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설선 대법회/21세기의 대안 왜 선이어야만 하는가,/혜국스님◆
먼저 21세기를 한번 짚어봅시다.
우리나라 단기로 말하면 4천3백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년도 까지도
서양문명에 너무 많이 물들어 있어서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라 더 많이 세기가 흘렀겠지만
우리는 21세기라고 아무 부담 없이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21세기를 말할 때 정말 꿈의 21세기가 온다고,
온 언론과 매체에서 21세기는
꿈과 희망이 우리에게 그저 주어질 것처럼 말합니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 정작 이라크 전쟁에서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 여인들,
뭇 생명들은 그래도 언론에 비춰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걱정이라도 하지만
아프리카, 콩고, 네팔, 루마니아 등지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수십만, 수백만 명이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데,
왜 꿈과 희망을 갖고 맞이한 21세기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이 나라가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로 나도 몰래 부모 자식간,
또는 부부간에, 또는 모든 가정 불안이 안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현재 학자들이 진단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3대, 4대, 5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보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리 못사는 사람도
수백 배 내지 수천 배를 더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만 그렇게 많이 소유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을 얘기하더라도
과학이니, 수학이니 영어니 아마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도 더 많아지고 지식도 엄청난 것을 알고 있는데
우리가 한번 자신을 가만히 돌아봅시다.
21세기는 정말 많으면 행복한가.
내가 본래 성불인 부처로서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와 같이 일어나고
저녁에도 부처와 같이 잠을 자고
한 발짝, 한 찰나까지 당당한 부처로서
행복한 평화로움을 느껴보는가 말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오히려 중노동 속에서도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저녁을 먹으면서 행복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거의가 정말 나는 행복하다,
정말 살만하다 행복감을 느끼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한번 따져보면요,
그 많은 재산과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부를 많으면 많은 만큼 많이 배운 만큼 행복해야 하는데
반대로 점점 불안해가고
내 아들이 일류 대학을 갈 것인가, 못 갈 것인가,
일류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갈 것인가, 못 갈 것인가,
돈 때문에 때로는 직업 때문에 날마다 날마다 고민을 합니다.
지금 40살만 되면 스님들만 구조조정이 없고,
정년퇴직이 없지 이것은 스트레스 때문에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돈도 몇 배 더 많이 갖고 있고
지식도 더 많이 갖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가.
제가 볼 때는 우리나라 인사법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10살 때 옛날 동네 어른들에게 뭐라고 인사하라고 배웠냐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하도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살 때는
동네 어르신들이 혹시 못 드신 것은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주는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인사법을 들어보면 안녕하셨습니까?
6.25전쟁으로 자고 나면 사람이 죽고, 죽고 하면서
정말 밤새 안녕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21세기에 와서 인사법을 들어보면,
부자 되십시오.
이번에도 어떤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
부자가 될수록 점점 불행해지는 이치를
자기 눈으로 분명히 보면서도 여러분들이 한번
여러분들 주위에서 돈을 많이 번 재벌에 가까운 분들이
형제간에 화목하고 가족들 간에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지
정말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가난한 사람들보다 형제간의 화목함이 더 적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자 되세요.
하는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세계관이 잘못되어서
나와 남이 경쟁하는 회사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지십시오,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이 오는 것처럼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세계관이 잘못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세계관이 잘못됐고 이 잘못된 세계관을
불교의 대안, 21세기의 대안,
선에서는 어떻게 보기 때문에 대안이 되는가?
그 원인분석을 하고 대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습니다.
나는 주관이고 보이는 대상은 객관이다,
나와 남을 항상 둘로 나누어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남을 둘로 나누어서 본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가족 중에서 아들이 아프면
온 집안이 울어야하기 때문에 바로 가족의 건강이 내 건강이고
내 건강이 가족의 건강이다 해서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나와 남으로 나누기 이전에는 결코
나의 불행이 남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나와 남을 완전히 적이냐 동지냐
그 원인을 한번 분석해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철학에서는,
특히 우리 부처님 법에서는
중도, 마하반야반야바라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내가 소중하면 남이 소중하고
남이 소중하면 내가 소중하고
이웃이 잘되어야 공장이 돌아가고
농장에서는 곡식이 지어져서 이웃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이러한 사상이었는데
서양 문명이 들어오면서,
서양에서는 모든 물질문명이,
물질문명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 하는 것이 서양의 철학입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성주의’라는 것은 뭡니까?
사유하는 이성과 그 사유하는 이성이 이렇다고 단정하는 대상,
즉 물질과 두 개로 나누는 것,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이원론을 원칙으로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둘로 나누는 것 가지고는
이러한 21세기 위기가 오지 않았을 텐데,
내가 사유하는 정신은 우월하고 저 대상인 물질은
내가 마음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하인주의, 지배주의
개발의식이 이원론에서는 싹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발논리와 지배의식,
그러다보니 환경까지도 개발하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어야 한다는 주인의식과
지배의식이 이원론에서 파생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남이랑 어째든 나만 잘살면 된다든가
가장 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가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환경 부분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해인사 골짜기에서
물도 떠먹을 수 있었는데 저 길고 긴 몇 백리 낙동강,
섬진강, 한강이 상수원부터 먹을 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기만 하더라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좋은 공기를 찾아서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만약 지금 우리가 세계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새롭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공기를 마시고 물을 먹을 수 있는
근본적인 우주 자연을 물려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환경과 나는 둘이 아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다,
다시 말해서 공기 하나를 마신다 하더라도
내가 내 코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저 많고 많은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가 밤새밤새 사람들이 마시는 공기를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태양열에너지를 받아들이고
그 공기를 인간들이 마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같이 움직여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다 부처자리로 돌아가고 있구나,
이러한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계관을
중도법이라 하고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지금 21세기에서는 여러분들이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계관을 반드시 설정을 해야만
우리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결국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환경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의 그림자지,
내 마음이 오염되지 않았다면 환경은 오염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관과 객관을 나눈 이원론은 어떻고
불교에서 말하는 이원론이니,
일원론이니 이름을 떠난 중도는 어떻고,
철학자들이 이원론으로는 안 된다는
이 세 가지를 갖고 단계별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이원론은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으니까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 봅시다.
아이슈타인 박사의 말을 잘 들어보고,
서구에서는 그 대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아이슈타인 박사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십니다.
에너지와 질량은 같다 이겁니다.
아이슈타인 박사만큼 20세기에 공헌을 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세상 부럽지 않은 박사도 없지만
아이슈타인 박사가 죽어갈 때 많은 제자들이 찾아가서
“박사님,
박사님은 다음 생을 믿는 불자인데 다음 생에 태어나서도
유명한 과학자가 될 것입니까?”하고 물어보니
아이슈타인 박사의 대답이
차라리 내가 막노동꾼이 될지언정
과학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나는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핵반응, 핵융합하는 방법을 갖고
원자폭탄을 만드는 결정적인 학문을 제공했다.
원자폭탄을 만들자고 미국 대통령에게 제안을 한 사람이다.
인간들이 원자폭탄 하나만 가지면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고 돈을 받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내 눈으로 찰나에 십수만 명이 죽는 것을 봤다.
그것을 보면서 내 마음에 절절히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이 얼마나 간절하게 다가오는지.
인간이 마음은 넓게 쓰고 마음 농사를 지어서
마음수행이 앞서가고 과학이 뒤를 따라와야만
과학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과학이 인간보다 앞서가서
핵무기가 되고 미사일이 되어서 한번만 잘못 착각해서
단추 하나만 잘못 눌러도 이 지구상의 인류는 전멸하게 됩니다.
정말 인간은 마음 수행이 앞서가고 과학이 따라가야 되지
마음수행보다 과학이 앞서간다면
그것은 인류의 종말은 눈에 보듯이 훤하다.
그래서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를 깨달아서
내가 내 마음을 찾아서 행복을 느끼고 만고불변의 진리는
내가 내 자신을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가 열반의 자리요,
행복의 극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 생애에는
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수행자가 되려고 하네 이 사람아.”
여러분들은 이미 그 자리에 들어서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법문을 들을 때,
‘정말로 우리 가정에서 지금 돈, 지식이 진정한 행복인지
확인도 안 해보면서 질주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합니다.
이번 범어사에서 설선대법회가 끝나고 나면
가족회의를 해서, 우리가 방향전환을 해 보자,
우리가 정말 행복한가?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앉아서
자신의 잘못된 점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점을 지우고 마음농사를 지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세계관을 새롭게 설정하고 방향을 정한다면
각자 사람 사람, 자신 자신이 연기법을 바로 볼 때
중도법을 향할 때 인류는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가져오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남이 간다고 무조건 그 방향으로만 뛰어간다면
우리 자손들에게 21세기를 산 사람들은
천하의 역적이라고 지탄받고 결국 가장 지구상에서 오명을 쓸 때
태어난 인류라고 기록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불교 집안에서 세계 인구 가운데
내가 나를 깨달아야 된다는 참선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만큼 앞서가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내가 누구인가 내가 나를 깨닫겠다고 이런 자리에 참석해서
참선법을 배우는 사람은 대단한 복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가 위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을 둘로 나누어서 남을 이겨야만 되고
남을 눌러야만 되는 이러한 서양철학인 이성주의를
확인도 안하고 따라가다가 위기가 결정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해결이 가능한지 들어 가보자는 겁니다.
여러분들 영화 <서편제> 잘 아시죠?
저도 이 영화를 보고 좀 울었습니다.
제가 운 것은 꼭 탤런트가 나와서 구구절절
가슴을 후벼 파는 판소리를 듣고,
판소리 명창이 되기 위해서 눈을 멀게 만들고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고 나는 과연 이렇게 살아왔던가를
돌아보게 되면서 정말 눈물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화면에 나오는 필름을 비춘 그림자를 보고 울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자를 삼라만상이라고 보고,
객관이라고 보고 필름을 주관이라고 보는데,
그 필름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울고 웃었는데
그 그림자는 없는 거였다는 말입니다.
필름에 녹음된 것을 비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필름을 정신이라고 하고 그림자를 대상이라고 한다,
필름은 주관이고 화면은 객관이라고 하는데
화두참선법에서는 필름도 마찬가지다,
주관이라고 이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그림자다.
어제 저녁 꿈에서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던 것이
아침에 눈을 딱 뜨고 보면 결국은 주관도 객관도 꿈이었다.
그래서 이원론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일원론이니, 이원론이니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름이 갖는 구속력을 안가질 수 없고
그 구속력이 바로 나를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 와서 우주대자연의 이치를
홀연히 깨달으시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부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전부다 본래성불이라 부처 아닌 사람이 없건만
다만 눈에 가리는 상이다, 객관이다, 주관이다,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스스로 판단한
번뇌망상에 의한 잘못된 착각 때문에 부처인 줄 모르지
다시 말해서 저 태양광명이 이 도량을 비추고 있지만
문을 닫고 커텐을 쳐 버리면 빛이 들어올 수 없듯이
번뇌망상이라는 커텐을 탁 쳐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진 커텐을 쳐서
나와 남이라는 벽을 쳐버려서 그렇지
그 벽만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꿈만 깨면,
다시 말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라.
나는 부처님이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라.
나와 똑같은 부처다.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이고 최초의 민주선언이라.
정말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틀림없이 있는 것인가.
그 어른이 한사람 옴으로 인해서 가섭을 거쳐서
아난을 거쳐서 보리달마에 들어와서 소림굴에서 9년간 바로
그 일대사 인연을 고요히 말없는 묵언으로
중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 와서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억, 몇 근이냐. 저 극락암에 계신 경봉 스님은
손바닥을 내놔라고 하고 탁 치면서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져서 범어사에서
설선대법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을 여러분께서는
대단한 행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법문이 너무 흔해졌습니다.
녹음기라는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그냥 녹음해다가 주거니 받거니 하거든요.
생방송으로 법문을 들어서 느낌을 콱 받아서
한번 들으면 몇 달은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들을 때만 해도 석달, 넉달은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 달로 줄더니 일주일로 줄어들어버렸습니다.
정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라 ‘
네가 바로 부처니라’는 이야기를 바로 듣고 알면
정말 춤을 덩실덩실 출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렇게 훌륭한 언어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언어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부러트려 가면서
다음 생에 다음 생에 몇 백 년 후에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스님의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여러분들도 이러한 법회를 귀로 듣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이날의 법문이 얼마만큼 내 마음양식이 되고 있고
내 속에서 저것이 어떻게 거름이 되고 있는가를
확실히 짚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우리가 다 부처인데 본래 성불이 됐다고 하는데
그 본래 면목이라고, 이름하여 참 나라고 하는 것은
보려고만 한 생각을 내어버리면 벌써 찾으려고 하면
주관과 객관이 벌써 놓아버렸어.
놓아버리면 볼 수가 없어.
나눈 것은 누가 나눈 것이여.
내가 나눈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없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어도단이요
신행초멸이라는 말은 말길이 끊어져야 되고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제가 참선법을 말할 때마다 하는 말입니다.
눈을 가지고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눈을 가지고는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은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에
그냥 봐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눈을 가지고 눈을 보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보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방법론을 찾으면 이미 그르치는 것이라 이말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것에 근사치를 이루는가,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진,
눈으로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다고 하는
문문성까지 나온 말 아닌 말을 들어보면
아하, 이런 세계가 있구나. 그러면 한번 들어봅시다.
살인검 활인검 이 도리는
존재의 본래 모습이자 살아있는 삶의 실상이다.
죽음에 대해 논하더라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삶에 대해서 논하더라도 -----
향상일로는 일천성인도 논할 수 없거니
억지로 깨달으려고 하는 자는
물속에 있는 달을 억지로 건지려는 원숭이와 같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를 전해준 소식이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못알아 들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말 들으면 못알아 들어 버려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지기 전 동양의 지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릎에 베고 가르쳐주던
중용의 도리 부처님 말씀의 중도의 도리를
어릴 때부터 영어, 수학 배우듯 듣고 행동으로 옮겨
체험을 했다면 바로 알아들을 소리여.
우리는 여러분들이 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는 일구를 가지고
아 우리는 지고 너무 멀리 떨어진 이방인이 돼 버렸구나.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위기구나.
내가 만일 이 범어사에서 와 가지고,
저 앞에 있는 할머니한테 헬로우! 그랜드 마더!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어, 못 알들어?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이나 스님들은 참 구닥다리 영어다 할거야.
저런 영어가지고 당당하게 잘도 써먹네 할 것이여.
그러나 나는 영어 못하는 것은 하나도 안 부끄러워.
한국 사람들 영어 못하는 거 부끄러워하는데
한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야지
한글이 당당하게 있는데 왜 영어 못하는 게 부끄럽나 이 말이여.
당당하게 한국말로 지껄이고 있다면 왜 안 통해?
당당하지 못하니까 안통하지.
그런데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면 왜 못 알아들어?
안 배웠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히어링이 안 돼.
그런데 내가 가장 답답한 것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한국에 와서 블랙홀, 화이트홀에 대해서
서울대학교 하고 신라호텔에서 두 번 강의해서
내가 두 번 다 강의 들어갔는데
들은 사람보고 나는 십분의 일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니
그 사람들은 십분의 일이 뭡니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못 알아듣는 것은
내가 물리학을 전공 안했으니까 당연하다 하고
저 우주의 대진리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법은 못 알아들으면
구름 잡는 소리라 하고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여.
그런 소리 함부로 쓰지 말자 이 말입니다.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누가 이 몸이며
이 몸이 태어난 후 누가 참 나라나
태어나 잠깐 동안 나라고 이름쓰니
눈감고 죽고 나서 나라는 자 어디 갔나?
(대중들 모두) 나무아미타불!
옛날 조사스님들이 말길이 끊어진 자리와
마음길이 끊어진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조사어록을 그렇게 인용을 하는 거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게 된다.
즉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지면 그르쳤다 이 말이요.
내가 저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철 참선을 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쫒아 가보니까 7시간 전에 돌아가셨다는데
아버님!
열세 살에 출가한 아들이 찾아왔으니 한 말씀 해보십시오.하니까
아버지가 말합니까? 안합니까?
나는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말한다기에
입이 아직 안 썩었으니 말할 줄 알았더니
말을 안한다 이 말이요.
귀로 듣는다 듣는다 해서 귀가 있으니
들을 줄 알았는데 못 알아들어.
눈이 있어 본다기에 눈을 뜰 줄 알았는데 눈을 못 떠.
영혼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눈을 뜨라하면 눈을 뜨고
귀로 들으라 하면 듣고
입으로 말하라면 말하는데
영혼이 나가버리니 눈도 입도 귀도 내 마음대로 안돼.
그러면 영혼이 나야 이 몸뚱이가 나여?
영혼도 내가 아니요,
몸뚱이도 내가 아니요.
영혼이란 업식을 영혼이라 그래.
그렇다면 말여 여러분들이 이 몸뚱이를
내 몸 내 코 내 귀 하지만
내 몸뚱이도 영혼이 나가버리면
입도 못 열고 귀로 못 듣고 눈을 뜨지도 못하는데
내 몸뚱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길 바라겠는가?
가족이 내 마음대로 되길 바라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면
니가 니를 깨달아봐라 했어요.
이 세상은 온통 일체 유심조라.
바다가 돼 버리면 섬진강, 낙동강도
짠 맛 하나로 통하고 푸르른 바다로 통하니
니 마음, 마음하는 마음이 흘러가는 조그만 줄기
물이 되지 말고 바다가 한번 돼 봐라.
바다가 되는 실례를 동산 스님을 통해서 한번 듣고
사족을 붙여서 그기에 들어가는 방법론을 들어가 보자 이 말이여.
여러분들이 동산 양개스님에 대해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스님의 은사 스님이 운암 당산 스님인데
그 스님이 돌아가시려고 하니까 동산스님이 묻기를
“스승님!”
“ 왜?”
“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어떤 사람이 묻기를
화상의 초상을 누가 그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하니
스승이 대답하기를
“그저 그런 늙은이였다고 해라”
동산 스님은 여기서 꽉 막혔어.
우리는 영어를 배운 만큼 밖에 안 들리고
중국어를 배운 만큼 밖에 안 들리고
그림을 보든 음악을 듣든
자기 아는 만큼 밖에 안보이고 안 들리는데.
동산 스님이 이 말을 못 알아듣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니
스승이 떡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밤송이와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느니라.
천생만겁토록 쉬어야 하느니라.
천생만겁토록 쉬어야 하느니라.
그대가 한 생각만 일으켜도 풀이 한길이나 깊을 것인데
하물며 말로 표현하겠는가?
천생만생을 쉬라는 이 말씀,
밤송이와 같다고 하는 이 말씀,
한 생각만 일으켜도 풀이 한길이 깊을 터인데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이 말씀
아무 말도 못하고 동산 스님이 망설이고 있자
스승이 떡 하니 한 말씀 하시려고 하자,
동산 스님이 제자는 이 정도 내야 됩니다.
내가 성철 스님 구산 방장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신 며칠 뒤에 방문을 잠가놓고 통곡을 하자,
내 제자가
스님, 도 닦았다는 분이 어떻게 자기의 감정을 못 다스립니까?
어떻게 눈물을 억제 못합니까?
야 이 새끼야! 사람 죽은 게 억울해서 우는 줄 알어!
그 어른이 가지고 있는 도를 내가 다 받아들이기 전에 가 버렸으니
그 도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단 말이여.
가지고 가 버린게 얼마나 억울해?
니가 몰라서 눈물이 안 나오지.
그것은 분통이 터질 일이여.
이런 말 듣고 웃는 사람은 아주 바보같은 사람이 웃는 것이여.
우리 재산이 바다에 다 빠져버리고
불이 홀랑 타버렸는데 웃음이 나와.
동산 스님은 스승이 한마디 해 주려고 하니
“스승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는 사람 몸 잃지 않길 원할 뿐이니
오직 이 일을 위해서 제가 애써가지고
제가 공부해서 제가 알아야 합니다.
제가 깨달아서 제가 이 일을 위해서 애쓰고자 합니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이 자세가 덜 돼 있습니다.
아직도 이 자세가 덜 돼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화두 참선법을 한번만 들어도
아 이건 깨달을 수 있는 거구나 해도 내가 깨달아야지,
아무리 귀한 7,8대 독자여서
어머니가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아들이라도
아들을 대신 밥 먹어줄 수 없습니다.
먹어줘 봐야 아들은 배부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인생의 근본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마음대로 하고 전지전능하고
부처님의 마음대로 한다면은 이 많은 전쟁들,
지금도 이 지구상에서 열군데 이상에서
전쟁이 터지고 있는데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같은 하느님을 믿는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켜도
가만 놔둔다면 어째 그것이 전지전능입니까?
인류의 모든 문제는 내가 내 문제를 깨닫기 전에는
저 6, 7대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살았다 해도
결국 그 분들의 이름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결국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이 자세만 분명하게 되고,
언제 다음 생 다음 생 몇 백 생 후에라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인간 몸 받아서
그것도 부처님 법 따르는 불제자 되어 참선법 믿는 이때,
요 때에 안하고서는 다시는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서
내일로도 넘기지 말고 바로 오늘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스승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사람 몸 잃지 않기 원할 뿐이니
이렇게 해서 얼마나 얼마나 애를 썼으면
이때는 대혜 스님 간화선 나오기 이전입니다.
가만 있자 나오기 이전인가?
설우 스님 맞소?
맞다고 하니 나오기 이전인가보네.
마조 스님 때도 그렇고
조주 스님 때도 간화선 나오기 이전이다 이 말이여.
다만 의심하라는 말을 안 해줘도
동산 스님은 본인이 어째서 어째서...
의심하라는 말이 필요 없으니 의심이 필요 없었단 말입니다.
공부 잘하고 너무 지나쳐서 머리 싸매고 있는 아이보고
공부하라 공부하라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지지리 말 안 듣고 두드리고 앉아 있는 놈 보고 공부하라 그러지.
대혜 스님 이전에는 의심하라는 말이 필요 없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스승을 믿었단 이 말이여.
그래가지고 스승은 열반에 들어버리고
사형을 모시고 담주 땅을 건너는데.
개울물을 지나가는데 사형님은 먼저 지나갔는데
동산 스님이 지나가다가 개울물에
자기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거든.
먼저 지나간 사형 스님이 왜 그러는가 하거든.
사형님 이제야 스승님의 정중하신 힘을 얻었습니다 하니까
사형님이 한 소식 일러보게.
지금부터 이르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말이 아니야.
이런 어록들을 말이라고 그러고 말길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
왜 이리 조사어록이 이렇게 많냐고 하는 사람은
이걸 말로 보는 사람이야.
이거는 말이 아닙니다.
이거야 말로 모양없는 도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지기 이전의 도니까 한번 들어보란 말씀이요.
결코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 말라.
멀고 멀어서 나와는 상관없네.
아 이제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나네.
그는 지금 진짜 나이건만 나는 이제 그가 아니네.
진실로 이렇게 깨달아야 여여 하게 되었다 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그때는 게송으로 많이 읊었다 그럽니다.
텔레비전 보다가 좋은 노래 나오면 예를 들어
저 푸른 초원 위에 하면 따라서 저 푸른 초원위에 하듯이
하도 기분이 좋아서 게송으로 읊었다고 그래요.
그러면 스승이 그 당시에 만일에 이래 이래 한다고
답을 말해 버렸으면 동산 양개 스님이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답을 말해줘 버리면 알아버려서
상식화 된 것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아는데 뭘 깨달아?
모르는 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꽉 찰 때 모르는 게 터지지.
안다고 하는 것은 천하의 마구니요,
모른다고 하는 화두는 천하의 우리 스승이더라.
딱딱 들어맞는 얘기거든.
몰라야 터지지 안다면 아는 거야 왜 터져?
가슴이 나온 것은 여자다 이렇게 아는데 왜 터져?
봉사가 눈을 뜨면 아 가슴이 좀 큰 사람은
여자구나 하고 몰라야 터진다 이 말이여.
요즘은 텔레비전에서도 답을 말해줘 버리고
컴퓨터도 답을 말해주니
스승이 가지고 있는 답이 빛을 잃어버려요.
학교에 가서도 스승의 소중함을 몰라.
어디서나 답이 나오니까.
수학 문제 한문제도 일주일동안 못 풀어서 쩔쩔매다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풀어주면 선생님이 대단해 보일 텐데
텔레비전에서도 컴퓨터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일평생 나와 가지고 평생 풀어도
못 풀 수 있는 화두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행운인 줄 알라 이 말이여.
그래서 뒷날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묻기를
“스님, 운암 스님께서
그저 그런 늙은이였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동산 스님이
“이 사람아, 나도 자칫 하마터면 잘 못 들을 뻔했네.”
이러한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도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 불교에 얼마나 큰 재산이고 얼마나 큰 보배고
앞으로 써 먹어도 써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뭇 중생을 부처로 만들고 뭇 중생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지식이라는 거여.
이건 내 말이 아니고
토마스 머튼이라는 미국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신부님이 한 분 계셔.
그분은 기독교, 카톨릭, 이슬람교, 불교
모든 종교가 누군가 구원해 줄 사람이 있고
우리가 그 밑에서 노예 노릇 하는 것은
상대가 없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기 때문에
이미 그 종교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교에 가장 부러운 것은
내가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그 화두참선법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천주교 모든 종교에서 내가 나를 깨달아서,
내가 내 마음을 깨닫기 전에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21세기에 가서는 종교가 내리막길로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불교는 엄청난 부자 종교요,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종교다.
그런 종교가 지구상에 나왔다는 것은
우리에겐 엄청난 행운이요.
그렇다면 천추의 보배 창고니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냐?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나무 아미타불
그러면 세계관이 잘못돼 가지고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진 것이 21세기 위기를 가져 왔구나.
그러면 그것을 물려주고 갈 것인가? 아니다.
내 당대에라도 내가 나를 깨달아서
손자들 보는 앞에서 허리를 쭉 펴고
내가 부산 홍제사 선방에 들어가 보면 보살들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서 내가 들어가면서
허리를 쭈욱 펴시고 하면 허리는 안 펴고
이렇게 말하면 고개만 쭈욱 들어.
내가 허리를 펴라고 했는데 허리는 가만 놔두고
고개만 요렇게 들어. (대중 웃음)
허리를 쭈욱 펴시고 하는 것은
우주가 내가 하나가 되고 이 말인데.
숨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턱 하니 앉아서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서 남의 행복이 내 행복이고
내 행복이 남의 행복이라.
이 모르는 자리가 우주와 내가 하나된 자리니
중생과 부처의 벽을 허문 자리이니 어째서---
이 뭣고?
도대체 왜,
아버님 몸속에서 영혼이 나가버리고 나니 꼼짝도 못하니
몸뚱이는 자동차와 똑 같은 거라.
운전수가 나가 버리니 자동차는 꼼짝도 못하니
운전수가 그러면 단가? 운전수도 업식이란 이 말이여.
그래서 주관도 객관도 없는 그 자리를 화두라
그러니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지는 화두를
가까이 할 수 있는 화두를 스승삼고
화두를 벗을 삼는 이 복은 천하의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복이여.
염라대왕도 어쩔 수 없는 복이여.
왜냐면 내 잠재의식이 부처돼 버리는 시간이니까.
망상을 어디에 내버려두고 새로 부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망사를 화두로 아는 놈을 모르는 놈을 바꿔버렸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게 그렇게 되느냐?
와도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생대요,
죽어 가되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사대라.
이 생사대사를 알기 전에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어야 되고 처가권속 일 친척이 줄줄이 이어지고
온갖 재물 집안에 가득해도 죽는 일을 당하면 혼자 가야 됩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일 아니요?
아버지는 죽어가지고 영계에 있다가 남자로 태어나고
딸은 죽어가지고 여자로 태어나면
아버지가 좋아질 수밖에 더 있어.
서로 좋아질 수밖에 아버지인줄 알면 못살 것이요.
생사윤회의 두려움이여,
고통이여. 그것 뿐이여?
때로는 축생으로
때로는 지옥으로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하나 씀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니.
여러분이 신경질내고 짜증을 낼 때
입김을 불어가지고 실험하면 검은 연기가 나고,
참선할 때는 흰색이 나오니
꼭 같은 공기를 마셨는데 내 마음이 모르는데
있을 때는 맑은 광명이 나오고
안다고 번뇌망상이 불어날 때는 검은색이 나오니
똑 같은 물인데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젖이 되듯이
내 생각에 따라서 암흑이라는 지옥도 만들고
광명이라는 극락도 만드니
부처라는 것도 중생이라는 것도 축생이라는 것도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그 내 어떻게 해서 그러는가 한번 보자 이 말이여.
그 마음 마음하는 것을 그냥 봐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몰라서 그것을 본참 공안이라 그러는데.
야들아 야들아 내 너에게 간절히 바라니 편지를 보내니.
너 마음 마음 모르는 본참공안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서
그 화두를 놓치지 마라.
영혼이 나가버리면 넌 죽어버릴 사람인데
100m를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어디쯤 왔는지 늘 보고,
70m 쯤 온 사람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잘 살펴야 합니다.
내 상좌가 컴퓨터 공학과를 나와서 나보고
스님, 지금 컴퓨터 배워도 잘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는 것을
야 이놈아 내가 100m 중 70m를왔는데
지금 새것배울 시간이 어딨어?
죽음에 갈 준비를 해야지.
올때 배울 것을 잘 활용해서 살다 가야지.
지금 컴퓨터 배워서 니 꼬봉돼란 말이여.
여러분은 할머니는 할머니답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전부다 자기 걸어온 길을 당당하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할 수 있고,
누가 뭐래도 나는 모르는 이걸 사랑한다.
너희들 안다고 하는 것은 번뇌망상이다.
너희들도 이 모르는 것 한번 배워봐라.
세계관을 한번 바꿔봐라,
가치관을 돌려봐라.
탐구하고 탐구하라.
마음길이 뚝 끊어졌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마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지식이니까,
그 모든 지식이 모르는 걸로,
화두가 돼 버리니 마음이 끊어져버렸어.
여기에 이르러 문득 깨닫고 보면
성불한지 이미 오래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눈 먼 봉사가 눈을 뜨고 보니
허공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이 말이여.
이 한소리는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이 실현하신 묘각이고
부처님이 꽃 든 것이 기록이 없다고 해서
위경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
미안하지만 기록한다는 것은
모양 있는 것밖에 기록 못합니다.
법은 기록을 못합니다.
말씀이 끊어진 일구로밖에 기록을 못합니다.
그래서 꽃을 든거요.
눈뜬 사람들이 하나같이 꽃 든 소식을 찬탄하고
꽃든 소식에 춤을 추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이 말입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정말 여러분들이 믿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뿐이니 영겁에 물러나지만 않으면
부처 못될 사람은 한사람도 없느니라.
한 가지 더 행운인 게 있다면 우리 불자들은
내생을 믿기 때문에 금생에 못한 것은
다음 생에 다음 생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내가 옷만 갈아입는 것이 영원성을 보장하는 것이니
내생을 말하는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긍지를 가질만하다 이 말이여.
기독교에서 전도하려고 하면
당신 몇 년 살거냐고 물어보고
몇 십 년짜리가 몇 억년짜리가 까불고 있어 하고
할 만큼 긍지가 있어야 돼요.
불자들이 긍지가 없어.
나는 성직자라는 것에 긍지가 대단한 사람이여.
출처 : http://cafe.daum.net/hain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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