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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법문>부처님을 외면하면 악귀가 침노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동지절에 절에서도 팥죽을 쑤어 불. 보살님 전에 공양을 올리면서 지난 한 해의 잘못된 일들을 참회하고 새해에 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왔습니다. 팥죽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분히 민속적인 영향으로 우리의 주변에서 악귀(惡鬼)를 몰아내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 공공씨(共共氏)라는 사람에게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질이 나빠 나쁜 짓만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데 죽어서도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되어도 보통 귀신이 아니라 역질(疫疾), 즉 나쁜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궁리 끝에 동짓날 생전에 그가 가장 무서워했던 팥으로 죽을 쑤어 대문이나 집안의 판자에 뿌려 그 역질 귀신을 퇴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의 형초라는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전해오는 이야기이고, 이와 같은 관습이 토착화된 데에는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음양오행학상 붉은 색은 밝음, 즉 광명(光明) 빛을 표시하는 양(陽)이 대표적인 색깔입니다.
붉은 색깔은 음양(陰陽)상으로는 양(陽), 오행(五行)상으로는 화(火=불), 계절로는 여름, 하루로 치면 정오(正午), 방위로는 남쪽,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대비할 때는 심장(心臟), 오상(五常=인간의 감정)으로는 예(禮)에 속합니다.
한편 어둠은 음(陰)에 속하고, 음(陰)은 색깔로 치면 흑색, 즉 검은 색으로 대표하게 됩니다. 검정색은 오행(五行)상으로는 수(水),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하루가운데는 한밤중, 오장육부에 대비하면 신장(腎臟)에 해당하고, 오상으로는 지(智)에 속합니다.
이처럼 붉은색과 검은색은 오행상 서로 반대되는 관계에 있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붉은색을 태양을 상징할 뿐 아니라 낮과 밝음과 건강을 상징하는데 반하여 흑색은 이와는 반대로 밤, 어둠, 질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혀 그런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질병이 드는 것은 전부 귀신의 소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어두운 밤에만 활동을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듣다보면 귀신은 밤에만 활동을 하다가 새벽 첫 닭이 울면 서둘러 사라져 버리지 않던가요? 무당이 하는 굿도 밤에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밝은 곳에서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듯이 농업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농산물 가운데서도 붉은 색깔을 띤 팥은 밝음을 상징하는 곡식으로 신성하게 여기게 되었고, 음양오행설과 결부되어 이 팥 가운데는 어둠 속에서만 활동을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효험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치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붉은 색깔의 경면주사(鏡面朱砂)로 부적을 쓰는 원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경면주사는 붉은 색깔을 가진 광물질로 부적을 쓰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병에 사용하는 한약재이기도 하지요. 앞서 붉은 색이 오장육부(五臟六腑)상으로 심장(心臟)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동양의학은 이처럼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은 음양오행설의 영향인지, 아니면 태양을 숭배하던 종교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붉은 색깔을 신성하게 여긴 것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무 가운데는 붉은 색깔을 띤 주목(朱木)을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든가, 또 대추나무로 부적을 만드는 행위 등도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금줄에 붉은 고추를 매달고, 시집가는 새색시의 볼에 붉은 색으로 연지. 곤지를 찍던 풍습도 붉은 색깔을 광명의 상징과 악귀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습, 이런 전통은 우리 절 집안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병시식을 할 때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우면서 붉은 팥을 뿌린다든지 다라니를 붉은색으로 쓴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데 붉은 색깔이 영험이 있다고 믿어 온 전통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이 없겠습니다만 오늘 법문의 주제가 전통 민속에 대한 유래를 밝히자는 것이 아니라, 동지절을 맞아 팥죽 공양을 올림과 함께 악귀를 추방하는 마음의 법회가 되고자 하는데 의미를 둠으로써 동지법회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옛 관습에만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동지 팥죽을 통하여 악귀를 추방하려고 하는 우리의 순수한 소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팥죽 공양만으로 모든 악귀를 추방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즘 귀신은 옛날과는 달라서 밤에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활동하고 밝은 색깔도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현대의 귀신에게 알맞은 처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에 적절한 처방전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첫째, 동지 법회를 ‘무명에서 개어나는 행사’로 삼자는 것입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을 시작으로 낮이 차츰 길어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신의 부활절로 기념하던 역사도 있습니다. 본래 크리스마스도 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이 되긴 했지만 옛날 이집트에서는 동짓날을 태양의 부활절로 보고 이를 경축했는데 여기서 기원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탄생일도 동짓날로 기념했었고 후세(AD3세기 경)에 12월 25일로 정착된 것이라고 합니다.
태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태양은 밝음, 광명 그 자체입니다. 또한 태양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원천이요, 온갖 생명의 에너지원으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는 날로서, 부활하는 날로 믿었던 데서 동지절의 기원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이 날을 ‘어둠을 몰아내는 날’로 삼자는 것입니다. 물론 동짓날에 몰아내자는 어둠은 ‘낮과 밤의 어둠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어둠,’ 즉 무명심(無明心)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를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표현하는데 십이연기의 첫째가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이란 우리들 존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무지(無知)를 일컫는 말입니다. 생. 노. 병. 사를 가져오는 근본원인, 과거세로부터 무한히 계속되고 있는 무지로서, 범어로는 아비다아, 즉, 밝음의 반대말이 이 ‘아비다아’인 것입니다.
이 무명(無明)으로 인해여 행(行)이 있고, 행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생겨나고,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겨나는 것이며, 육입으로 인하여 촉(觸)이 생겨나며, 촉은 수(受)를, 수는 애(愛)를, 애는 유(有)를, 유는 생(生)과 노사(老死)로 이어진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십이연기입니다.
무명으로 인해서 온갖 잘못된 행동이 이어지고 마침내 생노병사와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하는 인생고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현실의 고통은 바로 이 무명 때문인데 이 무명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윤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명이란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이란 진리에 대한 어둠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곧 사라져 버리는 어둠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광명이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부처님께서 “널리 일체중생을 관찰해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서 무명이라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밝은 지혜가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 있는 상태가 무명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무명만 제거하면 반야지혜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본래부터 밝게 빛나고 있지만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어두운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없는 세월동안 이 무명을 자기 마음으로 알고 길고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악몽을 꾸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명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무명에서 깨어나야만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명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보배가 빛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고달픈 여정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은 곧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또 일생동안 가르침을 펴신 까닭은 바로 이 무명의 긴 잠에서 중생들을 깨워주시고 중생 각자의 심성에 간직된 여래장을 개발키 위해서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여래장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비유컨대 가난한 집에 귀한 보배가 있는 것 같으니라. 내가 보배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주인은 보배 있음을 알지 못하고 거기에다가 일러 주는 사람도 없고 보면, 그 사람은 제가 지닌 보장(寶藏)을 열어 활용해 내지 못한다. 온갖 중생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큰 가르침의 보장이 그 몸 안에 있건만, 그것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기에 알지 못해서 오욕(五慾)에 빠져 든 나머지 생사에 윤전(輪轉)하여 무한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나타나서 중생의 마음속에 여래보장이 있음을 관찰하시고, 여러 보살을 위해서 이 법을 설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이 소생하는 이 동지절에 갖는 동지법회를 ‘무명에서 깨어나는 법회’로 삼아야 할 것임을 거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동짓날을 ‘불심을 새롭게 하는 날’로 삼읍시다.
우리 불자들은 동짓날 너나없이 절에 모여서 부처님 전에 팥죽 공양을 올립니다. 오늘 우리도 팥죽 공양을 올렸지 않습니까?
팥죽 공양을 올리는 까닭은 불보살님과 신장님께 악귀로부터의 보호를 비는 기도법입니다. 이는 조금도 미신이 아닌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악귀들로부터 항상 위협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위협을 이겨내고 밝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일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악귀는 어떻게 우리에게 접근을 하는 것일까요? 또 어떤 사람이 악귀의 침노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대교왕경>에서는 그 원인이 사람들이 부처님을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약 사람이 불보(佛寶)를 외면하면 악귀(惡鬼)가 마음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음욕(淫慾). 탐욕(貪慾). 노여움. 기쁨 따위가 많아진다. 또 마음이 항상 어두워서 남에 의해 혹란(惑亂)되며, 왕위나 좋은 지위를 잃는다. 그리고 죽으면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져 사람이나 천인(天人)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길이 고해(苦海)에 잠겨야 한다.”
귀신에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 있는데,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저급한 귀신을 악귀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악귀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부처님을 외면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귀가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이 들떠서 남에게 속기 쉽고 모든 하는 일에 장애를 받으며 또한 좋은 지위를 다 잃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당집에나 드나드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악귀들의 침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도 부처님을 잘못 믿으면 악귀가 침노합니다. 그런데 이 악귀가 사람의 몸 가운데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탐욕과 성냄, 기쁨 등 감정의 굴곡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악귀는 우리 마음속에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쾌락을 찾는 마음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어느 때 보다도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이런 악귀들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귀는 제 스스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빌려서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지절을 맞아 악귀로부터 제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을 잘 믿으면 악귀 대신에 선신이 가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魔)가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마(魔)’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악귀를 일컫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성도(成道)하실 때 마왕 파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단호히 이를 물리치신 것은 마음에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틈이 없다는 것은 곧 신심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단속을 잘못하면 바람도 들어오고 도둑도 들어오듯 마음 단속을 잘못하면 악귀가 들어옵니다. 동지 팥죽을 쑤어서 부처님전에 올리고 또 사당에도 올리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단속을 잘 하겠다는 결심의 표시인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 앞에서, 또는 조상님들 앞에서 마음 단속을 잘하여 그 어떤 악귀의 침범도 받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결심인 것입니다.
곧 부처님께 팥죽을 공양하는 이 신심으로 마음을 잘 챙겨서 완전히 채워놓겠다는 결심의 상징물이 바로 팥죽 공양인 것입니다.
‘불보를 외면하면 악귀의 침범을 받는다.’ 고 했는데, ‘불보’란 곧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가장 소중한 보배이므로 불보라 한 것입니다. 불보를 외면하는 행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거나, 믿어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대승보살이 닦아 나가야할 여섯 가지 바라밀이 있는데, 그 첫째가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베푼다는 뜻입니다.
베푸는 삶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실천적 보살행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품이 없는 자비가 있을 수 없으며 베품이 없는 보살은 성립이 불가한 것입니다. 그렇거늘 어찌 성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 바라밀이란 ‘건너간다.’ 라는 뜻인데, 즉 극락이던 천당이던 가장 행복한 삶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보시바라밀이 되기 때문에 육바라밀 가운데 처음으로 두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차곡차곡 금고 속에 보석을 쌓아 두기만 하면 강도라는 악귀가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부처님을 외면하지 않으려면 보시바라밀을 잘 지켜야 합니다. 다른 종교는 십일조라고 해서 꼬박꼬박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헌금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웃도 돕고 선교도 해서 나날이 성장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극락도 가고 천당도 가고 행복도 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시에 인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보시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즐거운 마음으로 보시하고 베푸는 즐거움과 함께 받는 마음의 즐거움도 함께 발생하는 것이며, 모든 생명이 공생하고 공존하는 상생의 해탈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보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의 악귀를 몰아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보시함으로써 수천수만 배의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가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수천수만 배의 열매를 맺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연말연시가 다가 왔습니다.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악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불우한 이웃에게 자비의 손길을 뻗어야 하고, 더 잘살기 위해서도, 마침내 성불을 하기 위해서도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불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대자비심 그것입니다. 자비심이란 내 것만 챙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들어주는 그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동지절은 ‘불심을 새롭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지절은 일양시생지일(一陽始生之日)이라, 즉 태양이 소생하는 날입니다. 태양은 광명으로 상징하는데, 이 태양보다도 더 밝은 지혜광명이 우리 자신의 마음 가운데 간직되어 있습니다. 단지 무명이라는 근본무지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태양이 본래로 밝게 빛나고 있지만 구름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또 우리 불자들은 이 동지절을 ‘무명에서 깨어나는 날’로 삼아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름없는 지혜광명을 찾아내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팥죽으로 악귀를 추방하는 전통을 살려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악귀가 침노하지 못하도록 부처님을 바로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자 하는 '불심을 새롭게 하는 날‘로 삼읍시다.
그리하여 지혜의 눈을 뜨고, 보시바라밀로 탐욕의 아귀를 몰아내고, 인욕바라밀로 성냄의 악귀를 몰아내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불국정토를 우리 손으로 만드러 갑시다. 다 같이 성불합시다.
동지팥죽
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먹는다.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이는데, 단자는 새알만한 크기로 하기 때문에 새알심이라 부른다.
팥죽을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려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내고,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의 뜻이고 집안 곳곳에 놓는 것은 축귀의 뜻이어서 이로써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낸다고 믿었다.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붉은 팥은 옛날부터 벽사(辟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모든 잡귀를 쫓는 데 사용되었다. 『동국세시기』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바보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어 붉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서 그를 물리친다.”라고 적혀 있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 행위의 일종이다. 그러나 동짓날이라도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안에 들면 애동지라 하여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해서 팥죽을 쑤지 않는다. 또 그 집안에 괴질로 죽은 사람이 있어도 팥죽을 쑤어먹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도에서는 사당에 팥죽으로 차례를 지낸 다음 방, 마루, 장광 등에 한 그릇씩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다. 경상도에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셔 집안 대문을 비롯하여 담벼락이나 마당에도 뿌리며 마을 입구에 큰 고목에도 뿌려 잡귀들의 동네 침입을 막는다. 강원도에서는 팥죽의 새알심으로 찹쌀이나 수수쌀로 만든 ‘옹심’을 넣어 나이 수대로 먹는다. 일꾼들은 이날 팥죽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져야 한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서 팥죽이 쉬면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라고 여긴다. 충남 연기에서는 동짓날 동지불공(冬至佛供)을 드리러 절에 다녀오며, 집에서 팥죽을 쑤어먹는다고 한다. 또 애기동지에는 팥시루떡을 해먹고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어먹는다. 그리고 중동지는 떡이나 팥죽 중 하나를 해서 먹는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喪家)에 보내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다. 팥죽은 동지에만 쑤어먹는 것이 아니고 이웃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 쑤어 부조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요즈음도 이러한 풍습이 이어져 고사를 지낼 때에는 팥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고사의 목적은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번성하기를 기원하고, 공사를 하는 사람은 공사가 아무런 사고 없이 완공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팥이 들어가는 음식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었지만, 그 사실 여부를 떠나 팥이 지닌 여러 가지 효능으로 보아 건강식품임에는 틀림없다. 팥은 피부가 붉게 붓고 열이 나고 쑤시고 아픈 단독에 특효가 있으며, 젖을 잘 나오게 하고 설사, 해열, 유종, 각기, 종기, 임질, 산전산후통, 수종, 진통에도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