 3차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같은 과 학우로서 두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의논을 해
봤어요.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이렇게 저녁에 테입도 전
해줄 겸 해서 찾아온 거예요.'
'아.. 뭔데??'
동민이와 옆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비장한 눈빛을 보이며 자신들이
세워놓은 계획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 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이라는게 대충 이랬다. 우선 자신들이 학교 총학측에게 사정
이야기를 해서, 내일 하루간 교수,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이들과
관계된 사람을 제외한 학교와 관련이 전혀 없는 사람의 출입을 막
아 그녀의 삼촌 부하들의 학교 진입을 막은 후, 그녀만을 학교에
들어오게 한다. 그리고 난 후, 내가 정문이 아닌 후문쪽으로, 친구
들의 도움을 받아서 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학교에서 그녀와 만
난 후. 아무도 모르게 아는 선배의 차를 타고 정문으로 빠져 나온
다. 그래서 둘이 잠적한다.. 가장 뒷 부분에서 어디로 잠적해야 될
지 아무도 이야기 해 주지 않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방법이
생기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
인 말에, 이미 총학 측 사람들과 아까 술자리에서 이야기도 끝났다
고 한다.
'형..어때요?? 계획??'
'그런데.. 저쪽은 조직폭력배구.. 또 내일이 마지막 날이니까.. 인원
도 상당할텐데.. 그놈들이 안으로 쳐들어 오는걸 어떻게 막으려
구??'
나의 이 말에 동진이는 그건 걱정 마라는 투로 말을 받았다.
' 형.. 아까 저희꽈에서 '사랑사수대' 라구 해서 내일 교문 막을 사
람 지원자를 찾았었거든요. 근데 자그만치 15명이나 지원을 했어요.
그리구 아까 형네집 오기전에 오늘 참석 안했던 과 사람들한테도
전화했는데, 10명 정도가 더 도와줄 수 있겠다고 하더라구요. 이렇
게 저희쪽 25명에 총학측에서 한 50명정도의 '해방조국' 멤버를 지
원해 준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 않 하셔도 될 꺼예요. 설마 70명이
넘는 사람이 문 두개 못 틀어 막겠어요?'
난 아직도 뭔가가 꺼림직 하다는 투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 들어올때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나갈때는 어
떻게 나가지.. 분명히 양쪽 다 조직폭력배들이 가로막고 있을텐데..
그걸 어떻게 뚫어?'
'........'
' 형.. 우리 해방조국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우린 깡패새끼들보다도
더 무서운 백골단 새끼들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도 단방에 때려부쉈
던 일당백의 용사들입니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탁이가 방바닥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차게 말을 했다. 정탁이는 나보다 2년 아래의 과 후배
로, 1학년때부터 '해방조국'에 참여, 지금까지 있었던 수 많은 시위
에서 백골단과 전경들로부터 우리학교 학우들을 지켜냈던 배테랑급
사수대중 한명이었다. 난 정탁이의 듬직한 모습을 바라보며, 잘하면
정말로.. 정말로 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이런 기쁨의 순간도 잠시, 곧 그녀의 삼촌.. 저승사
자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나의 우유부
단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심한 얼굴표정을 짓던 동민이가 나에게 소
리치며 말했다.
' 형.. 우리는 벌써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해낼 자신도 있구
요..이제 결정이 남은 건 오직 형 혼자 뿐입니다. 어서 결정을 내리
세요!!'
' 잠...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잠시만.. '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삼촌의 얼굴.. 두 얼굴이 머리 속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계속 오버랩 되었다. 지금은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나
에겐 그녀가 필요하다.. 그녀없는 나의 삶은 물없는 물고기요, 열쇠
없는 자물쇠와 같다. 아니.. 도저히 그녀없이 산다는 것 자체를 상
상할 수 없다. 기회는 내일뿐. 내일이 지나면 그녀를 죽는날까지 영
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한번 해 보는거야.. 내일 그녀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와.. 아무도 모르는 그 먼 곳으로.. 떠나면 되
는거야.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보인 것도 잠시. 곧 무서운 그녀의
삼촌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오버랩 되며 떠올랐다. 한국에서 알
아주는 조폭계의 부두목, 이 정도 실력이라면 우리가 어디를 도망
가더라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꺼야...왜 흔히들 그러잖아.. 사람을
찾으려면 폭력배들에게 부탁을 한다고.. 그리고 아마 그 날이 내가
죽는날이 되겠지. 음.. 삶이냐 그녀냐.. 그것이 문제로다.. 내가 결정
을 내리지 못하자, 주변에 앉아있던 녀석들은 긴장되는 얼굴로 내
얼굴만을 바라보며 숨소리를 멈췄다. 하지만 나는 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단지 땅만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 할 뿐이었다.
'................'
그렇게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방이 조용해지자, 어디선가
조그맣게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플
레이 버튼을 눌러놓은 워크맨 이어폰에서 조그맣게 소리가 새어 나
오고 있었다. 얼핏 들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난
동민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녀였다. 목소
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쉰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일까..노래를 부르기 전에 무언가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모양이다.
' 여러분들도 사랑 많이 해 보셨죠? 저 역시도 대학 들어와서부터
한 사람을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는 지금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서로를 못만나고, 서로를 그리워만
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못 만나다니.. 도대체
하늘은 왜 우리를 처음에 만나게 한 것이었을까요.. 하늘이 원망스
러워 지는 밤이예요. 하지만 저는 믿어요. 우리는 꼭 다시 만날것이
라는 것을.. 그 사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죠? 그 사람을 그리
워 하는 마음을 노래에 담아 015B의 '슬픈인연'을 부르도록 하겠습
니다. '
도청 장치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아주 절제된 단어만을 사용해서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표현했다. 조금후 박수소리와 함께, 음악
첫부분의 아름다운 기타의 선율이 흐른다..
'멀어져 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속에서..
흠뻑..젖은... 두 마음..을 우린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꺼.............흑흑.......'
그녀는 노랫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리고 흐느끼는 그녀의
목소리와함께, 땅을 짚고 있던 나의 두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그
래.. 그녀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내가 죽더라
도 그녀를 다시 찾고야 말겠다.. 난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며 , 내
앞에 앉아있던 동민이의 손을 꽉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