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칠정
목차
1. 개요
2. 오욕(五慾)
3. 칠정(七情)
1. 개요
오욕칠정(五慾七情)은 불교 용어로, 사람의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2. 오욕(五慾)
눈, 코, 귀,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 오관(五根)이 각각 빛(色), 냄새(香), 소리(聲), 맛(味), 만지는 느낌(觸)의 오경(五境)에 집착하여 야기되는 다섯 종의 욕망이다.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색욕(色慾)
3. 칠정(七情)
사람의 오관을 통해 일어나는 일곱 가지의 감정
희(喜) - 기쁨
노(怒) - 노여움, 분노
애(哀) - 슬픔
낙(樂) - 즐거움 - 희(喜)가 정신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낙(樂)은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애(愛) - 사랑
오(惡) - 미움
욕(欲) - 욕망
오욕칠정
작성자 : 불편한생각 ・ 2017. 12. 25. 20:13
불교에서 가르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은 인간을 고통속에서 헤메도록 하는 나쁜 요인들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의 블로그들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 ‘우리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떡하면 행복하게 살까?’ 그리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나 나름 대로 고민한 흔적들을 글로 적어보았다. 나의 글에 앞서 제일먼저 대답을 내놓은 곳이 종교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철학이 있었다, 철학은 수 많은 시도와 별의별 생각들을 쏟아냈으나 모두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했으므로 근본적으로 종교보다 진보한 것이 없었다고 생각되고, 나는 과학이 검증될 수 있는 답들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종교 이야기를 해보면, 비교적 원시적인 종교인 불교는 개인의 욕심을 자제하고 감정을 다스려 해탈함으로써 지고한 기쁨과 열락의 세상으로 윤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다음으로 진보한 종교/철학인 유교는 집단의 힘을 이용한 평화를 갈구하는 이념으로 개인의 욕심과 감정의 자제를 요구하고 집단의 욕심과 감정을 충족하기 위하여 도덕, 예절, 상하구별, 충성심 등을 통하여 공동체의 번영을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후에 나온 기독교는 욕심과 감정을 사랑이라는 무기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랑의 힘으로 전세계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목표를 만들었다. (기독교의 사랑과 희생의 원리는 나의 다른 블로그글 ‘두 종류의 행복’에서 과학적인 입장에서 다룬 적 있다.)
과학적으로는 진화론의 등장으로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에서 신을 배제하기 시작했으며,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본능과 감정 그리고 이성의 등장이 진화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를 포함한 진화 심리학은 우리가 사고하는 형태가 모두 유전자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또는 번영)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다음의 표에서 우리가 항상 궁금해하던 철학적인 기본 질문에 대한 각 종교와 과학의 답을 정리해 보았다.
철학적 질문
우리는 누구인가?
불교 : 윤회하는 생명체 (다음 생에서 동물이나 식물도 될 수 있다)
유교 : 공동체의 일원
기독교 : 신의 형상대로 제작된 피조물
과학 :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만들어진 운반체
인간은 왜 사는가?
불교 : 고통을 벗어나기위해
유교 :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기독교 : 신의 기쁨조
과학 :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지고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불교 : 해탈, 개인의 희생 (오욕칠정과 108 번뇌를 억제함)
유교 : 공동체 (국가/왕, 가문/가족)를 위한 헌신/희생
기독교 : 신을 위한 헌신/희생
과학 :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만든 본능을 만족시키면 보상으로 행복한 감정을 얻게 됨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불교 : 윤회
유교 : 모른다. 하지만 조상은 섬겨라
기독교 : 천당/지옥
과학 : 개체는 없어지고 변형/발전된 유전자는 후손에 남는다.
나는 이번 블로그의 제목을 ‘오욕칠정’으로 하였다. 그 동안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불교/유교/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큰 한국 사회에서는 오욕칠정과 같이 개인의 기본 본능과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국가/사회/가족이나 심지어 하나님과 같은 신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마치 지고한 행복으로 배우고 그에 따라 황당한 삶을 살도록 강요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교육과 문화적인 굴레에서 신음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대답이 우리를 만족시킬 만큼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과학적 대답에 따르면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삶은 우리의 오욕칠정을 자제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유’와도 같다. 우리는 우리의 오욕칠정(혹은 자유)를 마음껏 발산하며 행동하고 표현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오욕칠정(혹은 자유)와 충돌하기 전까지만 가능한 것이다. 그 충돌 가능한 부분은 우리가 지금껏 배운 종교적/윤리적/도덕적/사회적인 지식과 훈련을 통해서 자제하거나 우회하거나 협의해 나가야 한다.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하여 자신의 오욕칠정을 자제하는 것은 그전에 종교에서 가르치는 오욕칠정의 자제와 다를 게 없지 않나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자신의 오욕칠정을 자제하는 것이 ‘목표’인 삶과 자신의 오욕칠정을 자제하는 것이 사회성을 위한 ‘도구’인 경우로 바뀌는 차이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나의 본능 때문에 매순간 어떻게 그것을 자제시켜야 할지 고민하던 것이, 어떻게 충족시킬지 설레이며 계획하고 상상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글은 오욕칠정을 나쁘게만 보지 말자는 결론과 함께 마무리한다.